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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부는 잘 해야 합니다 / 고후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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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잘 해야 합니다
고후 6:11-18

  오늘은 고린도후서 6장 11절에서 1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공부는 잘 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잘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공부를 잘 해서 나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요즘 공부하는 학생들이 너무 공부소리를 듣다 보니 짜증이 나서 그렇지 공부를 잘 해서 손해를 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는 잘 해야 된다'는 말의 뜻은 배우는 대로 실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년을 배우고 20년을 배웠는데도 실력은 하나도 없다라고 한다면 공부를 잘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대로 실력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면 실력도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생활 속에 적용을 해야만 합니다. 써먹지 못하는 공부, 써먹지 못하는 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죽은 공부가 아닙니까? 죽은 글이 아닙니까? 공부를 내가 열심히 하여 배우는 대로 실력이 되고 실력이 된 것을 활용하고 써먹는 것까지가 공부입니다. 써먹지 못한다면 공부를 잘 한 것이 아닙니다.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리면 공부를 잘 하기 전에 바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울 것은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배우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마약 혹은 도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피해를 줍니까? 요즘 그 마약이 기가 막히게 만들어져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도박이 얼마나 만연하고 있습니까? 그 마약을 만드는 법 혹은 도박을 하는 법을 배워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배우지 말고 배울 것은 반드시 배워서 배우는 대로 실력이 되고 실력이 되는대로 적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유익하고 사회에도 유익한 공부를 하는 것이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성경공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마음씨 공부 (11-13)
 
  한번은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더러는 돌이 많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더러는 가시가 우거진 가시 덜기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이 모든 곳에 떨어진 씨앗은 결단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를 했습니다. 그런데 옥토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고 꽃피워 열매를 맺어서 풍성하게 거두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씨는 복음의 씨, 말씀의 씨를 가리키고 씨가 떨어진 바닥은 사람의 마음바탕을 가리킵니다. 길바닥은 얼마나 다져지고 다져져서 굳고 굳어 졌습니까? 완고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완고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 사람들과 한 시간 두 시간 마주앉아 이야기를 해도 도무지 통하지가 않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씨가 뿌려져도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길바닥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돌이 많다 보니 흙이 얇아서 싹이 나기는 나지만 햇볕이 내리 쬐어서 싹이 말라 버렸습니다. 척박한 땅입니다. 두 번째 마음씨는 아주 천박한 마음씨를 가리킵니다. 어떻게 마음이 그렇게 얕은지 작은 일에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천박한 사람, 천박한 마음씨에는 복음이 들어가도 싹이 났다가 말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우거지고 우거져서 햇볕을 막아 버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가득하다 보니 복음이 들어가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부인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아파트에 얼마를 투자하면 얼마가 남는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찬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배 시간에 나와 앉아서 한 시간 말씀을 들어봐야 돈 버는 이야기 아니면 절대로 그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근심과 재리의 욕심이 가득한 마음 바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옥토는 곱고 부드러워서 다른 잡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합니다. 그 옥토에 씨앗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뿌리가 내리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씨도 바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씨는 곱고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복음을 잘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1절에서 13절을 보면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열린 마음이 있고 닫힌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데 고린도 교인의 일부가 바울을 향해서 마음을 굳게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음을 닫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쁨으로 모이고 또 모였습니까? 하나의 교회가 세워지고 가르칠 만큼 가르친 다음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려고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너희는 누구한테 복음을 전해 받았으냐?"라고 물었습니다.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 바울 사도를 좋아하지 마시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 거짓 사도요"라고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도라고 하는 것은 본래 예수의 부름을 받고 세움을 받은 열두제자를 말하는데 예수께 배울 때는 제자라 하고 예수께서 하늘 나라로 승천해 가시면서 너희들이 이제는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해라고 하면서 보냄을 받을 때는 사도라고 합니다. 언제 바울이 예수의 제자였습니까? 언제 예수께서 바울을 보내셨습니까? 그렇기 까닭에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라 가짜 사도입니다"라고 하면서 교인들의 믿음을 흩어 버렸습니다. 바울이 가짜 사도요, 혹은 사도가 아니라고 하게 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짜가 참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인들은 '그럴 듯 하다'라고 하면서 바울에게 속았다하여 바울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울이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내가 처음에 너희들을 향해서 마음을 넓힌 것처럼 또는 너희들이 처음에 마음을 넓히고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은 것처럼 다시 마음 문을 열어라. 너희들 마음이 왜 좁아졌느냐? 그것은 바로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닫히면 큰 변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로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말씀에 은혜가 되지 않고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이 닫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주의 종들 즉 설교자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선생에게 마음을 닫으면 그 선생이 가르치는 과목은 공부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너를 위해서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릴 때 자기의 속을 이야기하게 되므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닫고 있는데 누구에게 말을 하겠습니까? 마음을 열 때 교제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교제를 통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마음 문이 열렸을 때 말씀을 받아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린 마음,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통이 큰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고전 중에 흥부전이 있지 않습니까? 형은 놀부요, 동생은 흥부입니다. 형 놀부의 마음은 얼마나 욕심쟁이입니까? 남이 잘 되는 것은 절대로 봐 주지 못하는 심술쟁이입니다. 절대 남을 향해서 자기를 열지 않습니다. 내 것만 내 것이라고 하고 너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 흥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음이 열려진 사람입니다. 얼마나 착합니까? 형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통이 큰 사람이요, 마음이 넓은 사람이요, 마음이 열린 사람입니다. 나중에 누가 잘 됩니까? 이 작품은 옛날의 것으로 권선징악(선을 권하고 악에 대한 징벌이 있다)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쓴 작품이지만 오늘날에도 그 원리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통이 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무엇이 된다 해도 크게 되고, 믿어도 크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공부를 했으면 하나님을 향해서, 너를 향해서, 교회를 향해서 열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마음씨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울타리 공부 (14-16)

  이것을 다른 말로 이야기를 하면 선 긋기 공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두 번이나 채찍을 들고 청결케 하셨습니다. 한번은 나이 30이 되어 공생애에 나서서 처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유월절을 지킬 때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 때 청결하시면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자의 집으로 만드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3년째 되는 해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또 청결하시면서 "어찌하여 강도의 소굴을 만드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보았더니 성전 뜰 안에 소들이 들어와 있고 양들이 들어와 있고 비둘기를 팔고 있습니다. 전부 장사꾼들과 돈을 바꾸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고향이 1,000리가 되더라도 명절이 되면 반드시 예루살렘에 양이나 송아지를 제물로 바치면서 명절을 지켰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들도 빠짐없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양이나 송아지를 끌고 오겠습니까? 자기가 기른 소나 양들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몫을 지어 놓았던 것을 팔아서 돈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 돈으로 예루살렘 근방에서 양이나 송아지를 사서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사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부르는 것이 값이 되기 때문에 장사꾼들이 많은 이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한발 더 앞서가는 상인들은 제사장들과 결탁을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은 흠잡아서 받지 말고 성전 뜰 안에서 사는 송아지와 양을 반드시 제물로 받고 거기서 얻는 소득을 나누어 갖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제사장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돈을 가지고 온 순진한 백성들이 다른 곳에서 좋은 양을 사 가지고 올지라도 전부 퇴짜를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뜰 안에서 사오는 것만을 받으니 비루먹고 흠이 많은 양이나 소일지라도 부르는 것이 값이었습니다. 몇 배씩 폭리를 하고 있으니 주께서 보실 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너희가 처음에는 장사 속으로 시작을 하더니 이제는 눈을 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코를 베 가는 식으로 강도 짓을 하는 것 아니냐? 어떻게 하나님 성전에서 이렇게 강도 짓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채찍을 들어 전부 다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막에도 반드시 울타리가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지은 다음에도 반드시 담을 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유행이나 풍속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법이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 구별이 안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을 긋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아지나 양이 살아서 들어오게 되어 있지 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송아지나 양이 들어오려면 죽어서 제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데 죽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안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짓을 그대로 다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청결케 하신 것입니다. "왜 날 강도 짓을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또 "죽어서 들어와야 할 것이 왜 살아서 들어와 펄펄 뛰고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결국 그들을 내 쫓아내면서 울타리의 역할을 새롭게 하시고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성전에서 하는 일이요, 밖에서 하는 세속적인 풍습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풍속이나 방법이 교회로 들어오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세속화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선을 긋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에 비추어 말씀드리면 교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되는 일이 있고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강도 짓을 하는 것은 죽어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지 않아야만 되는 일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선을 정확하게 긋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6절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가 양쪽에서 멍에를 함께 메고 밭을 가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동업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동업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세속적인 방법으로 하겠다 하고 믿는 사람은 믿는 식대로 하겠다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업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둘 다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로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밸리알(마귀의 별명)이 조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밸리알이 조화되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조화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반드시 선을 긋고 살라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분명히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들 사이에서 울타리를 치고 선을 분명히 긋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에릭 리델이라고 하는 유명한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1924년도 올림픽 때의 일입니다. 결승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결승전에 나아가서 금메달만 받으면 된다 할 정도로 유망주입니다. 그런데 결승 하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내가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고 결승전에 나아가서 금메달을 받을 것이냐? 즉 달리기 결승을 하고 금메달을 받을 것이냐? 금메달을 포기하고 주일 예배를 드릴 것이냐? 라는 경우가 되었습니다. 에릭 리델 선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나의 원칙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금메달을 받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세계가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평생을 선교하다가 거기에서 죽어 지금도 무덤이 중국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에릭 리델은 원칙을 철저히 지킨 사나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을 분명히 긋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넘나들면 안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울타리 공부입니다. 그럴 듯 하다 라는 생각으로 끝내면 그것은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살 때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셋째, 정체성 공부 (17-1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아닙니까? 분명히 제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의 명단에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신임을 하고 돈궤를 맡겼습니다. 즉 회개를 맡겨 주셨습니다. 돈을 제 마음대로 쓰고 싶은 곳에 써버렸습니다. 횡령죄입니다. 사도요한은 가룟 유다가 도둑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제 마음대로 써 버립니까? 마음대로 썼다가 채워 넣으면 공금 유용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갚아 넣지 못하면 횡령죄가 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의 제자이면서도 도둑놈입니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도둑입니까? 예수의 제자입니까? 정체가 회색적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하였고 7절에는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항상 마귀가 시키는 대로 예수를 팔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예수를 팔려면 제사장들을 찾아가야 하므로 기회가 있으면 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는 안될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돈을 받고 예수를 팔아 넘겼습니다. 제자이면서도 절대로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살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자입니까? 도둑놈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마귀의 제자입니까? 우리는 항상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광성교회 장로라면, 집사라면 동네에서나 일터에 나가서 '나는 광성교회 장로요 혹은 집사'라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처신해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숨겨 놓고 갈 곳과 못 갈 곳을 드나든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정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18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는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70년 동안 하나님께서 연단을 시키는 동안에 믿음에서 떨어져 나갈 사람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다시 회복한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돌아가라 할 때에 전부 돌아갔습니다. 즉 믿음의 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가나안으로 돌아갔습니다.

  '너희들은 그 전에 망할 때 섬기던 우상을 절대 섬기지 말라 거룩성을 지키라 부정한 것은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내 아들 딸 즉 나의 자녀가 되게 하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은 할 수 있지만 저것은 죽어도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우리의 정체를 밝히라는 말입니다. 정체성 공부를 분명히 하고 바로 처신해야 합니다. 나의 정체는 이렇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살 때 정체성 공부를 잘 한 것이 됩니다.

  여러분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많으실 것입니다. 이태리 중부 프로랜스에 큰 병원이 하나 있는데 그 병원 원장이 지킬 박사입니다. 얼마나 칭찬을 많이 받는지 모릅니다. 돈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감해주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처럼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태리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아페나인이라고 하는 산맥이 있습니다. 아페나인 산맥에 큰 도둑 떼가 있었습니다. 그 도둑 떼의 두목이 하이드입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도둑 떼들이 전부 잡혔는데 두목도 잡혔습니다. 하이드라는 두목을 잡고 보니 프로랜스에서 유명한 병원 원장이더라는 것입니다. 원장 일 때는 지킬 박사라는 이름을 가졌고 도둑의 두목 노릇을 할 때는 하이드라는 이름을 가졌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입니까? 자선사업을 그렇게 많이 하는 천사 같은 병원장입니까? 도둑의 두목입니까? 낮에는 천사요, 밤에는 도둑의 두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손해를 보고 고통스러워도 정체를 분명히 밝히고 살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첫째 마음씨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넓은 마음, 열린 마음, 통이 큰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본문의 가르침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울타리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즉 선을 분명히 긋고 살아야 합니다. 한계를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될 일과 죽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 사이에 선을 긋고 담을 쌓고 울타리를 치고 살면서 그 울타리를 넓혀가야 합니다. 셋째 정체성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정체를 밝혀야 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요, 그러기에 이것은 할 수 있지만 저것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고 사는 사람은 정체성 공부를 잘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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