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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하셨습니까?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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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하셨습니까?
(시편 23편1-6절)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만들어진 풍자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련 모스크바에 살고있던 개 한 마리가 불란서 파리까지 왔습니다. 파리 시내에서 불란서 개를 한 마리 만났는데 서로 인사를 한 후에, 불란서 개가 소련에서 온 개한테 "소련 실정이 어떠냐? 소련에서는 생활이 어떠냐?" 이렇게 물었더니 소련 개가 아주 침을 흘리면서 자기 나라 소련 자랑을 시작합니다. "소련은 사람뿐만 아니라 개에게도 완벽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다. 살 곳, 입을 것, 먹을 것,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간다" 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란서 개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이 불란서 파리까지 왔느냐?" 그러니까 "그건 꼭 한가지 이유 때문에 왔는데 좀 실컷 짖고싶어서 왔다" 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주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다! 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열 여섯 살 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서 140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 결합하여 스스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했더니 침팬지가 제일 먼저 표현한 의사가 "나를 좀 놓아 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나에게 자유를 달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자유를 원하고 갈망합니다. 모든 생물, 모든 동물, 모든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물질로부터 자유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합니다" "환경으로부터 자유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자유할 수 있는 까닭이 있는데 그것은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명과 죽음까지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기본적인 차이

동물과 인간의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동물은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고 인간은 선택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선택하며 산다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자유를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오히려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 가운데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간을 참 인간 되게 하고 최고의 가치와 행복을 갖게 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많고 위치가 높다 할지라도 그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고귀한 영성을 닮은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로웠고,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웠으며, 자연 만물에 메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에덴 동산은 인간이 자유하며 살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자유를 잃었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에게 결박을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관계가 끝났습니다. 부부간에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제 인간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데 이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상실한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말과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풀어준다",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묶인 모든 결박들로부터 자유를 누리도록 풀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결박으로부터 풀려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성으로 하나님과 자유로운 관계, 천지만물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최고의 행복이며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자유로운 존재는 창조의 형상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자유인의 찬양, 자유인의 행복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축제요, 예배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행복을 얻는다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행복을 얻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돈을 벌어도 돈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권세를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을 얻든지 그것을 얻고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고, 그것에 매이면 복이 되지 못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했습니다. "쉰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쉬지 못합니다. 근심은 우리 마음을 결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쉼과 평화를 얻을 때 자유인이 됩니다.

본문에 다윗의 고백은 분명히 자유인의 고백입니다.

시편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고린도전서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죄와 두려움에 대한 문제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인간에게 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서 온 인류를 죄의 사슬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하는 사람조차 스스로 거짓의 죄를 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접근해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라고 했습니다. 그 두려움과 공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찾아옵니다. 세상에 살다가 갑자기 만난 불치의 병으로 말미암아서 손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가는 비참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장래에 대한 상상은 결코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자유인은 이 세상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유했던 사람입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사야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죽음에 대한 문제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역시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동서고금,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류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이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아무도 죽음의 문제만큼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

20세기의 가장 존경받았고 유명했던 실존주의 철학자였고 작가였던 "사르트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제목과 함께 수많은 수필과 감동적인 글들을 무수히 남겼습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듯이.. 이무튼 사르트르는 사르트르라는 유명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아마 사르트르처럼 현대인에게 글로써 감동과 도전을 주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우상처럼 20세기를 긋는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훌륭한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쉐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이라는 병명으로 입원합니다. 그는 그가 남긴 고상한 글들이 무색케 할 정도로 한달 동안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발악하며 몸부림쳤습니다. 나중에 그는 체면도 내 던져 버리고 찾아오는 지성인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며 절규합니다. 그는 무서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옆에 있는 아내에게 차마 자기의 병명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소리치며 발악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 앞에서 죽음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불쌍한 여인과 사르트르! 이것이 저들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1980년 4월 16일, 사르트르는 입원한지 한달 만에 병원에서 죽어갔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간 후 프랑스신문들은 대서특필했습니다. 죽음에서 자유하자고 그렇게 외쳤던 사르트르의 종말은 왜? 그렇게 비참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사르트르가 그렇게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미사어구를 사용하여 좋은 글들을 남겼으나 결코 그에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절규하며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자유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요한복음14:1-3절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자유하셨습니까?

죽음에서 진정 자유했던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나"라는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 존재가 무엇입니까? 아담은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아담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흙덩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기 때문에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못을 박아 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흙에서 나고 흙을 먹고살다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아담"은 형용사로 쓸 때에는 "붉다"가 되지만, 아담을 명사로 사용할 때는 "에돔"이 됩니다. "에돔"은 "흙"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흙덩이 입니다. 걸어가는 사람은 흙덩이가 걸어다니는 것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3:19)

요즘에는 흙과 가까이 있어야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예로 18층의 아파트에 개를 키웠는데 3년이 지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개가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고층에서 사는 사람은 수명이 짧아진다는 이론입니다. 이무튼 생각해 볼만한 주장입니다. 성경에 사람은 흙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흙덩이인 육체를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흙으로 육체의 주인인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 주인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죽음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자기의 현주소를 찾아야...

하나님 믿고 예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교회에 나와야 행복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면서부터 행복해지기는커녕 불행해졌습니다.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불행해 집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놀듯이 성도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품에 안기는 행복

아내도 남편의 품에 안길 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가슴을 떠나서는 어떤 가슴에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불안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남자의 손가락뼈 하나를 빼서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쥐어야 행복할 것입니다. 만약에 남자의 머리뼈를 한 조각 빼서 여자를 만들었다면 남자의 머리에 여자를 이고 다녀야 여자는 행복할 것입니다. 만약에 남자의 발가락뼈 하나를 빼서 여자를 창조했다면 여자는 남자의 발에 밟혀야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했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안길 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이 인간의 현주소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품이 나의 현주소입니다. 우리가 참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나의 현주소를 찾아야 합니다. 여행하는 것이 아무리 즐거워도 자기 집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고생입니다. 남의 집에 가면 자기 집처럼 편하지가 않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음식, 좋은 침대, 좋은 환경이라 해도 자기 집만큼 편하지 않습니다. 내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참 자유함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진정한 자유인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돈이 많아진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권세를 얻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 좋은 집에서 산다고 행복하거나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을 많이 얻었다고,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고 행복하거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참 자유인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 먼저, 흙으로 지은바된 나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흙덩이인 육체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의 영혼을 위하여 살 때 비로써 참 자유인의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공중에 나는 나비처럼 자유하기 위하여, 나의 현 주소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날고 뛰어도 스스로 행복하거나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부터 자유인의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떠나 궤도를 벗어났습니다. 인간은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매이고, 죄악에 매이고, 정욕에 매여서 제정신을 가지고 살수가 없게 됩니다.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새를 만드셨고 새에게 날개를 달아주신 것은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들이 날개를 펼쳐 움직이는 순간 창공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걸어다니라고 날개를 붙여준 것이 아니고, 뛰어 다니라고 날개를 붙여준 것도 아닙니다.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붙여준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기어다니는 것들은 대부분 미생물들이고 걷는 것은 두 발 달린 동물이고 뛰는 것은 네 발 달린 동물이고 멀리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은 날개 달린 동물입니다. 걷고 뛰는 것은 강이 있으면 건너지 못합니다. 산이 있으면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새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자유롭게 다닙니다. 날개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 가운데 내적인 자유와 외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외적인 자유는 투쟁으로 얻습니다. 육체적인 자유, 정신적인 자유는 투쟁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자유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얻습니다. 자기와 싸워서 이기는 자는 영적인 자유를 누립니다. 영적인 자유만이 참 자유입니다.

사랑으로 얻는 자유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예수의 사랑으로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미워하고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입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미운 사람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미운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나도 미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미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손해보고 미워하면 이중 패배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아도 사랑하고, 욕을 먹어도 사랑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 비로소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자유가 있고 미워하면 죄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나라 소망을 가진 자는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자유케 하는 성령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은 자유케 하는 영입니다. .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싸움에서 이긴 자나 패배한 자나 모두 자유가 없습니다. 이긴 자나 진 자나 자유가 없는 것은 자유하는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긴 자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이기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성령의 자유입니다.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면 소극적인 자유가 있고, 적극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자유는 어떤 간섭이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 벗어나는 자유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자유인데 무엇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자유를 버리는 자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만 가지고는 자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선한 일에, 의로운 일에, 사랑에 노예가 될 때 자유할 수 있어요. 미워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 자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용서하고 사랑할 때만,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역설!

영국의 교육 철학자인 알 에스 피터스(R.S.Peters)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역설! 작은 자유를 버릴 때에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유의 역설이 있습니다. 내 정욕, 시기, 교만, 이 우스꽝스러운 자존심, 이 끝없는 욕심, 깨끗이 버리고 주님을 영접할 때만 비로소 참 자유, 큰 자유,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십자가의 진리를 알고 비로소 그 지불된 값을 할 때,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로 발견됩니다. 나는 진리의 노예가 되고 진리는 나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영원한 노예로, 영원한 사랑의 노예가 될 때 비로소 자유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인만이 건강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행복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창작적, 창의적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손에 무엇이 있던 없던 그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향하여 뭐라고 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자유할 때만이 영원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빛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예수님,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나를 사랑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높임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롭게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보다 더 낳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관심가운데 있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낮아짐의 두려움으로부터
멸시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고통스러운 책망의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짐의 두려움으로부터
실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조소의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마더 테레사-

이 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욕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우리들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래적인 본능을 부인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나 자신이 그러한 본능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본능적인 욕구와 공포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삶의 표상은 왜곡되고, 우리는 자유와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자유 하는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많은 우상들을 섬기며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입니다. 자유의 목표가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에 이르는 자유입니다. 또한 온갖 자기 경직으로부터, 자신과 욕망의 모든 굴레로부터 풀려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의 목표는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내면의 자유에 기인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 될 때 우리는 또 다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참 자유해 가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자유의 삶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유혹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을 거짓과 허구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진정한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예, 인기, 칭찬, 돈, 성공에 예속되어 있을 때 참으로 자유 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자유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의미도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자유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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