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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목표 /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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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목표
빌3:12-16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을 하나 지적하라면, “성도란 과연 무엇인가? 성도란 과연 누구인가?” 라고 하는 자기신분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자아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자기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이렇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다거나, 혹은 어떤 직분(목사, 장로, 권사, 집사)을 맡았다거나 할 때 우쭐해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만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장로인데, 헌금을 얼마를 했는데... 자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는 굴어지고, 그리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는데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 분석 : ⓐ 전반적으로 오래된 교회일수록 성장이 둔화된 것이 뚜렷합니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성장이 되질 않습니다.

      ⓑ 그러면 그래도 성장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역사가 얼마 되지 않는 신생교회입니다.

      ⓒ 왜 그럴까?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것일까? 이것은 참 기현상이거든요. 오히려 부흥을 해야 한다면 오래된 교회가 신생교회보다 더 부흥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참 기현상입니다.

예)어느 교회 성장 세미나의 강의 테잎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강의 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오래된 교회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 이 강의를 맡은 강사 목사님의 강의 첫 멘트가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이것입니다. “오늘 강의할 강의 제목이 오래된 교회 어떻게 부흥시킬 것인가 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오래된 신자가 많고 직분자도 많을 텐데(장로, 권사, 안수집사...)을 텐데 오래된 신자가 많은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오래된 신자는 분수를 모르고, 주제를 모릅니다. 도대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이어지는 강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오래 믿었으니까, 그리고 공적도 있고 하니까 서로서로 대접만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 목사님 - “내가 그래도 이 교회에서 몇 십 년 봉직한 목사인데 이 정도 밖에 대접 안 하나?”

ⓑ 장로님 - “내가 그래도 이 교회에 몇 십 년 동안 섬기면서 연보도 많이 했는데, 교회의 주인은 난데...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 당연히 내가 대접을 받아야지!”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청년이 가만히 보니까 기분이 나쁩니다. 불쑥 나서서 하는 말이 “나는 이 교회를 3대에 걸쳐서 섬기는 자입니다. 내가 더 고참인데, 이 교회의 주인은 납니다.”

이런 교회가 부흥이 될 리가 있습니까? 절대 부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강의를 맡으신 목사님의 첫 마디가 “오래된 교회, 오래된 신자를 부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을 하시는 거지요.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부흥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성령운동입니다. 초창기부터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밑받침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나마 부흥하는 교회는 성령 운동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운동이 한국교회 부흥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기는 한대, 그런데 결정적인 약점을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영적인 능력, 은사가 나타나게 되니까 교회의 질서에 순복하지 아니하고 은사를 내세우고 능력을 내세우면서 “내가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간섭도 안 받습니다. 지도를 받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하나님이 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자아정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릅니다. “오래 믿었는데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직분을 맡았는데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헌금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기 확인이 없기 때문에 높아지려고 하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급기야는 오히려 교회의 부흥을 가로 막는 걸림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목사 아무개, 내가 누구인가? 안수집사, 아무개 내가 누구인가? 권사 아무개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고, 무엇 때문에 오늘도 주를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12절을 보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잘 오질 않습니다만,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a.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았다는 얘기입니다. - 사로잡았다. 점유했다.

b.“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 번역상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만 이런 얘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으니, 나는 거부하지 아니하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좇아간다.” - 운동 경기장에서 경주자가 오직 앞만 보고 부지런히 달려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사도는 자신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았던 사람입니다.

1)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완전히 붙잡혔다고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에게 포로가 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도란 어떤 자를 말하는 것이냐?”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 포로된 자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바가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선택된 자에 의해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인가 하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은 주권적인 존재인 것 같지만 냉철히 우리의 삶의 실상을  점검해 보면 주권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런데 주권적이지 못하다는 역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다스리고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주권적인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범죄한 인간이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돈을 다스려야 하는데 돈이 나를 다스립니다. 욕망을 다스려야 하는데 오히려 욕망이 나를 다스립니다. 육체를 다스려야 하는데 오히려 육체가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고 결국에는 육체대로 살다가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권적인 존재입니까? 아니지요. 사실 인간은 주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누구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들리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가 쓰는 편지의 맨 서두에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너희들에게 편지를 쓴다.” 거의 이런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고백이지요. 노예라고 하는 것, 이것은 결코 자랑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지만 인간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이것이 노예지요. 그러니까 짐승 같은 사람이 노예입니다.

a. 저희 집에 개를 키우는데 한 7년을 집 안에서 같이 지냈으니까 짐승이지만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저희가 고기를 먹으면 고기 몇 점 던져 주고 먹게 합니다. 제가 누워 있으면 살며시 제 옆에 와서 자기도 눕습니다. 개를 키우는데 돈이 심심치 않게 들더라고요. 병원에 한 번 가면 병원비가 사람보다 비쌉니다. 시골에서 풀어 놓고 막 키우는 개는 사람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쏟아 부어주면 그것으로 한 끼가 해결되는데,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애견은 개가 먹는 특별한 사료를 비싼 돈을 주고 삽니다. 개를 예뻐해 주고 하니까 어떤 때에는 자기가 개인지, 사람인지 착각하는 것 같아요. 자기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보고 어떻게 사납게 짖어 대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말이지요. 내가 개고 개가 사람인 것 같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집에서 웃으면서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집 개는 “사람 같은 개”라고 말입니다.

b. 그런데 노예는 말이지요.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저희 집 강아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실감나는 표현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지금의 저희 집 개만도 못한 존재가 바로 노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스스로 노예라고 하는데, 그런데 어떤 노예냐?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겁니다. 노예는 부끄럽고 창피한 것입니다.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공포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노예인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랑스러워서입니다. 감격스러워서입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노예인데 돈의 노예가 아니라, 명예의 노예가 아니라, 정욕의 노예가 아니라 육체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뭐가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 이렇게 생각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울에게서는 특별히 그렇습니다. 과거에 그가 누구였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잡아 가두고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증인으로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요,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를 불러서 복음을 전하는 포로로 삼아 주셨으니,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 종이 되었다.” 이 사실을 간증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요즘 말로 말하면 주제파악을 해야 합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있다면 주인이 허락한 범주 안에서만 있습니다. 만약에 주인이 허락한 범주를 벗어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방종입니다. 타락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불행한 운명이 된 원인을 찾는다면 무엇입니까?

a.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냥 대충대충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작품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작품을 보시고 스스로 만족하시고, 감탄하셨습니다.

b. 이렇게 완벽하게 창조된 피조세계의 모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다스리고 정복해라.” 그런데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은 그야말로 누구의 간섭과 제제를 받지 않아도 좋은 자유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스리고 정복하라. 충만하라.” 무엇이 거칠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입니다. 창2:16- 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멀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모든 것은 임의로 먹어도 좋지만 그러나 선악과만큼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임의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인간은 무한정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 테두리 안에서입니다. 그 법 테두리를 넘어선 것은 방종입니다. 타락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주님께 팔린 존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자기의 소유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벗어난 자유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그것은 방종이요, 타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쭐대거나 거드름을 피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우쭐 할 것이 어디 있고,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오래 믿었거나, 연보를 많이 했거나, 봉사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교만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종의 신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감사할 것뿐입니다. 어디까지나 종입니다. 목사라면 그리스도 앞에 더 붙잡혀야 홥니다. 오래 믿었다면 짧게 믿은 사람보다 더 붙잡혀야 합니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더 주를 닮은 모습으로 약한 자를 돕고,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모난 인격을 정화시키고, 뒤를 따르는 갓 태어난 어린 신자들에게 참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바울사도는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서둘러 앞을 보고 달려가는 모습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두리번두리번 하면서 한 눈을 팔 것이 아닙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두리번두리번 하는 것은 아직 목표가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을 때입니다. 지난 날에는 그러했습니다. “돈을 좇아갈까? 정욕을 좇아갈까? 육체의 향락을 좇을까? 아니면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이런 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지난 날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얘기는 끝난 것입니다. 목표도 정해졌고 방향도 정해졌습니다. 이제는 확신 있게 그리스도의 포로된 신분으로 앞만 보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포로된 신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방종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대로 마구잡이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경건해야 합니다. 이제는 의로워야 합니다. 이제는 겸손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낮아지며 섬겨야 합니다. 지난 날에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았다면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예전에는 대접을 받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면 이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상석에 앉기 위해서 남을 짓누르고 밟고 올라가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아닙니다. 말석에 앉습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기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나를 알리고, 인간적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때로는 양심도 팔면서 거짓되고 불의하게 사는 것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내 야망은 실현되지 못해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사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몸을 아끼지 않습니다. 물질도 아끼지 않습니다. 생명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갈2:20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 빌2:20-의 성경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신분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이것이 성도의 신분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무슨 말이라고 했습니까? 경기장의 경주자처럼 앞만 보고 부단히 그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요. 이제 우리는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방향도 정해졌고 목표도 정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놓고, 그분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나는 하고 싶지만 그리스도가 원하지 않는다면 안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기 싫지만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기 싫지만 그리스도가 가야 한다면 가는 것입니다. 나는 가고 싶지만 그리스도가 가지 말라 하시면 안 가는 것입니다. 나는 먹고 싶지만 그리스도가 먹지 말라 하시면 안 먹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철저하게 다스려지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포로인 성도인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가 옥중에서 쓴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나는 어떤 자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어떤 자이건, 아!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십니다.

내가 누구이든 선하든 악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나는 분명히 당신의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 자신을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제는 내가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내가 나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의 운명을 책임지려 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예전에는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한들 책임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에게 붙들린 노예는 그 운명의 권한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주인이 좌지우지합니다. 주인이 책임을 집니다. 우리 이 사실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책임을 지시어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책임졌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조각난 상태로 깨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방황만 하다가 지쳐 쓰러진 존재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망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나를 조종하셨습니다.

그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드셨습니다. 나의 운명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때로는 채찍질 하시면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분의 포로된 종이요 그 분은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돈에게 자기의 인생을 맡기려 합니다. 세상 취미에 매력을 갖고 쓸데없이 세상에서 배회하며 이생을 소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정욕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괜히 음탕한 생각을 하며 어두운 곳을 찾아 다닙니다. 성도의 생활 습관이 점점 하나님의 떠난 방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왜 이런 형상이 있는 것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에게 포로된 자인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달음이 없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본문 13-14절을 보니까 “형제들아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더 확실하게 예수에게 속해 있고 싶고, 더 친밀하게 예수님과 하나 되고 싶은 거룩한 욕심, 더 강하게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고 싶은 열정이 바로 우리의 푯대인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이 답답하다고 하여 물 밖으로 뛰쳐나간다면 그것은 곧 사망입니다. 기차는 날마다 레일 위를 달립니다.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달릴 수 없습니다. 오직 레일 위만을 달립니다. 레일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탈선을 한다면 그 기차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고기는 물속에서 자유한 존재이고, 기차는 레일 위에서 자유한 존재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잡혀 있다는 것이 자유의 속박처럼 느낄는지 몰라도,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의 자유가 있습니다. 더욱 풍성히 누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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