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보았다`하므로 믿느냐? / 요 1:43~51

  • 잡초 잡초
  • 270
  • 0

첨부 1



제   목 : '보았다'하므로 믿느냐?
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43~51절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 43~51절) 

<목회기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부족하고 둔하며 추한 입이지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기도합니다.
오늘을 살게 하심 감사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함께 앉은 사람들이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로 인해
하나님께 죄송하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들이 많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있음으로, 기둥교회가 있음으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서도 희망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에 소속된 성도들 중에 군대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
객지에 나가 사는 이들, 외국에 나가 사는 이들,
병상에 누워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저들 모두에게도 은혜와 평강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부족한 종이 말씀 들고 섰습니다.
능력의 손으로 붙드시옵소서.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에도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은혜의 자리에서 만나서 감사합니다.
살다 이상한 자리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된 자리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옆의 분들과 "평안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냉소적인 나다나엘
 
<베드로>, <안드레>와 한 동네
벳세다(Bethsaida, '고기잡이 집'이란 뜻)에 살던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뒤에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가? 아닌가?'하는 것에 대해
신학자들의 논쟁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근거에 의한 학자들의 결론은
나다나엘을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12제자 중에
베드로, 요한, 안드레, 도마, 마태, 가룟 유다, 빌립, 시몬,
야고보(세배대의 아들, 요한의 형제), 바돌로매,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이중 바돌로매가 나다나엘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열두 제자의 명단이 나올 때 바돌로매는
마10:3, 막3:18, 눅6:14, 행1:13에 나온다.
그러나 한번도 나다나엘의 언급은 없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바돌로매는 한번도 언급이 된 일이 없고
나다나엘이 제자로 포함이 되며,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나다나엘은 갈릴리 가나 사람으로
설명이 되어 있고, 그 역시 어부였을 가능성이 크다(21:2).
그리고 공관복음의 제자 명단에 바돌로매는
제자들의 이름 빌립과 짝이 되어 나오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나다나엘을 예수에게로 인도한 사람은 빌립이었다.
바돌로매 - 나다나엘은 빌립의 친구였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입니다(요1:45).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증언의 핵심은
모세와(신18:18~19 참조. 요12:21,25) 선지자들이 기록하였던
(사52:13-53:12, 단7:13, 미5:2, 슥9:9)
그 이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에 대한, 메시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나다나엘에게 논리정연하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바르게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 성경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배웠다고 해서 꼭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운 것 때문에 교만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하지는 못하더라도
성경말씀을 옳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정도의
바른 성경지식은 있어야 합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정확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은 나다나엘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오히려 냉소적인 말을 내뱉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했습니다.
"Is it possible for anything good to come from Nazareth?" - The Simple English Bible
"Nazareth! Can anything good come from there?" - NIV
'나사렛! 그 동네에서 어떤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나?'
'그 동네 내가 잘 알아'하는 말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신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으로 유대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곳의
아주 위축된 곳이고, 사투리가 심해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진 장소이며,
이방 사람들이 사는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순수한 유대 문화를 갖지 못한 지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신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습니다.
나다나엘과 같은 태도는 보통 사람들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는데… 내가 경험해 보았는데… 천만에… 그럴리 없어…]라고
우리도 곧잘 이런 식의 표현으로 단정지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단정이, 그런 결론이 엄청난 실수를 불러오는 일이 많습니다.
 
 
와 보라
 
'나사렛!' 하며 말하는 나다나엘의 말에
빌립은 다른 말로 예수님에 대해 나다나엘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냉소적인 말에 대해 논쟁을 피했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답했습니다.
"와 보라" (Come and see.)
 
디도서 3장 9절에 보면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3:9)고 했습니다.
사실 빌립처럼 "와 보라"는 간단한 답은 명답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며, 그 만남으로 얻어지는 확신과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예배의 자리에 앉도록 "와 보라"고 해야 합니다.
[와 보라]는 초청은 구원의 길 안내이며, 교회성장의 밑거름입니다.
[와 보라]는 초청은  예수 믿는 사람, 먼저 믿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선포한 것이지
하나님이 사람들을 설득을 시키려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도를 한다고 해서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하면 쉽게 실패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개하기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설명하기에는
우리의 지식이 너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와 보라]고 하여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으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여러분은 성경을 다 이해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다 알고 이해해서 믿습니까?
아닙니다.
- 예수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보니 변화되었고
- 믿음으로 예수님 만나니 구원과 영생의 확신을 가졌고
- 믿음으로 예수님 만나니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208장 1절에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예수 내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그러므로 사람들을 이해시키려고 하기 전에
[와 보라]고 청해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예배의 자리에, 말씀 듣는 자리에…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어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합니다.
"그 식당 음식 잘 한다. 요리를 아주 맛있게 잘한다."며 식당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번도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금년 1월 1일부터 오늘까지 다른 사람에게, 친구들에게, 친척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기둥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자"고
한번도 청하지 않은 사람은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입을 다문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약4:17).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나엘
 
그런데 우리가… [와 보라]고 입을 열려면
먼저 빌립처럼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이 확실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용서받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논쟁을 피하고 "와 보라"는 말만 하는 빌립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빌립을 따라 예수님 앞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나다나엘에게서 본받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의심을 하고, 그럴 리 없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앞으로 갔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고
모든 일에 '아멘 아멘'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럴 리 없어", "내가 알기로는"… 하며 고개를 저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다나엘처럼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말씀 듣는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이해하고 갖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갖는 것입니다.
믿음은 공부하고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 갖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처럼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흔들면서라도
예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7)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택함 받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자랑했지만
실생활은 형식과 가식이 가득찬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신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뜻은
가식이 없고 속과 겉이 다른 간사함이 없는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진실되게 사는 사람임을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칭찬이
[그 사람 참 진실한 사람이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쁘다, 멋있다, 잘한다, 똑똑하다… 그런 칭찬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마다 달라질 수 있는 칭찬입니다.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 서울의 모 여대 앞에 갔다가
"왜 한국 여대생들은 화장을 짙게 했느냐. 모두 창녀 같다"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화장을 진하게 한다고 합니다.
예쁘다는 것은 자기가 보기에, 그 상황에 예쁘다는 것이지
모두가 예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귀를 뚫어 길게 늘어뜨려 삽니다.
어떤 부족은 입술에 고리를 끼워서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 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기에도 예쁩니까?
문화와 때와 장소에 따라서 '예쁘다, 멋있다, 잘한다, 똑똑하다…'는 것은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마다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 참 진실한 사람이다, 가식이 없고 간사함이 없다'는 칭찬은
변함이 없는 귀한 칭찬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거짓없다, 가식없다, 진짜다, 진실하다'는
칭찬을 듣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글입니다.
  병원에서 시어머니를 간병하는 한 며느리가
어느 날 시어머니의 소변을 받아
검사실에 갖고 가다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의 병은 소변으로 치료를 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핀잔을 듣기 싫은 며느리는 자기 소변을 받아서 갖다 주었습니다.
얼마후 의사가 시어머니에게 오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시어머니는 병이 나았다는 말로 알아듣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임신하였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는 기절하였습니다. 며느리의 거짓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국민일보 2003. 8. 21. 참조] 

 
거짓말은 다 탄로나게 되어 있습니다.
숨김 없는 거짓없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르기 전에.... 보았노라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나다나엘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How do you know me?" - NIV
  "From where do you know me?" - The Simple English Bible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1:48) 하셨습니다.
 
그 지역은 사막지대입니다.
나무도 많지 않고 쉴만한 그늘도 없는 태양 빛이 뜨겁게 내려 쬐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는 높이가 5m정도 자라고
긴 가지와 넓은 잎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그늘을 만드는데
큰 나무는 4m정도의 우산을 편 것 같은 그늘을 만든답니다(지름 8m).
그래서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더위를 피하기도 하고
명상하는 사람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루 세 번 기도(9시, 12시, 오후 3시) 하는 사람들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기도하는 모습/말씀을 묵상하는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나다나엘처럼 지금 예수님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주로 어디에 계셨습니까?
  '네가 휴가지 텐트에서 취해 자는 것을 보았노라'
  '네가 지난 명절에 고향 뒷방에서 고스톱하는 것을 보았노라'
  '네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는 것을 보았노라'
혹시 이런 말을 듣지는 않을런지요.
 
아니면  '네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노라'
        '네가 전도하는 모습을 보았노라'
        '네가 봉사하는 모습을 보았노라'
        '네가 섬 기 는 모습을 보았노라'
        '너의 효성을 보았노라'
        '너의 가정의 평안을 위해 애쓰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았노라'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을까요?
어떤 모습을 보이며 사시려는지요?
사실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예수님의 소리에
깜짝 놀란 나다나엘이 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나다나엘이 처음 빌립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았을 때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태도였으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구세주이심을 믿게 되자 즉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복종의 자세를 뜻하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한 것은
      왕에 대한 신하의 복종과 같은 헌신을 다짐하는 표현입니다.
 
조금 전까지 자기 지식과 경험을 내세우며 건방을 떨던 사람이
"나사렛, 그 동네에서…" 하며 예수님을 무시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섬겨야 할 임금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요1:50)
'네가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인정받았다고 해서…
고작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모습을 내가 안다고 해서…
나를 믿는단 말이냐?' 하는 뜻입니다.
[보아주고,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 때문이냐?
너를 알고 있는 내 능력 때문이냐?
조건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하느냐?]하는 약간의 책망이 담긴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섬기고 봉사하지만
누가 보아주고,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알아 주시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는다고 고민하고 실망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의 믿음과 섬김, 봉사는
'누가 보는가?, 알아주는가?, 인정해 주는가?'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변함이 없는, 진실함으로 따르게 될 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1:50) 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You shall see greater things than that." - NIV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51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51)
아마도 이 말씀은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에 관한 말씀을 언급하는 것이거나
요한복음 2장~13장에 걸쳐 행하시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Edwin A. Blum의 요한복음 주석 참조, '도서출판 두란노'에서 번역 출간하였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빌립처럼 세상에 나가 예수님을 소개하며
예배의 자리, 교회에 "와 보라"고 청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으면 누구든지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고,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나다나엘처럼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교회에서 칭찬 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누가 보기 때문에, 인정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함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울타리안에 묶여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야 될 세상이 이 세상으로  끝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제한된 세상에 얽매어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껏 날개를 펴고 마음껏 살아야 될 세상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애그리(James Aggrey)라는 사람이
사냥꾼에게 사로잡힌 독수리 새끼를 사서 닭장에 넣어 키웠습니다.
그런데 몸집이 커져도 날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붕 위에 올려놓아 보았습니다. 역시 날 생각을 안했습니다.
조류연구가에게 전화 문의를 하였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벼랑 끝에 놓아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임스 에그리는 독수리를 높은 산 위 절벽에 올려 놓았습니다.
바위에 앉은 독수리는 눈 아래에 펼쳐진 넓은 세상을 여러 번 둘러보더니
무슨 결심이나 한 듯 그 큰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성공은, 독수리가 날 수 있는 곳은 닭장 속이 아닙니다.
높은 벼랑 위에서만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독수리가 독수리가 될 수 있는 위치는 닭장이 아니라 높은 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닭장과 같이 답답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가 날아야 할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높은 벼랑 위에, 위험한 곳에 처해 있습니까?
이제 날 때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런 험한 자리에서 날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함으로 성실히 최선을 다할 때 우리에게 마음껏 날 때가 올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저런 부끄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입을 열 때마다 부끄러운 말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기 때문에, 이 기둥교회가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 잘 하며 성실히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비난의 말을 하던 사람이
칭찬의 말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지만 나다나엘 처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는,
예수님께 진실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닭장에 갇혀 있는 독수리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슬아슬한 절벽 같은 상황에서 탄식하고 한숨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 어떤 형편에 있든지 부끄럽지 않은 진실함을 갖게하여 주시옵소서.
위험한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드디어 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하여 주시옵소서.
진실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이 바라봄으로, 인정해 줌으로 진실하고 믿음을 갖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범사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