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해방, 자유, 평화“- (갈 5:1, 13-15)

  • 잡초 잡초
  • 277
  • 0

첨부 1



본문 : 갈라디아서 5:1, 13-15
제목 : "해방, 자유, 평화“

1. 8.15 57주년
바로 3일 전이 8월 15일로 8.15 해방 혹은 조국 광복 57주년 기념일이었지요. 우리 교계에서는 국가의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6월 25일이 화요일이어서 우리는 그전 6월 23일을 6.25 동란 기념 주일로 간주하고 금식 기도 등의 기념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 관례대로 하면 지난 주일이 해방 기념 주일이 되겠지만, 저는 기도원에 가 있을 때이므로 사흘이 지난 오늘 8․15에 대한 기념 설교를 하려고 미리 설교 제목과 본문을 주고 인쇄 담당자인 하명숙 전도사님께 드리고 기도원에 입산했다가 며칠 전에 하산하였습니다.
1945년에 출생한 사람을 해방동이라 합니다만 이북에 있는 제 아들 신근(信根)이가 행방동인데 벌써 60이 가까워 옵니다. 57년 전이라고 하지만 두, 세살 난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 여러분들 중에서도 60세 이하 되는 분들은, 우리 민족이 8․15 이전 일본 나라의 식민지로 얼마나 억압과 고통을 당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1910년에 소위 한일합방으로 우리 나라 조선은 국권을 잃고 일본제국의 일부분이 되고 말았으므로 36 년간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다고 보통 말하지만 만 35 년간이며, 사실은 1905년 을사 보호조약 때부터 완전히 국권을 빼앗겼으므로 해방된 "45년 까지 만 40 년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 당시 저는 28세였으므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계산해도 만 20 년간의 젊은 청소년기를 일본 통치 밑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 경험한 사실을 간증 삼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2.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19세기 말엽에 있었던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이 쇠약해지고 반면에, 일본의 관심과 접근이 한국에 더욱 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20세기 초에 이르러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또 승리를 거두게 되자, 조선(당시 한국의 국호)은 완전히 일본의 세력권내에 들어가게 되어 1910년에는 드디어 한일합방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을 자기들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안하무인격으로 마음대로 무자비하고 악랄한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1) 경제적으로는 동양 척식회사를 통한 농토의 착취로 인하여 농토를 잃고 살 길이 없어 남부 여대하여 중국 만주 서.북간도로 또는 시베리아로 이민간 사람이 허다하고,
2) 문화적으로는 조선말을 못쓰게 하고 일본말 일색으로 통일하여, 초등학교 1학년 아동들을 가르치는 데도 조선말을 일체 금하고 일본말로만 가르치도록 하므로 애로가 많았습니다.
3) 정신적으로는 일본 고유의 국민정신으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곳곳마다 신사를 만들고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까미, 천조 대신(天照大神)의 위패를 모시어 거기에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거이었습니다.
4) 종교적으로는 자연히 여기에 충돌할 수 밖에 없어 1935년 가을에 평안남도 도지사가 도내에 있는 유력한 교육자 초청 좌담회를 개최하면서 신사 참배를 제의했을 때, 평양 숭실 전문학교 교장 윤 산온(尹山溫, Dr. George S. McCune)와 숭의 여자 고등학교 스눅 교장(Miss V. L. Snook)이 기독교 신앙에 배치되는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두 교장은 교육자 자격을 박탈 당하고 말았으며 그 이후 기독교에 대한 박해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5) 민족적으로 마침내 창씨 개명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창씨는 성씨를 일본식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고 개명은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것이지요. 조선에 제일 많은 김씨는 金山(가네야마)나 全本(가네모도)로, 나 같은 고가는 高山(다까야마)로 고치는 등으로 무조건 일본식 성씨로 고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다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명도 일본식으로 바뀌고 말도 일본어만 사용하며 신앙 사상과 정신 문화도 완전히 일본식으로 무장하고 조선인이라는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는 악랄한 제국주의 식민지 통치를 강행했던 것이며, 조선의 서울, 평양, 대구 등 도시에는 점점 많은 일본 본토인들이 정착하여 정치, 경제, 사회의 실권을 차지하고 교육, 문화 활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3. 대동아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1) 전쟁 초기 일본의 승리. 이것으로 유위부족(猶爲不足)하여 일본은 동남아를 자기 손에 넣겠다고 마침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여기에 방해 요소가 되는 미국을 향하여 선전 포고도 없이 1941년 12월 8일(주일) 미해군기지 진주만을 폭격함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을 유발하고야 말았습니다. 싸움 초기에는 일본이 승승장구(乘勝長區) 크게 승리하여 만주, 중국, 홍콩, 싱가폴, 마닐라, 자카르타 등 동남아 제국을 거의 석권하였지요.
2) 세계 연합군에 의한 일본의 몰락. 그러나 오래지 않아 연합군이 전열을 정비 강화하여 일본군을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일본이 밀리기 시작하여 1943년에 와서는 일본의 패전이 보이게 되었을 때,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국의 장 개식 총통 3 거두가, 카이로에 모여 전후 처리에 관한 회의를 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카이로 회담입니다.
3) 카이로 회담과 얄타 협정. 카이로 회담의 중요한 결정은 “일본이 패전하면 한국과 대만을 포함하는 해외 식민지를 모두 돌려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 기록한 3 열강은 한국민족의 노예 상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멀지 않아 한국은 자연히 해방되어 독립할 것을 결정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놀랍고도 감사한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첫 번째 공식 결정은 ‘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하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과는 정반대로 열강들이 범한 하나의 큰 실수는 ‘45년 2월 얄타에서 결정한 비밀협정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 대통령과 영국 수상 그리고 최근 연합군에 가담한 소련의 스탈린 3 거두가 모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종전 즉시 한반도 절반에는 러시아군, 다른 절반에는 미군이 진주한다”. 이런 결정을 내린 처음의 의도는 항복한 일본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빨리 한반도에서 철수토록 하는 임무를 미․러 양 군으로 하여금 수행케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러시아군은 계속 북한에 남아 있어 그 지역을 공산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함으로써 3․8선이 조국의 남북 분열을 영구화하는 경계선이 된 것입니다.

4. 해방과 자유
1) 해방의 기쁨. 1945년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카이로 선언의 결정대로 한국은 자연히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독립국가가 된 것입니다. 거리 거리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 애국가가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우리 일반 한국인들은 이렇게 해방이 될 줄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찾아온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여 일단 어리둥절 하기도 하면서, 그 벅찬 해방의 기쁨과 감격으로 눈에는 이슬이 맺혔고 목이 터지도록 애국가를 부르고 또 부르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카이로 선언이 지적한 대로 “한국 민족의 노예 상태” - 한국 민족은 40 년간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쇠사슬에 얽매어 온갖 자유를 잃고 그들에게 온전히 굴복하여 종노릇하던 노예 상태에서, 조롱 속에 갇혀 있던 새가 풀려나듯 풀려나 놓임을 얻었으니 그야 말로 문자 그대로 풀 해(解), 놓을 방(放) - 길이 잊지 못할 해방(解放)의 기쁨, 무엇이라 도저히 필설로 형언할 수 없었던 당시의 감격을 회고해 봅니다.
2) 자유의 가치.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 해방되는 순간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므로 해방은 곧 자유를 가져 왔던 것이니, 한국은 자연히 해방되어 독립할 것이라는 카이로 선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독립 국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주권 국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처럼 귀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과거 한 때 이런 구호와 표어가 높이 울려 퍼지던 것이 기억 납니다. “인생아 자유 있느냐? 있거든 살지며 없거든 죽어라!” 옳습니다. 자유는 곧 생명, 자유 없는 삶은 곧 죽음이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주로 ①정치적 자유를 논하였습니다만 그 밖에도 몇 가지 중요한 자유가 있습니다. ②경제적 자유의 가치도 대단히 큰 것입니다. 빚진 죄인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도 남에게 빚을 지면 부자유합니다. 빚을 준 채권자와 빚을 진 채무자는 그들의 수염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채권자의 수염은 오른 쪽으로 굽으러지고, 채무자의 수염은 앞으로 굽으러진답니다.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면 돈 많은 채권자가 먼저 오른손으로 수염을 오른 쪽으로 길게 뽑아 쓰다듬으며 날카롭게 하는 말이 “에헴, 자네 내 돈 빨리 갚게나” 하면, 가난한 채무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 “예, 드리지요”.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부자의 수염은 오른 쪽으로 기울어지고, 가난한 사람의 수염은 앞으로 굽으러진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빚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엠에프(IMF)는 국제 융자 기금이란 뜻인데 경제적 위기를 당한 나라에 국제적으로 융통해 주는 빚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으로 개인이나 국가가 빚지지 않으므로 경제적 자유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③문화적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언어, 문학, 예술 등의 몰락으로 타국 문화에 예속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기 민족의 고유 문화를 보존 창달해 나가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귀한 자유는
④종교적 자유입니다. 종교 중에도 생명을 구원하는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를 잃지 않도록 그 자유를 사수해야 하겠습니다. 과거 일제시대와 해방 후 공산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기독교의 자유가 많이 침해를 당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열강의 세력으로나 금전의 힘으로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믿어집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뿐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에 얽매어 종노릇하던 비참한 상태가 에베소서 2:1 이하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 찾아서 교독합시다. 에베소서 2:1-5 교독으로 봉독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절 다 같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예, 세상 풍속을 좇아 마음대로 아시도 못하고 결혼 날자도 물어봐야 하며 악령에 붙잡혀 아무런 자유도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아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8절이 요절입니다. 엡2:8 다 같이 봉독합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5. 자유와 평화
1) 진리와 자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유대인들에게 하신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알아야 참된 자유를 소유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일찍이 로마의 법관 빌라도 총독이 예수께 물었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을 암송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예, 마지막 부분의 문장을 반대로 하면 “나로 말미암는 자마다 모두 다 아버지께로 올 수 있으리라” 로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진리입니다. 아무리 철학을 연구하고 학문을 많이 알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 그가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믿음의 올바른 길을 걸어 생명을 구원하시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 - 이것이 곧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 되신 예수 앞에 나온 것을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리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2) 결과로 얻는 평화.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므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해방과 자유는 밀접히 연결되는 술어라 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방과 자유의 결과는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제목인 해방․자유․평화는 3박자 술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469장 3절). 죄와 사망의 종된 자리에서 무슨 기쁨과 평화가 있으리요. 진리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죄 사함을 받아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고 죄악에 얽매인 노예상태에서 자유를 얻으니, 그 심령에 평화가 넘쳐나고 기쁨이 솟아오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논리상 당연한 귀결이지만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신앙인들의 체험인 것입니다.
3) 宮崎(미야자끼) 先生의 평화관. 나는 지난 5월 15일 인천 국제 공항에서 평양 사범학교 은사(恩師) 미야자끼 노부오(宮崎信雄) 선생님을 66 년만에 만났습니다. 1937년 3월 평사를 졸업 후 은사들이 다 별세하고, 유일의 생존자이신 92세로 완전히 백발이 되신 스승을 일본인 제자들 일행과 함께 공항에서 뵙고 감격할 정도로 반가웠으나, 북한 평양으로(북경 경유) 떠나는 시간이 되어 점심 대접도 못하고 작별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후 편지 연락을 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이번 한국에 가서 보니 서울의 거리는 활기가 넘쳐나고 세계적 대도시의 풍격(風格)을 갖추고 있음에 경탄의 소리를 발할 정도였지요. 서울 집회에 출석한 분들의(동창생들) 성공한 모습, 서울의 번영, 모두가 평화와 자유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평화와 자유의 존귀함을 방금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この 平和と 自由とは 永久に 失いたくない まのですね.”(이 평화와 자유는 영원히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요).
이러한 그의 평화관에 너무나도 크게 감동된 나는 즉시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지요. “활기가 넘치는 서울 거리를 세계적 대도시의 반열로 추껴세우고, 서울의 번영을 평화와 자유의 선물이라 생각하시며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평화와 자유의 존귀성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계시는 선생님이야말로, 진정 국수주의도 국경도 초월한 세계 또는 우주적 평화의 진리를 추구하시는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가고 나는 새삼스럽게 선생님을 더욱 존경해 마지 않는 바이올시다”.
일본을 포함한 동양,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바와 도요히꼬(賀川豊彦)선생의 평화주의가 심중에 떠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카네이션(incarnation, 成肉身) 하여 탄생하신 목적도, 지상에 평화를 이룩하기 위함이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하면서, 다음의 성구를 일본어로 써 보내 드렸습니다.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될까 하고 - “いと 高き ところでは, 神に 榮光が ある ように, 地の 上では, み心に かなう 人 人に 平和が ある ように.”(るかに よる 福音書 2:14)자유와 평화를 이처럼 기독교에 비교적 냉담한 일본인, 그 중에서도 가장 인격과 학문적으로 고위층에 속한 지성인에게도 큰 감동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은사와의 통신 거래에서 크게 감지할 수 있었음을 간증삼아 말씀 드리면서, 이런 해방.자유.평화와 같은 일반 불신자들까지도 공감할 수 있는 명제를 통하여 지식층 인사들에게 접근하며 전도하는 방법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라고 해서 그 내용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종교라고 해서 그 개념이 다 같지 않은 것처럼 - “종교인 평화회의”란 단체가 부산에도 있고 서울과 각 지역에, 그리고 전국적, 국제적으로 조직되어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 등 각 종교의 개별적 교리를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종교 가치의 공통분모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차원의 우주적 평화의 가치는 오직 기독교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세상에 계시던 마지막날 밤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 귀한 말씀의 뜻을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평안”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전도 초기 갈릴리 지방에서 온 종일 무리들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신 어느 날 저녁 저물 때,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행선해 가실 때 큰 광풍이 돌발하여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가득차게 되어 침몰 직전의 위기에 봉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단 잠을 주무시고 계셨지요. 이것이 주님이 누리셨던 평화입니다. 죽겠다고 야단치는 제자들의 아우성 소리에 깨어 일어나사 하시는 말씀, “바람아 잠잠하라. 물결아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다고 마가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 생생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이런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곧 여러분과 저입니다. 무슨 걱정 근심이 있단 말입니까? 주님 하신 말씀 순종하여 우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맙시다.

6. 결론
8.15 해방 57 주년을 기념하면서 “해방.자유.평화”의 3 박자 술어를 제목으로 이상 고찰해 보았습니다.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 기반(羈絆)에 얽매어 그 악랄한 속박과 압제로 신음하던 40 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평화를 향유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 합니까? 그보다 더 영적으로 우심한 죄의 종된 자리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 감사를 무엇으로 보답하오리까? 오늘의 본문 갈 5:1 다 같이 봉독합시다. 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자유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믿음 굳게 지키며, 해방과 자유로 말미암는 참된 평화를 누리며 금세와 내생에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