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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늘 귀 (마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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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귀 (마태복음 19;23-30)


1. 어느 정도면 구원받은 내 영혼과 바꾸겠습니까?

한 청년이 꿈을 꾸었습니다. 사탄이 찾아와서 열 개의 단지를 보이면서 이 열 개의 단지 중 아홉 개는 비어있지만 한 개는 독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독이 든 것을 고르면 약을 먹고 죽어야 하는 데 너의 영혼을 나에게 주고, 만약에 독이 없는 단지를 고르면 많은 재물을 주겠다고 흥정을 해 왔습니다.
청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에, 또 죽어서 영혼을 파는 것은 매우 큰 흥정이었지만 많은 재물을 준다기에 고민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죽을 확률은 10분의 1밖에 되지 아니하고 마음껏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까 사탄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습니다. 

열 개의 단지 중 독이 든 하나를 고르면 죽습니다. 청년은 떨리는 손을 가지고, 떨리는 가슴을 가지고 땀을 흘리면서 한 개의 단지를 골랐습니다.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청년은 너무 기뻐하고 너무 좋아했습니다. 사탄이 주는 돈으로 마음껏 사용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가고 싶은 곳 다 가 보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어 보았습니다.
돈이 떨어졌습니다. 사탄은 또 찾아왔습니다. 아홉 개의 단지를 가지고 와서 이 속에 한 개의 단지에만 독이 들어 있으니 전번처럼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돈을 쓰는 재미가 붙은 이 청년은 고민하다가 또 결정을 했습니다.

어느 한 단지를 집었더니 역시 그 단지에도 독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제 두개의 단지까지 내려왔습니다. 하나는 독이 들었고, 하나는 독이 들어있지 않은 두 개의 단지가 있습니다. 확률은 50%입니다.
청년은 너무 돈 맛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에 한 단지를 택했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역시 독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기뻐서 “이제 내가 너를 이겼다”고 소리쳤지만 사탄은 웃으면서 이야기 합니다. “이 열 개의 단지에 처음부터 독은 없었어. 그러나 그때부터 너의 영혼은 이미 나에게 팔렸다.”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구원받은 내 영혼과 바꾸자고 하면 어느 정도의 돈이면 여러분의 영혼을 내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 내 영혼을 팔 수가 있겠습니까? 더 쉽게 말하면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 예수 안 믿겠다고 신앙을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한 1억 원 정도 준다고 하면 예수 안 믿겠다고 신앙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처칠이 택시를 타고 국회에 가서 연설을 하려고 했습니다. 택시를 잡으려고 하니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마침 옆에 보니까 쉬고 있는 택시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좀 급한 데 택시를 사용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조금 있으면 처칠이 연설을 할 것인데 나는 그 연설을 들어야하기 때문에 못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급한 처칠이 택시비의 여러 배가 되는 돈을 주면서 “내가 급하니까 빨리 국회까지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돈을 받아 든 택시기사가 엄청난 돈을 보고 “처칠이고 개떡이고 가십시다!”하고는 차를 출발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 사람이 작은 돈에는 움직이지 않지만 액수에는 이렇게 민감하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1억 원에 여러분의 영혼을 팔 수 없다고 하면, 백억 원이면 예수님이고 뭐고, 신앙이고 뭐고 다 버리고 돈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한 1조 원 정도 준다고 하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1년 예산과 거의 비슷한 100조 정도 준다고 하면 예수 안 믿고 신앙을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점검해 보세요. 어느 정도만 주면 나는 신앙버리고, 예수님 버리고 떠나 갈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신랑만 나타나도 예수 버리고, 신앙버리고 시집가는 처녀들 많이 있습니다. 좋은 직장만 있어도 신앙이고 뭐고 버리고 가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 버리고 신앙버릴 때에 100조 정도 준다면 이 자리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여기서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너 100조 줄테니까 100조를 선택하겠느냐? 예수님과 신앙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고 하면 이 자리에 어느 정도 남을까 상상해 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관을 다 주고, 이 세상의 모든 땅 덩어리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금덩어리를 다 준다고 해도 예수님과 바꾸지 아니할 수 있는, 신앙을 버리지 아니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보다도 더 가치있고, 이 세상의 온 우주보다도 더 가치있는 분이 예수님이시오, 그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이 우리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질은 잠시 있다가 지나갑니다. 천국 갈 때까지 수단으로 쓰고 있다가 다 두고 갈 것들이 물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재산과 영혼을 바꾼 청년

오늘 본문에는 그의 재산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부자인 한 청년이 그의 재산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고 슬픈 기색을 띠면서 예수님을 떠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원이요, 부자요, 청년인 이 사람에 대해서 여러차례 생각해 오는 중에 있습니다.

그는 참 겸손했습니다. 용기있는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프거나, 가난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영생의 문제, 아주 차원높은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데 그 방법을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 구원을 얻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서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하나님이었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이었습니다. 돈이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영생도, 구원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네 마음 속에 있는 물질이라는 하나님, 재물이라는 하나님, 돈이라는 하나님을 끌어 내리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나를 따르라>는 말입니다.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돈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고,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버리고 물질을 붙들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청년은 돈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찬스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 기가막히게 절묘한 시간을 잘 이용해서 오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 저 사람 좀 보아라, 너, 저 사람 잘 보았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얼마나 어려운가하면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 예수님은 물질과 구원의 관계를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물질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지, 아주 단적으로, 아주 심각하게, 아주 정확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3. 물질의 힘

물질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재력, 금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웬만한 것들은 돈으로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물질은 마치 만능처럼 보여집니다. 돈이면 얼마나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모릅니다. 돈이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몰려옵니다. 돈 있으면 굽신거립니다.

이렇게 돈의 힘이 크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심지어 생명까지 내어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 마음이 붙잡히면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사람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이고, 내 자신도 보이지 않습니다. 돈이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가 버리면 돈의 노예가 되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돈이면 참 자유할 것 같습니다. 자유스러워 집니다. 그러나 정말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돈 때문에 모든 자유를 다 잃어 버립니다. 유리를 가지고 보면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수은을 발라 버리고나면 자기 밖에 안보입니다. 

돈을 눈 앞에 받치고 나면 다른 사람,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돈에 사로잡히면 신앙도 봉사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제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큰지 돈은 하나님과 같이 숭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배금주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두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물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물질 문제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래야만 관심이 있어지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40%가 물질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복음서의 교훈 가운데 30%가 물질과 관계된 교훈입니다.


4. 하나님은 경배하고, 물질은 다스리고

물질 문제에 대한 바른 태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물질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은 만물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만물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려야 됩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되어야 하고, 만물의 지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만물을 다스려야 되는 것이 인간의 위치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물인 자신이 앉든지, 물질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인간은 인간의 위치로 돌아가고, 물질은 물질의 위치로 보내는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이것이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본래 인간의 모습인데 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청년은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이제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하나님이십니까? 돈이 나의 하나님은 아닙니까? 말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돈이 나의 하나님 아닙니까? 돈이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돈이면 하나님보다도 더 영향력을 미치는 그 존재가 돈 아닙니까?

돈 100조원을 택하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택하겠느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택하시겠습니까? 돈을 택하겠습니까? 하나님만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교회생활 속에서 십일조는 돈이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는 물질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나는 물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물질을 숭배하지 않습니다.>이런 고백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얼마되지 않는 십일조도 못하는 사람이 100조냐, 하나님이냐, 선택하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을 선택하겠습니까? 안되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배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하나님을 향해서 물질쓰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자식 위해서 물질쓰면서 아까운 부모가 있습니까? 없어서 더 못해주지, 있으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드리고, 또 드리고, 또 드려도 더 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나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인색한 사람이 100조를 택하겠느냐, 하나님을 택하겠느냐, 선택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을 선택하겠습니까? 안되는 말입니다.

이런 물질관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현세에, 돈에 가치를 둡니다. 물질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현세보다도, 내세에, 돈 보다도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수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바꾸어 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부자들은 더 그렇다는 말입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물론 돈 많은 사람이 부자입니다. 문자적으로 물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돈이 많고적고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적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수 조원의 돈을 가지고도 <내게 있는 것은 내 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돌려드려야 할 돈이다. 나는 단지 청지기일 뿐이다. 하나님 뜻대로 내 돈을 사용해야 된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것 아니니까, 하나님의 것이니까, 청지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적으로 부자가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살기가 참 힘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낙타가 얼마나 큽니까? 요즘 우리나라에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다고 하면 <황소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낙타가 거기에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황소가 바늘 귀로 들어 가려고 해 보세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문화적으로 사실 예루살렘에는 <바늘귀 문>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집을 건축하면 큰 대문이 있고, 옆에 한 사람, 두 사람 들어가는 작은 문을 만들지 않습니까? 큰 짐이 들어올 때만 큰 문을 열지, 한 사람이 들어 올 때는 큰 대문 열지 아니하고 옆의 문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도 낮에는 활짝 열어 두었다가 외적이 온다든지, 밤이 되면 큰 문은 닫아버리고, 작은 문- 바늘귀 문, 낙타가 서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기어서 들어가는, 사람도 겨우 들어가는 문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문이 바로 <바늘귀 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바늘귀 문>하면 사람들이 이해했겠지만, 실제적으로 문자적인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자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물질이 우상이 되면 하나님께서 깨뜨리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하니까 물질을 죄악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물질은 다 선합니다. 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청빈낙도가 자랑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바른 방법으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벌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가정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물질을 우상화 하는 것은 더욱 안 됩니다. 물질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물질을 지배하고 관리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복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섬기는데 도구로만 사용할 수 있는 성도가 참성도인 것입니다. 돈이 많지만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에 매이지 않고 돈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돈 때문에 눈이 멀지 않고 오작 하나님만 섬길 수 있는 성도가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돈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씌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용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수단이고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라고만 믿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100세에 아들을 낳았으니까 그 아들을 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경건한 아브라함이었지만 귀엽습니다. 든든합니다. 건장하게 자라가는 아들을 볼 때 그 아들에게 너무 정신이 팔렸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좀 등한시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내게 번제로 바치라.> 아브라함이 이때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하나님이야, 이삭이냐, 두 길 중에 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은 결단을 내립니다. 아들을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이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너무 기뻐서 <그래, 내가 네게 반드시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지 않습니까? 아들을 사랑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인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은 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지배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둘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어느 쪽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청년은 물질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부자가 물질을 포기하고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 힘듭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묻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부자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버리게 하십니다. 내가 바늘귀에 들어갈 만큼 작아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작게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헐어버리지 못한 우상, 하나님이 허믈어 버립니다. 내가 끊지 못한 것, 포기하지 못한 것, 하나님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보다도 더 중히 여기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제거하시고 하나님만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약대하고 바늘이 비유가 됩니까? 그렇지마는 그렇게 작은 바늘귀처럼, 큰 약대와 같이 내가 교만하고, 많이 가지고, 많은 것을 거드럼 피우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늘귀만큼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고 작게 만들어서 결국 바늘 귀로 들어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 하나님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게 하시면, 하나님이 작게 하시면, 하나님이 낮추시면 거기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낮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작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면 하나님도 아픔이요, 우리도 아픔입니다. 아마도 이 청년이 예수님 말씀에 “예, 예수님 제가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오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빨리 오겠습니다.” 하고 기쁨으로 가려했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래, 다 팔아 오너라>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자네 마음을 보니 됐네, 됐어, 이제 나를 따르게.>하셨을 것입니다.


6. 하나님은 우리가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청년은 물질 때문에 그의 영생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 첫마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 땅을 정복하라> 천지를 창조하신 부유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이 땅에서 복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부요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쪼그리고 앉을 땅 한평 없이, 집 한 칸 없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왜요? 부요하신 그분이 우리를 부요케하기 위해 친히 이 땅에 가난하게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부요케하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신데 왜 이 땅에서 부요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부요케 해 놓으면 그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 버릴까 봐서 두려워서 하나님은 못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부하게도 하지말고, 가난하게도 하지 마옵소서. 너무 부하여서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하오며 너무 가난해서 죄지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이런 염려를 했습니다. <네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에 살고 우양이 번성하고, 네 은금이 많아지고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할까 하노라>이런 염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받지 못하는 자식도 고통이겠지마는 그러나 주어야 되는데 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아픈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껏 부어주어도 하나님 섬기고 물질을 다스리고, 주의 뜻을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주시고 우리에게 사람붙여 주셔서 우리가 이땅에서 더 부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 있습니까? 물질이 하나님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사용해서 더 맡겨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을 버려서라도 ,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려서라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요,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외 모든 것은 우리가 관리하고 지배해야 될 대상입니다. 물질이 그렇고, 권세가 그렇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돈은 마치 거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름은 쌓아두면 냄새납니다. 뿌리면 땅이 옥토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쌓아 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심고 뿌려서 더 많이 거두라고 주신 귀한 물질들입니다.

이 물질을 우리가 배금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성도들 되어서 주님께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우리에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실 때에 아브라함처럼, 베드로처럼 순종할지언정 이 젊은 관원이요, 부자 청년처럼 그렇게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가지 아니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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