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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활의 거울 / 갈 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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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거울
갈 6: 6-10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1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생활의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거울을 봅니다. 거울에는 가감 없이 내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젊었으면 젊은 모습대로, 늙었으면 늙은 모습대로 주름살이나 백발이 나타납니다. 윤기가 흐르고 건강하면 건강한 모습으로, 병들었으면 안색이 좋지 않은 병든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한 대로, 슬픔이 가득하면 슬픔이 가득한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가 좋게 보이려고 꾸며 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꾸밀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울에는 항상 보편적으로 내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 있어서 내 믿음을 보고 싶으면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생활이라는 거울을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을 보고 싶으면 여러분들이 생활이라는 거울을 보면 되는데 생활 속에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가감 없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꾸며 보았자 한두 번이라는 말입니다. 항상 꾸미고 항상 위선과 가장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따라 최소한 믿는 사람의 생활 속에 공통적으로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교제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6-)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만남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만남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교제입니다. 가장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게 되고 어머니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와의 교제를 통해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아버지, 형제들을 알아보면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아이가 가정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뛰어 다닐 정도가 되면 골목으로 나갑니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의 집에 가 보면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있다, 우리 집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라는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느끼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교제를 통해서 배우며 느끼며 무엇인가를 얻으면서 인격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에게 이런 교제의 과정이 빠지게 되면 사람의 모습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한 아이의 소식을 접했을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를 침팬지가 깊은 산골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그 아이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사람들과 사귀지 못하고 침팬지들 속에서 살다보니 걷는 것도 침팬지처럼 손을 앞으로 하고 짚어 가면서 두 손과 두 발로 걸었습니다. 잠도 침팬지처럼 자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로 하여금 사람들처럼 두 다리로 걷게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아이는 결국 말은 끝내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10년 이상 인간 사회 속에 들어와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두뇌에서 말을 주장하는 기능이 일정한 나이까지 개발이 되지 않으면 그 기능이 정지되어 말을 못하고 배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끝내 말을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람이면서도 사람과의 교제를 끊고 사람이 아닌 침팬지와 어울려 살다 보니 사람의 모습은 지녔으나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人間이란 사람 人자에 사이 間자입니다.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교제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성도의 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잘 났다고 해서 믿음이 혼자서 큽니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와의 사귐을 통해서 보는 것이 많고, 듣는 것이 많고, 배우는 것이 많고, 얻는 것을 많이 얻으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과정이 빠지면 침팬지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원시 기독교 즉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교제의 모습에 대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자칫 잘못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 같이 행동하며 성도의 교제로 착각 내지는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공부를 하면서 교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놓고 너와 나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떡을 떼며'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성경공부를 하거나 예배를 드린 후에는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그것을 '떡을 떼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를 가운데 모시고 너와 나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컨대는 '나의 기도의 제목은 이것이다. 너의 기도의 제목은 무엇이냐?'라고 하면서 서로의 기도 제목을 바꾸어 가면서 너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령한 교제요, 깊은 교제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교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예수, 기도를 빼 놓고 다방에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서 앞 집 여자에 대해서 흉보고, 뒷집 욕을 합니다. 그렇게 대리만족을 얻고 나서 헤어지면서 '오늘 참 좋은 시간 가졌다'라고 합니다. 그것이 좋은 시간입니까? 거기에서 얻어 질 것이 무엇입니까? 기거에서 믿음에 도움이 되고 플러스가 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믿음에 손해를 보는 것은 성도의 교제가 아닙니다. 만났다 하면 믿음에 도움이 되는 성도의 교제하는 모습이 생활이라는 거울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무대로 등장하는 교회는 갈라디아 지방 여러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하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빌립보에 있는 빌립보 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이야기하지만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의 넓고 큰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를 향하여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2절을 보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믿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면 복음을 떠 먹이듯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의 교회가 이루어지면 바울은 떠났습니다. 그 교회를 맡아서 목회하는 목회자는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떠나게 되면 때로는 바울과 함께 전도하던 사람이 남아서 그 교회를 돌보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순회 전도자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각 지방을 다니면서 이미 세워진 교회에서 교인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교회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각 지방 교회들을 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다 보니 자기 직업이 없었습니다. 먹고 살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본문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을 쉽게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너희가 순회 전도자들에게서 말씀을 배웠으면 죽이든 밥이든 너희들이 식사할 때 청해서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종들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하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 근본 취지는 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좋은 것을 주의 종들과 함께 하는 것은 성경공부입니다. 성경공부 하자고 하면 그러자 하고 다 같이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하는 것이 바로 좋은 것 중에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무개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자'하여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좋은 것 중에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자, 봉사하자'라는 이 모든 것을 주의 종들과 함께 하는 깊은 성도의 교제가 우리들의 삶 속에, 우리의 생활 속에 그 모습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짚고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얻고, 느끼고 믿음이 풍성해 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진실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7-8)

  사랑이 좋은 겁니까? 좋지 않은 겁니까? 좋은 겁니다. 자다 말고도 사랑이라고 하면 눈을 지긋이 감고 싱글싱글 웃는 것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리라 하고는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가장 좋은 은사, 큰 은사를 보여 주리라 하고는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좋은 것이로되 그 사랑에서 진실이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진실이 빠진 사랑은 형식 즉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진실이 빠진 사랑도 사랑입니까? 그런 사랑은 거짓이요, 그런 사랑을 어디에 써먹을 것입니까?
  진실이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 것처럼 우리 믿음에 진실이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믿음입니까? 그런 믿음은 쓰레기로 버려봐야 청소부 아저씨들이 써먹을 곳이 없어서 가져가지를 않습니다. 사랑도 진실이 나타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믿음에도 진실이 생활이라는 거울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은 믿음의 별명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에서 8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입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농사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반드시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보셨습니까? 서울에서 태어났기에 콩이 달리는 콩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왜 아는 것처럼 그러십니까? 아마 많이 들어서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농사를 지어 보았습니다. 농사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지 팥을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농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땅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이 사실을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땀을 많이 흘리면 많이 거두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니라 할 사람 역시 없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그게 아니던데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땀을 많이 흘리고 노력을 해도 적게 거둘 때가 있던데요"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문제요, 보편적이거나 정상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진실 그대로입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 생활이 농사를 짓는 것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교회에 등록은 했지만 1년 365일 교회를 가게 되면 가고 말게 되면 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이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일년 후에 거둘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돈 몇 푼 더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돈 몇 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함께 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이 주일날입니다. 성령이 우리들 마음속에 뭐라고 감동을 합니까?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라고 감동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체는 성령을 소멸시킬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감화를 소멸시킨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일이니까 만사를 제쳐놓고 나가 예배해야지 무슨 소리냐? 할 때에 성령을 소멸하는 자는 속으로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하면서 승용차를 몰고서 설악산에 갑니다.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를 감화시켰던 성령이 '이러는 것이 아닌데'라고 하면서 얼마나 근심하시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거둘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멸망 밖에 없어 죽음과 함께 썩어질 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감동하는 대로 따라 사는 사람, 믿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은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농사의 원리와 똑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별명 자체가 진실이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을 믿다'라고 하게 되면 히브리 사람들은 '아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진실하다고 할 때 히브리인들은 역시 '아만'이라고 합니다. '믿다' '진실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만'이라는 말은 문맥과 경우에 따라서 번역을 하는 것입니다. 원문을 찾아 가보면 똑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진실하다' '믿다'는 말은 다른 낱말이 아니라 똑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진실은 하나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면 보나마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은 별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 속에는 즉 우리들의 믿음은 생활 속에 진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되고, 행동이 진실해야 되고, 인격이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선대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9-10)

  즉 선행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에서 10절을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9절에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10절에는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을 가정들에게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선한 일과 착한 일은 똑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선한 일과 착한 일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가정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라도 밥을 굶는 사람이 있으면 쌀 한 가마니라도 사다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일이 아닙니까? 이 일을 착한 일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요즘은 우리가 옷이 너무 많아서들 걱정이 아닙니까?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옷을 빨면 바꾸어 입을 옷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빨면 하루 종일 벌거벗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옷을 빨아서 불에 쬐어 말리고 다리미로 대려 주면 그 때 입고 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이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해도 너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9천$이 안됩니다. 일본은 3만 7천$입니다. 우리 보다 4배 이상이 됩니다. 그런데 주 5일 근무제를 말하면서 일본 보다 더 놀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몇 년 전부터 잘 살게 되었다고 그러는 것입니까? 많이 놀아야만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입니까?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 아닙니까?
  그렇게 우리가 옷 한 벌 바꾸어 입을 것이 없어서 남이 좋은 옷을 입으면 그렇게 부러울 때 누가 옷 한 벌을 해 준다고 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요, 착하고 선한 일이었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아무개가 굶어서 내가 쌀 한 가마니를 사주었다. 아무개가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이불 속에 있기에 내가 옷 한 벌을 사 주었다"라고 한다면 받은 사람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그렇게 밟아도 좋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그 사람에게 쌀 한 가마니를 사 주고 옷 한 벌을 사 주어도 좋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사람 대접을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받는 그 사람의 인격과 감정과 기분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사람 대접하는 것이 선한 일 중에 최고의 선한 일이요, 착한 일 중에 최고의 착한 일 인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깔보면 안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사람으로 대접할 줄 아는 모습이 생활의 거울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대접하는 것은 여러분 집안에서부터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말 한마디도 못하게 억눌러 놓고 인격을 무시하면서 밖에 나가서는 인권 운동가인양 행세한다면 그것이 될 일입니까?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 나가도 새는 법입니다. 집안에서부터 사람을 사람 대접하십시오. 또 직장에 나가서 사람을 사람 대접해야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 귀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는 이런 모습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이라는 거울에는 첫째 성도의 교제라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는 교제를 통해서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진실이라는 모습이 생활의 거울에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이 좋은 것이로되 진실이 빠지면 거짓인 것처럼 믿음에 진실이 빠지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은 가난하다고 차별하고 못 배웠다고 차별하면 안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이 선한 일 중의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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