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좋은 자리를 택하는 지혜 (눅 10:38-42)

  • 잡초 잡초
  • 367
  • 0

첨부 1



좋은 자리를 택하는 지혜(눅 10:38-42) 
     

지난 주간과 이번 주간에 올 하계 휴가의 70%가 쏠려있다는 매스컴의 보도가 있습니다. 어제 오늘 고속도로 상하행선은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간에 절정을 이룬 피서 행렬이 이번 주간을 고비로 한풀 꺾이면 이제 곧 결실과 추수의 계절 가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 여름에 갖는 휴가철은 가을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는 쉼의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은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또 이번 주간에는 어디를 가시려는지요?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쉼을 갖지 못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만은 휴가철이 되면 고민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디로 갈까'하는 장소 선정의 문제일 것입니다. 모처럼의 쉼을 어디서 보내는 것이 좋을까 라는 고민과 갈등을 나름대로 겪게 됩니다. 어제 몇몇 교우들을 만나 물었더니 서해쪽의 섬에 다녀오신 분도 계시고, 동해쪽에 다녀오신 분도 계시고, 산이나 계곡 또는 고향엘 다녀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아마 모두들 좋은 시간들을 가지셨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같은 휴가 경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야, 참 잘왔다'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에이, 올해는 장소를 잘못 택했네'하고 후회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자리를 택한다는 것은 피서가는 한철만의 고민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고민과 갈등거리일 수 있습니다. 시1편 기자의 경험처럼 따라나서도 좋은 자리인지,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인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도 좋은 자리인지를 분별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리에 관계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마르다를 향해 하시는 말씀 중에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택한 자리는 빼앗길 수 없는, 빼앗겨서도 안되는 좋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아의 자리 선택을 칭찬하십니다. 마리아가 택한 자리는 좋은 자리로 결코 빼앗기지 말아야할 자리라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에게는 '좋은 자리를 택하는 지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말씀을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다에게 하고 있습니다. 즉 마르다가 택한 자리와 마리아가 택한 자리를 놓고 마르다가 택한 자리보다 마리아가 택한 자리가 더 좋은 자리요 빼앗기지 말아야할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마르다가 택한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요? 왜 그 자리보다 마리아의 자리가 좋은 자리인가요? '빼앗기지 아니할 좋은 자리'란 어떤 자리를 말하는 걸까요?...
지금 마리아가 택한 자리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마르다가 택한 자리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접대하려 분주한 자리'입니다. 이 두 자리 중 예수님은 마리아의 자리를 더 인정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마리아의 자리'만 좋은 자리이고 '마르다의 자리'는 나쁜 자리라는 이분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마르다의 자리도 필요한 자리요 좋은 자리입니다. 사람을 초청해 놓고 저를 접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중들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마르다가 갖고 있는 손대접하기를 힘쓰는 그 마음은 복된 마음입니다. 마르다의 그러한 섬김의 자세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자리도 좋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자리와 마리아의 자리를 놓고 비교해 볼 때 마르다의 자리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자리에 불평과 원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마르다의 불평에서 비롯됩니다. 40절에 보면 시중드는 일에 분주한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있는 동생 마리아의 처사를 못마땅해하며 그녀를 상대하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이건 예수님의 입장에서 상당히 당황스런 말입니다. "왜 할 일이 많은데 지금 그 아이를 붙들고 노닥거리고 계십니까? 그 아이더러 '너도 나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언니를 좀 도와주라'고 명령하소서..."
참으로 당돌한 마르다의 주님을 향한 일갈입니다. 그녀는 마리아와 주님을 싸잡아 비난하고 책망합니다. 왜 자기 생각을 안해주느냐는 겁니다. 당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왜 그 아이와 노닥거리고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만약 마르다가 자기 일을 하면서 동생 마리아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않았다면 예수님도 아무 말씀을 안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로 인한 불평을 예수님께 터뜨립니다. 그것은 곧 동생에 대한 얄미움도 깃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마르다의 마음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만약 마르다가 그냥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면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별다른 말씀을 안하셨을 것인데 마르다의 불평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드러내준 것입니다. 벌써 마르다에게서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마르다가 선택한 자리가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해도 불평이 터져나오는 자리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신앙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은 불평에 기인합니다. 불평은 불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마르다가 택한 자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 어디에도 마르다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는 것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시중드는 일에 음식 대접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음식 대접말고도 손님들을 시중들려면 이런 저런 할 일이 많았을 겁니다.
이 마르다의 일도 소중한 일입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 공연한 짓이거나 무시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에게서 불평이 터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런 마르다를 두둔하지 아니하고 마리아를 두둔한 것은 그런 불평스런 태도로 일하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불평을 터뜨리는 마르다를 향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염려와 근심이라는 말과 족하다는 말이 대칭을 이룹니다. 그리고 많은 일, 몇 가지라는 말과 한 가지라는 말이 대칭을 이룹니다.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고 마리아는 한 가지 일로 평온합니다. 마르다는 염려와 근심 속에 있지만 마리아는 만족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고 그 가운데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사는 자가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도 만족하고 평온함 속에 사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해져서 중심이 흐트러져서는 안되는 겁니다. 봉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불평과 원망이 싹터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과 불평을 가져오는 많은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는 일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럿이냐 하나냐, 많은 일이나 적은 일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해도 거기서 불평이 야기된다면 그건 불평없는 하나의 일만도 못한 겁니다.
우리 인생사를 한번 보십시다. 우리는 평생동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파도가 지나가면 저런 파도가 옵니다. 그런 밀려오는 파도를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방법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근심, 걱정, 염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근심이 있고 아무리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평을 터뜨리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그 많은 문제를 파생시키는 문제 '하나'를 먼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를 해결지음으로서 모든 것을 해결지으라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많은 염려와 근심 걱정은 하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의 결핍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당뇨로 인해 많은 합병증이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문제, 한 가지의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시급한 게 그 한 가지를 해결해야 하는 것일 겁니다. 당이라는 그 하나만 해결하면 나머지 여럿은 자연히 해결되는 법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입니까? 그러니까 인생의 합병증이 오기 전에 예방하는 비법을 주님은 마르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불평이라는 합병증이 오기 전에, 원망이라는 합병증이 오기 전에, 질투라는 합병증이 오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예방하는 비결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운동도 건강할 때 하면 약이지만 병든 다음에 하면 독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한 겁니다. 나중할 것이 아니라 먼저할 것이 있는 겁니다.
숲 속에 많은 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병든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처음엔 잎에 진딧물이 생기더니 점점 이 가지 저 가지로 번져갑니다.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병든 잎사귀를 차례대호 하나씩 하나씩 따주어야 하겠습니까? 병든 잔가지를 하나하나 골라 쳐내야 하겠습니까? 아니지요. 그거 어느 세월에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거 하는 동안 번지는 병충해를 어찌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것은 병든 그 나무 기둥 하나를 베어버림으로써 수많은 가지를 한꺼번에 베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지혜로운 겁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마리아는 그 인생의 지혜를 알았고 마르다는 그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께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그분을 진정으로 손님 대접해드렸고 마르다는 뭔가 자기가 그분을 대접해 드려야겠다는 조바심에 결국은 불평이 터져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대학(大學)에 보면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려서 하는 게 바로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그 하나가 본(本)이었다면 마르다가 택한 그 여럿은 말(末)이었습니다. 본은 하나요 말은 여럿이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다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열보다 중요한 하나가 있고 하나보다 못한 열이 있습니다. 이걸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던 진주 장사는 지극히 값비싼 진주 하나를 만난 후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진주들을 다 팔아서 그 진주 하나를 사지 않습니까? 열보다도 그 하나가 더 귀한 겁니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 본과 말을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인 본을 차지한 것은 마리아였고 열인 말을 차지한 것은 마르다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 아니 스물을 가진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차지한 그 하나가 훨씬 좋은 것인데 말입니다.
어떤 나무든지 밑동은 하나입니다. 그 한 밑동에서 수많은 가지가 나옵니다. 그 가지를 수없이 치는 것보다 밑동 하나를 치면 열 시간 일할 것을 한 시간에 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문제에 함께 얽혀버려서는 아무리 그 얽힘을 풀려해도 풀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모두 '하나'에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그러니 한 가지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 먹고 마시고 입는 인생사의 여러 일들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마르다는 안타깝게도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불평과 원망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한 가지 일에서 감사와 헌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자리입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일의 순서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할 일이 있습니다. 본말을 잘 분별해야 하는 겁니다. 마르다가 하는 일들에서 마리아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마리아가 하는 일에서 마르다가 하는 일들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적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발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분을 섬기는 법이 나와야지 그런 과정 없이 그분을 섬기려 하다가는 불평과 원망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마르다가 하는 일에서 마리아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것처럼 행동하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자의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자기 경험,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거기서부터 매사를 시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으로서 결국엔 부정적이고 불만섞인 그 무엇을 토해내고 열매맺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리아의 일이 나중이 아니라, 마르다의 일이 나중이어야 합니다. 마르다의 일이 시급한 게 아니라 마리아의 일이 시급한 겁니다. 예수님을 육의 양식으로 대접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영의 양식을 예수님께로부터 먼저 받아먹는 게 중요한 겁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르다의 일이 먼저이고 마리아의 일이 나중인 것 같지만 진실은 그 반대라 그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와 사자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 날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결혼 후 정말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만을 골라 뽑아다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합니다. 육식동물인 사자는 내심 먹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소의 정성을 생각해서 참고 그것을 받아 먹었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사냥을 해서는 사냥감의 맛있는 살코기 부위만을 골라 날마다 소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초식동물인 소는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정성을 생각해서 참고 그것을 받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상대방에게 불만을 터뜨리고는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헤어지면서 둘이 서로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맞습니다. 저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것을 장만해 상대방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최선이 서로에게 최악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바로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보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 최선은 자기에게는 최선임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는 최악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소는 소의 눈으로 최선을 찾았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 최선을 찾았습니다. 바로 그 나 위주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최선이 저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최선이 최악을 낳는다는 이 말이 상당히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사실 우리 생 가운데 그런 경우가 적지않은 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갈라서기로 마음먹고 법정을 찾은 부부가 하는 말 대부분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최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최선'이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곧 상대를 못보는 최선이라면 그건 최선일수록 더 최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최선, 그것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고집이나 독선으로서의 최선은 결코 최선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앞에 두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옵니다. 히브리서 11:3절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 아닙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집어 놓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게 아니라 보이는 세상을 먼저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귀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사의 문제입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비극과 곤경이 바로 이 선후의 뒤바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앞뒤를 가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말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이게 안되면 그 인생은 허사입니다. 말을 본으로 알고 살거나, 처음과 나중을 뒤집어 살아가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재물, 무엇이 본이고 무엇이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내 뜻, 무엇이 본이고 무엇이 말입니까?...
휴가란 '앞뒤가 제대로 된 생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짚어보는 멈춤의 시간, 자기성찰의 공간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인생의 좋은 몫을 차지하게 하는 은총입니다. 본말을 제대로 파악하고 교정해서 새롭게 사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생일을 갖습니다. 그럼 생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날입니까? 내가 태어난 날입니까 아니면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날입니까? 둘 다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날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게 아니라,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본말입니다. 이 본과 말을 착각해선 안됩니다. 이렇게 본과 말을 잘 가려서 먼저 본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손대접한 자가 누구입니까? 뭔가를 대접하려다 불평과 원망을 터뜨려 주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마르다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먼저 경청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입니까?... 마리아가 진정 주님을 손대접한 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보이지 않는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이지 우리한테서 보이는 양식을 받아 잡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과 그 일행에 대한 손님 접대를 더 잘 한 것이냐가 묻는다면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님이 원하는 바를 먼저 해드리는 게 제대로 된 손님 접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좋은 자리를 택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빼앗겨도 좋은 자리가 아니라 빼앗겨선 안될 자리를 차지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오는 자리가 아니라 만족과 감사가 있는 자리를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새롭게 2002년도의 하반기를 시작하시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