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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틀을 잡으라 / 행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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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믿음의 틀을 잡으라
성경본문 사도행전 12:1-9

설교내용  그림이나 사진을 액자에 넣으려면 맞는 틀을 가지고 장식을 합니다. 큰 그림은 큰 액자의 틀이 있어야 하고, 작은 그림은 작은 액자의 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활주변에는 모든 것이 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기본 본이 있습니다. 피아노, 오르겐, 스피커, 의자도 전부 기본적인 틀이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만물들은 기본적으로 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틀도 많이 있습니다. 편견, 선입관, 전통들도 보이지 않는 틀입니다. 특히 인식의 틀이 아주 중요합니다. 며칠 전 광복절이 지났는데, 안중근 의사는 우리쪽에서 보면 충신이고 의사입니다. 그러나 일본쪽에서는 원수입니다. 히로부미는 일본쪽에서는 영웅이고 위인이지만, 우리가 볼 때는 침략의 원수입니다. 이렇게 한일간의 인식의 차가 역사관의 해석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인식의 틀

  우리들에게는 이런 인식의 틀 때문에 행동이 제약을 받고, 우리의 삶에 시행착오를 일으키는 일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에 있는 동안에는 넓은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아, 하늘은 저렇게 손바닥만 한가보다’ 우물을 벗어나지 않는 개구리는 절대로 하늘에 대한 넓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붕어빵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붕어빵 틀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붕어빵을 살 때 “한 개 더 주세요” “두 개 더 주세요” 그렇게 주문하지 “큰 빵 하나” “작은 빵 하나 주세요”라고 주문하지 않습니다. 붕어빵이 커지려면 빵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믿음의 틀을 잡으라는 메시지를 새기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장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할수록 그 생각의 틀이 바뀝니다. 인식의 틀이 바뀝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갑니다.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보면 틀 싸움입니다. 우리는 내용을 가지고 싸움을 할 때가 많습니다. 조건을 가지고 싸울 때가 많습니다. 선물내용이 무엇인가? 조건이 무엇인가?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여기에 신경쓰고, 법을 동원하고, 힘을 기울이는 것이 인간생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삶의 틀입니다.

  틀이 고장 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두 고장 나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은 수리를 해야 합니다. 김창수 선교사님이 말씀하는데 가나에는 자동차가 고장 날 때 카 센타에 가면 더 고장 난다고 합니다. 가나에는 카센타 정비시설이 아주 미비하고, 기술자도 없답니다. 그래서 차를 고치러 갔다가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도 요리를 만드는 기기가 금이 가서 물이 새든지, 가스불이 잘 올라오지 않고 올라 왔다가 꺼졌다 하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인격의 그릇이 깨져 있는데도 그것은 방치하면서 조건을 가지고 자꾸만 따지는 이런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역사는 틀 속에서 진행되어 갑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틀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헤롯의 정치적인 의도

  오늘 본문에 보면 헤롯이라는 악날한 왕이 나오고, 믿음의 사도 베드로가 나옵니다. 헤롯의 모습을 보면 그는 악한 왕입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틀을 가지고 유대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왜 헤롯은 사도들을 죽이는가? 그것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두매인 입니다. 헤롯의 조상은 에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훗날 이두매인과 유대인이라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이후 이천년만에 이두매인 가운데 유대인을 다스리는 헤롯왕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또 하나의 모순입니다. 유대인을 다스리는 왕은 유대인이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오신 그 시대는 이두매인 헤롯이 분봉왕으로 유대를 다스리는 역사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지 않고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제일 먼저 성전을 지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지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당근정책으로 성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도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제일 미워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미워하는 사도들을 죽임으로서 유대인이 기뻐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헤롯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그리고 줄줄이 사도들을 죽일 흉측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의 이러한 악날한 계획을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헤롯이 사도들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고, 역사가 헤롯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헤롯을 간섭하고, 다스리심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헤롯의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누가 보아도 베드로는 구출의 가망이 없습니다. 왕이 죽이려고 하는데 안 죽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보통 감시를 받는 죄수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베드로를 감시하기 위해서 헤롯이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군사 네 사람을 한 조로 해서 네 조를 만들어서 24시간 교대로 베드로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철장 안에 있는데 군사 두 사람이 베드로의 양쪽에서 팔을 서로 쇠사슬로 묶었다고 했습니다. 경찰관이 죄수를 도망 못 가도록 서로 한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처럼 철장 안에 있는 베드로를 그것도 못 믿어 양쪽에 군사를 두고, 서로 팔을 쇠사슬로 묶어서 도망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두 사람의 군사는 감옥 밖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네 사람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구출이 불가능합니다. 탈옥이 불가능합니다. 그 길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유월절 행사가 끝나면 내일 베드로는 사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교회에 무서운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야고보가 죽었고, 베드로마저 살 가망이 없는 그 위기의 때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전날 밤에 천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깨워서 감옥을 탈출하게 하는 하나님의 탈옥작전이 성공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의 틀, 손길이 헤롯의 계획을 능가하고 이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헤롯과 베드로의 싸움이 아니라 헤롯과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베드로는 헤롯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교회는 헤롯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을 이깁니다. 그 하나님이 헤롯과 전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관찰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헤롯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할 일과 천사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헤롯왕은 천사를 보내어 싸움하지 않으면 교회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군사를 이기게 하고, 헤롯을 이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할 일과 천사가 할 일이 따로 있고, 베드로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빌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천사의 손을 옮기셔서 베드로를 구출했습니다. 이것은 쇼생크 탈출처럼 탈출기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우리 앞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의 믿음의 틀을 배우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믿음을 관찰해 보면 베드로가 이 감옥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그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내일 죽을 사람인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사형을 앞둔 사람은 그 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선잠을 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잠결에 천사에게 이끌려 옥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의 이 잠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고백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죽음을 앞둔 그날 밤에 이토록 깊은 잠을 자는 베드로는 미련한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은혜의 틀을 보여준 것입니다. 베드로가 잤던 이 잠은 은혜의 잠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주는 하나님의 단잠입니다. 우리 모두도 고통의 시간에 이런 단잠을 자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길은 한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내 생명을 맡으시옵소서’ 이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죽어도 좋다고 맡길 때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날 밤에 도무지 잘 수 없습니다.


  믿음의 틀이 바뀐 베드로

  베드로는 너무 다른 사람입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제사장의 뜰에서 생명의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도 계집종 앞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 잡혀서 이제는 내일 죽을 날을 앞두고도 이렇게 깊은 단잠을 자는 베드로, 그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베드로의 믿음의 틀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을 보는 믿음이 달라졌습니다. 이 베드로에게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 안에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살 안에서도 깊은 단잠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감옥 안에도, 베드로에게도 가까이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틀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사건 하나 하나 간섭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내 믿음의 틀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들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잘 믿어 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도 쏟아져 버리는 틀이 깨어져 있는데도 그 틀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은혜만 받으려 했고, 잘 믿어 보려고 했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에게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틀이 고장 났으면 고쳐야 합니다.

  믿음의 틀은 중요합니다. 이 베드로를 보면 그의 일그러진 믿음의 틀이 어떻게 견고한 믿음의 틀로 교정되었을까? 우리는 베드로의 이 아름다운 모습, 강직한 모습, 목숨을 걸고 그는 복음을 전할뿐 아니라 죽음의 밤을 맞이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잠을 즐길 수 있는 그 믿음을 가진 베드로를 통해서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틀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신앙의 틀을 교정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신앙의 틀

  첫째, 죽음의 틀입니다. 오늘 이 사건을 보면 죽음사건입니다. 야고보가 죽었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마저 잡혀 내일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풍비박산이 될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가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헤롯이 잡아죽이려는 죽음의 절박함은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목사님, 내가 왜 죽습니까?” “우리 가족이 왜 죽습니까?” “우리 가정의 장례행사는 몇십 년 후의 일입니다” “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틀이 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틀은 죽음과 맞추어야 합니다. 야고보의 죽음은 나의 죽음일 수 있고, 베드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가 나의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 사건과 믿음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죽음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죽는다는 것과 연관을 가진 믿음의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죽을 때도, 내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올 때도, 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믿음의 틀이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이 믿음의 틀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은 무아사상과 윤회사상입니다. 불교는 해탈함으로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극복함으로서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무아사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사상입니다. 전생이 있고, 후생이 있습니다. ‘전생에 못 이룬 한을 후생에서 풀어라’는 것이 불교사상입니다. 이 무아사상과 윤회사상은 영원히 모순입니다. 무아가 되어 버리는데, 자기가 멸절되어 버리는데 무슨 윤회가 일어납니까? 자기가 없어져 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이 영원한 모순을 불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석가가 가르쳐 주지 않고 갔습니다. 석가는 무아를 증명해야 하는데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석가가 윤회하여 후생에 좋게 태어나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석가는 다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영원한 모순을 안고 그 모순 속에서 진리라고 혼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에도 불교사상과 유사한 사상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합니다.

  안개는 실체가 없습니다. 불교의 무아사상과 기독교의 안개사상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들은 안개다, 소멸될 존재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영생을 얻는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개와 영생도 영원히 모순입니다. 안개와 같이 실체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영생을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왜 안개라 했습니까? 죽어버리는 영원한 멸망에 처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아래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으면 소망이 없기 때문에 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순을 해결해 주신 메시야이십니다. 인간의 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안개가 되어야 할 우리 존재를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시고, 죄의 허물을 거두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 살리셨습니다. 영생의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생을 확정하기 위해서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은혜 안에서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개와 영생은 모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가는 이것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요즘 영생교 파동이 또 있습니다. 20년 전부터 한국교회 안에 있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10년 전에도 사건이 터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시체를 발굴하지 못했고, 증거를 잡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망한 종교입니다. 조희성은 박태선의 수제자입니다. 예배인도하는 기법이나 교리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법은 전부 박태선의 방법  대로입니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영생교는 생존집단이 되기 위해서 테러화 된 것입니다. 영생교에 들어가면 못 빠져 나옵니다. 빠져나가면 잡아죽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집단으로 변했으면 공권력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참 답답한 것은 우리나라가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헌법이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극악무도한 짓을 해도 그 행위를 한 교주나 개인은 처벌을 해도 교회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저 영생교를 해체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생교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히 망가져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 해체시켜야 하는데, 교회가 있는 한 영생교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교주가 없어져도 조직이 있으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주말마다 영생교 특집방송이 됩니다. 참고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영생교의 유혹, 사이비 이단의 유혹을 우리가 극복을 해야 합니다. 영생교에서의 설교는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는 그 주간의 시사를 끌어 와서 부시가 무엇을 했고, 클린턴이 무엇을 했고... 그것을 다 내가 했다고 합니다. 태풍이 지난 주간에 우리나라를 비켜 갔는데 그것을 내가 비켜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하는데도 사람들이 빠져들어 갑니다. 미혹의 영입니다. 악령의 영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내편에서 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있지만 평균 80세 안에 다 가야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 공동묘지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공동묘지에 가고, 납골당에 가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그건 우리 시신을 관리하는 수단일 뿐 우리가 이 땅위에 살다가 죽을지라도 우리의 영혼, 생명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는 이 소망을 붙잡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음이 내게 어떤 형태로 다가오더라도 그 죽음 앞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 틀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삶에 대한 신앙의 틀

  둘째, 삶에 대한 틀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역사 전체로 볼 때는 한 사건 안에 두 가지 형태를 일으켜 줍니다. 야고보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살렸습니다. 야고보 개인을 보면 죽었습니다. 베드로 개인을 보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에게는 삶은 없고 죽음뿐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죽음은 없고 살아난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하나님은 함께 역사 속에서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 안에는 죽는 자도 있고, 사는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도록 허용하는 자도 있고, 절대로 죽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살리는 자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야고보는 희생이 되도록 하셨지만, 베드로는 결코 그렇게 죽지 못하도록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양면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과 삶의 두 가지 틀이 공존합니다. 살았지만 우리는 죽음의 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내게 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 사는가? 베드로가 왜 살았는가? 그것은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야고보가 남겨 놓은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를 쓰시려고 했는데 야고보는 일찍 갔습니다. 야고보가 못한 일을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죽은 자는 가지만 일은 남겨놓고 갑니다. 그러므로 남겨진 일은 산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삽니까? 하나님이 남겨 놓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삽니다. 그 일이 없다면 주님을 위해 일하지 않는 인생이라면 살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의 틀은 야고보가 못한 일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거리를 주시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아산재단의 정 회장이 갔습니다. 그러나 일거리는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우리는 남아 있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은 하지 않고 죽은 자만 생각하고 얽매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죽은 자는 일을 남겨놓고 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빚진 자입니다. 산 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라고 하는 그 일과 내 삶의 틀이 맞아야 합니다. 분주하게 살기는 사는데, 땅위에서 부귀영화는 누리는데 틀이 맞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정 회장은 인류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유학을 했습니다. 그는 재물도 가져 보았습니다. 기업은 빚을 지고 있지만 그 사람 집은 가난한 집이 아닙니다. 친구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다 가진 사람인데 왜 그가 자살합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생의 틀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 틀이 무너진 사람은 다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맺는 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조건이 아닙니다. 틀이 깨어진 사람은 가질수록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빈 그릇이 깨어지면 괜찮은데 그 안에 쥬스가 담겨 있든지, 음식이 담겨 있으면 치우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많이 갖추었다고 인생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틀이 깨어지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틀이 견고한 인생은 위기가 와도 극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인생의 틀을 점검하고 믿음의 틀을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승리의 틀 안에 내 인생을 가두어 두기 바랍니다. 내 좁은 믿음 안에 하나님을 가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안에 우리의 일생을 던져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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