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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혼과 이혼 / 마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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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이혼  <마 19:3-9> 

요즘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사회 기강이 무너지는  현상이라든지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기는 가정의 붕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부모들의 자녀교육은 위험수위에 있습니다.
입시경쟁이라는 암초를 만나 공부와 성적에만 매달림으로 자녀들을 기형적으로 기르고 있습니다.
또 존대 받아야 할 집안의 어른들이 무관심과 천대 속에 내 팽개쳐 있습니다.
자녀들 중심이다 보니 자연히 노인들에 대한 관심은 뒷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의 핵을 이루고 있는 부부의 관계가 해체되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 있었던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연간 이혼건수가 13만 5천 건으로 지난해에 비해 만 5천 건이 줄었으며 하루 평균 370쌍이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비해 혼인건수는 줄었는데 32만 건으로 지난해에 비해 만 4천건이 줄었으며 하루 평균 877쌍이 결혼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우리 사회의 결혼과 이혼의 비율이 2.37:1 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미국의 이혼율이 세 쌍 중 한 쌍이 됐고 이제는 두 쌍 중에 한 쌍이 되었다고 해서 놀랐는데, 이제 우리 사회도 비슷한 비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학자 틸메스틴 교수는 "가정이 되어 가는 대로 문명을 포함하는 모든 것이 되어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가정이 건강하면 그 사회와 문화까지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고대 로마가 망한 이유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정이 파괴됨으로 망했다고 합니다.
구 소련이 망했던 이유도,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가정의 붕괴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 때 구 소련의 이혼율이 85%에 달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그런 사회가 망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뿐만 아니라 믿는다는 가정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밤늦게 저의 집을 찾아 왔습니다.
결혼한 딸이 이혼하겠다고 찾아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 우리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곳으로 가신 분이 계신데, 이름을 대면 아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 부인이 찾아와 하소연을 합니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하고 눈이 맞아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이혼해 달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인자한 것 같고 또 신앙도 좋다고 자랑하고 간증하던 분이신데 충격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한 가정들에 비해서 이혼한 가정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볼 때에 이러한 일이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성경은 우리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이혼을 더 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복음적으로 산다는 사람들, 특별히 근본주의적인 혹은 보수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이혼율이 높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친 말씀입니다.
3절에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려 하여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혼을 해도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는 헤롯왕의 이혼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세례 요한은 바로 그 일을 비판하다가 목 베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태인 학자들 가운데에는 소위 힐렐파와 샴마이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힐렐학파는 이혼에 대해서 좀더 관용하는 입장이었는가 하면 샴마이학파는 절대로 이혼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혼의 이슈를 갖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 속에 몰아넣기 위한 간계가 포함된 위험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질문을 피해 가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대답을 통해 그들에게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주시려는 교훈이 있었기 때문인 줄 압니다.
그래서 4절 이하에서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하시는데, 먼저 결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십니다.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먼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말씀부터 하시는데,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여기 4절부터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언젠가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왜 이 시대에 성적 순결을 지키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때 빌리 그래함 목사가 "성경이 간음하지 말라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합니까? 왜 이혼은 안 됩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대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혼에 대해서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인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혼할 때에 그 하나님의 원리대로 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이혼을 생각하고 또 결혼을 깨뜨립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원리대로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입니다.
또 결혼해서도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결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절에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안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결혼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떠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연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혼할 때에 이런 의미를 바로 알고 결혼해야 합니다.
또 결혼해서 살 때도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결혼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완전 독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아직도 부모에게 예속되어 시시콜콜히 부모에게 묻고 부모를 의지하여 사는 분들은 아직 온전히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아내나 남편보다 부모를 더 귀하게 여기는 분들, 그들도 아직 온전히 결혼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그밖에 그 어떤 것이라도 부부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 분들, 그분들도 온전히 결혼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완전한 독립 가운데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가리켜 떠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 보면 온전한 독립을 하지 못한 부부들을 많이 봅니다.
소위 마마보이, 공주병환자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결혼관계가 튼튼하지 못합니다.
항상 불안하고 언제 끊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건전한 독립부터 해야 합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잘 정리해야 합니다.
부모를 잊으라는 말이 아니며 부모를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가 중하고 아무리 효도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우선되는 나의 중요한 관계가 부부관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관계, 부부의 관계에 충실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혼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북유럽 선교 대회중에, 기차 안에서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는 부부를 보았는데 그들은 부모님을 공경하면서도 자신들 부부의 관계도 중요하게 여기며 여행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님들은 자기 아들이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멀리 떨어져 배려해주고 그 부부는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건전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독립이 있어야 하는데 부모님들이
이것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결혼을 할 때는 건전한 독립을 한다는 것을 알고 결혼을 했으면 그 어떤 것보다 부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두 번 째로, 우리가 결혼했다는 것은 상대방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 '연합한다'는 말은 '아교로 붙인다'는 뜻입니다.
옛날 고대에 피피루스 같은 것을 아교를 붙여서 썼습니다.
그 때 쓰인 말이 여기 '합쳤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이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되 결코 떨어질 수 없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교를 붙인 것을 떼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둘 다 찢어지고 상처가 나기에 이혼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혼한 사람들을 보면 양쪽 다 상처를 받습니다.

이혼한 사람들이 겪는 육체적인, 정신적인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암이나 고혈압, 뇌졸증 등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병들이 생겨서 빨리 죽을 확률이 이혼자에게 훨씬 높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혼한 사람은 설혹 자신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담배를 매일 한 갑 이상 피우는 사람만큼 발병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이 파괴됩니다.
백인 사회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의 25%가 이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혼한 사람은 정신 병동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될 확률이 다른 사람보다도 열 배로 높다고
합니다. 이혼을 하게 되면 당사자들 자신이 큰 상처를 입습니다.

당사자는 그렇다고 할 지라도 자녀들이 입는 정신적인 피해, 정서적인 황폐화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혼해서 결손이 된 가정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범죄의 뿌리가 될 수 있는 확률이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들의 두 배라고 합니다.
어디 자녀들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부모님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정말 흰머리로 음부에 들어가게 하는 것과 같은 큰 불효입니다.

그래서 이혼은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풀로 붙이듯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결혼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꼭 육체적인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제일 우선되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사람들은 몸을 주고받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혼하는 이유 가운데 상당한 많은 경우 성생활의 불만족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겉으로는 다른 이유들을 대지만 그 내면을 보면 성적 불만족이 큰 이유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했으면 육체적으로 하나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7장의 (3)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4)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한다는 말도 그 말입니다.
한국의 교회 강단에서 성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지만 실제로 필요한 것이기에 결혼할 자녀들이 있으면 우리 교회의 프로그램인 ‘결혼학교’에  참석시키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가정교육을 통해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건전한 교육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 한 몸이 된다는 말은 꼭 육체적인 결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결합, 신앙적인 결합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전 7장에서 말한 것처럼, 한 몸이면 분쟁이 없고 서로 같이하여 돌아봅니다.
또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같이 영광을 얻습니다
또 로마서 12장에 있는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 몸이 되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결혼생활은 너 따로 나 따로입니다. 서로 기세를 잡기 위해 싸움을 합니다.
그것은 한 몸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면 서로 돌아 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몸의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돌아보지 않습니까?
어디 서로 무시합니까? 어디 서로 반목합니까?
서로 위해주고 서로 돌봐 주고 서로 높여주고 그렇게 함으로 함께 고통도 겪고 함께 영광도 받는 것입니다.
남편이 잘 되는 것이 배아프고 아내가 잘 되는 것이 질투가 난다면 그것은 부부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결혼의 원리입니다.
이런 원리에 입각하여 볼 때 이혼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6절을 읽어봅시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결혼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세상 만사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데 어찌 인간의 결혼에 하나님의 섭리가 없겠습니까?
내가 아무개하고 부부가 되어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기이한 섭리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또 결혼하게 하시며 자녀들을 낳고 그들의 부모가 되어 살게 하신 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짝지워 주셨다고 합니다.
부부끼리 함께 앉으신 분들 있으면 한번 서로 마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생배필이군요 ’라고 말씀하십시오. . (하늘이 마련해 주신 배필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서 55:8,9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가 때로는 왜 하나님이 이런 짝을 주셨는가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내 짝이 내가 보기에 멋있는 어떤 남자, 내가 보기에 아름답고 상냥한 어떤 여자 같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생각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다 그 사람이 내게 제일 적합하기 때문에 짝지워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못 마땅히 생각하는 불신입니다.
또 교만입니다. 내가 나보다 나은 줄로 착각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좋은 사람을 짝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고 그 주님의 섭리에 순종하면서 겸손히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이혼하지 못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이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또 질문합니다. (7절)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또 대답하십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완악하여 결혼해서 살다가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 버렸습니다.
방구석에 가두어 두기도 했고 그냥 어디에다가 버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버림받은 여인들은 종살이를 하든지 창기로 전락하여 연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이혼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아내가 마음에 안 들어 버리려면 이혼증서라도 써 주어서 정식으로 이혼하여 다른 사람에게 결혼이라도 해서 살 수 있는 길이라도 열어주라는 뜻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툭하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공포 속에서 병들어 가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신체적인 폭력은 아닐지라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사람을 사람취급하지 않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즈음은 세상이 바뀌어서 얻어맞는 남편들도 있다고 합니다.
아내의 등살에 오금을 피지 못하는 소위 기처가 ,경처가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병들고 육체적으로도 망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작년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이혼소송의 청구 이유를 보니까, 배우자 부정이 42.1%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부당 대우로 23.1%였습니다.
이 부당 대우라는 것이 바로 이런 언어적인 신체적인 폭행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했어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위해서 이혼이라는 법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음행의 연고가 있으면 이혼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7장에 보면 신앙이 맞지 않는다고 헤어지기를 원할 때는 헤어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허용은 극단적인 경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령, 학대도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경우, 정말 그대로 있으면 생명의 위협이 있을 정도의 극심한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음행도 한번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상습적이어서 도저히 결혼관계를 이어갈 수 없을 때를 의미합니다.
신앙적인 이유도 상대방이 한번 두 번 정도 한 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심각하게 신앙을 핑계로 해서 내어 좇으려고 하면 신앙을 위해서 헤어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혼에 있는 것 아닙니다.
그들을 아껴서, 더 귀한 것을 위해서 허용하는 것뿐이지, 결단코 하나님이 이혼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 3:16에 보면 "하나님이 이혼을 미워하신다"고까지 했습니다.
이혼한 사람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한 사람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혼한 사람은 오죽하면 이혼까지 했겠습니까?
우리들은 이혼한 분들을 정죄하거나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격려해 주고 위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 자체는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5월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결혼관계가 원만치 못해서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이 그 형편과 상황을 이해하시지만 이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구하십시오.
이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지혜와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도우심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악하고 부패하며 사람들이 무척이나 이기적입니다. 심지어 결혼까지도
자신의 욕심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주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시 한번 우리의 결혼 관계를 돌아보면서 이혼을 막고 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른 결혼 생활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결혼 원리에 입각하여 바른 결혼관을 가지고 바른 부부 생활을 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또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피치 못할 이유로 이혼한 분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결혼 생활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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