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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 요 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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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2-18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지난 주간은 월드컵 열기로 인해 전에 없던 엄청난 희열과 감격을 맛본 신바람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구속사의 '고난 주간'처럼 아마 지난 주간은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한 주간이 될 것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세계 6위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설마' 했는데 무적함대라 불리우는 세계 8위 스페인조차 물리치면서 4강 확보에 준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이탈리아와의 16강 경기가 열렸던 화요일 저녁과 스페인과의 8강 경기가 열렸던 토요일 오후는 그야말로 온 나라가 지축이 흔들리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승리입니다. 이렇게 까지 잘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잘 해야 16강,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승만 올린대도 성공이라는 게 축구 전문가들의 전망이었습니다. 그런데 4강입니다. 우승확률 40:1에서 이제 6:1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질 않고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본선에서의 1승조차도 어렵다는 평을 받던 한국팀입니다. 그런데 두 달 사이에 전혀 다른 팀이 되어 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인정해야할 것은 우리에겐 약간의 운도 따랐습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정말 잘하는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판을 매수하지 않았고 또 그 정도의 홈그라운드의 잇점은 언제나 있어온 것입니다. 잉글랜드는 브라질과 한 명이 더 많은 11:10으로 싸웠지만 경기에 지고 말았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운도 따랐지만 운 때문에 이겼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평가입니다.
물론 패자의 '억울한' 심정도 헤아려야 합니다. 대 이탈리아전에서 주심 판정에 큰 무리가 있었다고는 보지 않으나 저들의 그러한 반응을 '지나친 불평'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좀 아쉬운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조금은 작용한 것이고 또 그들의 불운이 언젠가 우리의 불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냉소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저들을 향한 이해와 동정을 보이는 것이 우리가 세계에서 더 많은 친구를 만드는 길일 것입니다.
분명 심판도 사람인고로 오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스페인과의 연장전에서의 한 골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아니다'라고 해선 안될 것입니다. 터치 라인 아웃이 아닌데 아웃이라고 한 것은 심판의 오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우리가 이긴 경기에 심판 실수가 있었다면 그 행운에 감사하더라도 그러한 심판의 실수와 공동 운명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행운에는 감사하면서 이런 큰 대회에서 반복되는 오심이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차분하고도 진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4년 전 프랑스 월드컵 때 우리는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첫골을 넣고도 하석주 선수가 퇴장 당해 경기를 망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월드컵에서 하석주의 퇴장 이후 그의 백태클보다 훨씬 심한 태클임에도 퇴장은커녕 경고도 받지 않는 무수한 태클들을 거기서 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수했습니다. 그저 재수없게 시범 케이스로 걸렸다고들 생각했습니다. 이건 인간이 심판을 보는 경기에선 얼마든지 있는 변수입니다. 만약 그것이 골로 인정되었다면 그 다음 국면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아마 우리 선수들이 자극을 받아 더 펄펄 뛰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선수들이 잘 싸웠다는 것입니다. 잘 싸워 이긴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패배에 익숙한 우리들은 '우리가 이태리 같은 강팀을 그냥 이길 리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항상 그 상황을 외국의 시선으로 검증 받아야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가 퇴장을 먹을 땐 우리끼리 'FIFA 규정을 숙지를 못했네 어쩌네' 하며 자학하더니 시뮬레이션에 대해선 철저하게 대응한다는 강화된 규정이 더해진 이번 월드컵에서의 상대 선수 퇴장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쫄아서 궁시렁거리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한국 축구에 반한 사람들이 무지기수로 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 말입니다.
개중에는 '편파 판정으로 우리가 16강, 8강, 4강에 올랐다'느니, '우리같은 팀이 올라가면 월드컵 수준이 낮아졌다고 세계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냐'느니... 당당하게 우리의 승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반칙만을 생각하지 우리 선수들이 채이고 맞고 걸려 나자빠지는 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게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물론 축구 선진국들인 이탈리아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 앞서면 뭐합니까? 이상하게도 완벽한 찬스에서 때리는 슛이 빗나가고,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져 나옵니다. 골이 들어가려면 수없이 들어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골문으로 볼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어제 스페인과의 대전에서는 후반전 들어 스페인의 결정적인 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나오자 관중석에서 '이젠 이겼다'는 환호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골 포스트 맞고 나온 팀중에 이긴 팀이 없거든요. 골대만 때리면 졌습니다. 그러더니 스페인은 그 숱한 찬스를 다 놓치고, 또 심판의 오심으로 잃어버리고 결국은 승부차기에서 우리에게 5:3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까?...

경기가 끝나고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여러 소감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는데 그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승리해서 기쁘다'는 것과, 또 하나는 '홈 그라운드의 잇점에 의한 어드밴티지로 진짜 승리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오프 사이드로 판정된 것은 골'이라느니, '어떤 선수의 퇴장은 지나쳤다'느니, '이렇게 승리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느니... 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게시판을 가득 채웁니다.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재미있는 장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기서 일종의 패배주의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외국에서조차 우리의 승리를 인정하고 축하해 주는데 정작 우리는 외국의 시각보다 더 치우친 시각으로 우리의 승리의 의미를 희석화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흔히 우리들은 우리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서 체력과 골 결정력이 떨어진다고 평했습니다. 저도 두달 전까지는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수정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 선수들이 오히려 유럽 선수들보다 월등한 체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개인 기술도 상당히 근접해 있고 무엇보다도 뚜렷한 건 강력한 팀웍입니다. 체력과 조직력은 그 어느 팀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체력과 스피드와 조직력이라는 종합된 실력으로 한 경기 한 경기를 이겨 4강까지 올라온 겁니다. 전문가들이 8강에 오른 여덟 팀을 분석했는데 우리나라는 모든 부분에서 3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안돼'하는 숙명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4강에 오른 것이 우리 선수들의 순수한 실력만으로 이룬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다 실력이 떨어져서 4강에 못오른 것도 아닙니다. 그걸 안믿는 이들은 '운명' 또는 '재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뭔가가 특별한 게 있다는 생각을 대한민국 국민도 하고 있고 외국인들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Fantastic', '환상적이다, 기이한 일이다, 이변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럼 그 특별한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물론 세계에 유래가 없는 온 국민의 단합된 응원이겠지요. 정말 경기도 경기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펼치는 응원열기를 보노라면 '언제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하나될 수 있을까' 싶어 목이 메이는 게 정말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뭐 '악마니 뭐니' 하며 호칭가지고 너무 과민반응 일으킬 필요 없습니다. 그건 그냥 '애칭이다' 여기면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상대를 향해 '악마!'하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로 수용하면 되지 그걸 가지고 사탄이니 마귀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은 그 응원의 힘 말고도 또 다른 무엇이 우리 선수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뭔가 우리 팀을 돕고 있는 기운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 기운이 우리 선수들에게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게 뭘까? 또 그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월드컵에서 찾아야할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의 최대의 수확은 4강이니 우승이니 하는 경기적인 것보다도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을 새롭게 확인하고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국민 대통합'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IMF 이후 주눅들고 의기소침해진 우리 민족이 다시금 하나되어 일어서는 놀라운 비상을 우리는 모든 도시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무엇을 하든 자신감을 갖게되었다고 하는 것이 월드컵을 통해 얻은 최고의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이 2002 월드컵을 '하나님께서 21세기에 우리 민족에게 주신 가장 크고 놀라운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모든 부정적인 것과 패배주의와 회의주의, 사대주의를 다 버리고 참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새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 되어 기뻐하고 환호하는 그 신명난 모습들, 이전보다 더 열린 사람들이 되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된 듯한 느낌,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잡고 싶고 얼싸안고 싶을 정도로 정겨운 느낌, 그런 것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것들인데 이런 역사가 지금 이땅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긍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의 회복입니다. 이런 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자기를 비하하고 학대하는 데 익숙해지게 됩니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선수들이 그렇게 잘해서 당당하게 4강에 올랐는데도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그것이 '홈팀의 어드벤티지'이거나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40위 랭킹인 한국이 감히 5위, 6위, 8위의 그런 팀들을 이긴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진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의 언론을 제외하고는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모두 한국의 승리를 실력에 의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기자가 공항에서 우리와 같은 조에 속한 포르투칼 선수들에게 '한국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개막 바로 직전에 한국에 도착한 감독조차도 '한국에 대한 데이타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진 겁니다. 그렇게 오만하고 준비가 부족했기에 진 것입니다. 이탈리아는 예선도 겨우 통과하고 조2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우리가 보았다시피 남들이 '더티 싸커'라고 비난할 정도로 깔끔하지 못한 경기를 보였습니다. 더욱이 한 골을 먼저 넣고 나서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가 정신력과 투지로 똘똘 뭉친 한국에게 역습을 당한 것입니다. 빗장수비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에 대해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놓고 동점골을 터뜨리고 연장에서 골든골을 터뜨려 이긴 끈기의 팀은 축구 역사상 우리밖에 없습니다.
히딩크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는 '우리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에게 '너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너희에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저력이 있다'고 저들을 격려하면서 저들을 믿고 가르치고 훈련시켜 저들 속에 있는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백분 끌어낸 것, 이게 바로 그가 명장인 이유요 한국축구가 승승장구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제가 이런 축구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도 바로 그런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이 월드컵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던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는 유독 지배자들의 횡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너무 과중한 종교적 부담으로 풀이 죽고 기가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적인 것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긍정하고 격려하면서 그들 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끌어내어 새로운 의식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시력을 잃어 평생 배우지 못하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 취급 하였고 주님의 제자들마저도 그가 그렇게 된 것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그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위함'이라고 함으로써 그를 한없이 긍정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고쳐줌으로써 그를 멸시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고 장본인이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불행에서 그저 죄를 찾기에 급급했지만 주님은 그의 불행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았고 그 사람 속에 피어날 아름다운 하나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그는 확실히 변해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질 못하고 '맞다, 아니다'라고 논란을 벌입니다. 변한 겁니다. 새로워진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의 비굴하거나 주눅든 죄인이나 걸인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새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디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 병든 딸의 치유를 염원했던 수로보니게 여인, 간질병 들린 자식을 위해 애타하던 아버지... 저들을 향한 주님의 선언은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였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들 자신들의 의지와 확신과 믿음을 문제 삼고, 그들 자신들 속에 있는 능력을 한없이 긍정해 주고, 그들 자신들이 기죽거나 주눅들지 않고 자기들 속에 있는 아름답고 힘있는 것들을 드러내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바로 '네 믿음대로 될찌라'라는 치유의 선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을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이 일을 하시되 십자가를 지기까지 철저하게 하신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가를 깨우쳐 주는 놀라운 사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로 낙인찍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태도를 겸손이나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했던 사도 바울의 의연함이 바로 우리의 의연함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일깨워주신 겁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주실만큼 우리가 가치있고 존귀한 존재임을 십자가로 일깨워주신 겁니다.

언젠가 빌립이 주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했을 때 주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천한 인간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실 때 저들은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 합니다. 이 때 주님은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신이라고 하셨느니라..." 요10:34절의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말씀입니까?...
그 주님께서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계십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사람들을 향한 엄청난 긍정입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 히딩크는 상대도 안됩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는 자는 오히려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처럼, 주님이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당신의 사람들을 향한 놀라운 긍정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스승보다 못한 제자처럼 스승의 흉내나 내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큰 것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 밖에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 능력의 원천은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역시 주님이 저들 속에 역사하시며 계속해서 도와주고 가르쳐 주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제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 바로 이 말씀이 늘 가슴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요 또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사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며 너희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리라..."
저는 우리 월드컵팀이 승승장구하는 숨은 이유를 여기서 봅니다. 그 속엔 열명의 크리스챤들이 있습니다. 이운재, 송종국, 이영표, 이천수, 최태욱, 차두리, 안정환, 유상철, 현영민 등등... 저들 가족을 비롯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어제 경기장 관중석에서 '주님 안의 종국'이라는 프랑카드를 보셨습니까? 그게 바로 기적의 이유입니다. 정말 저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이운재 선수가 승부차기를 막아낸 후 자신감에 차서 씨익 웃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 자신감이, 그 믿음이 승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큰 일을 하리라'는 약속,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함께 한다'는 약속, 그 약속 안에서 저들은 자신들도 깜짝 놀라는 큰 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안에서 소중히 여기고, 긍정하고, 우리 속에서 아름답고 힘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자만도 아니고 교만도 아닙니다. 자기 속에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약속하십니까? '더 큰 일을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약속이 오늘 여러분의 것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삶입니까? 기도하는 삶입니까? 자존감을 갖고 희망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엄마, 저 혼자는 못해요, 안돼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자식보다 '엄마, 행복해요. 감사해요,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자식이 좋은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긍정해야 합니다. 이 자존감과 자기긍정이 없으면 그 신앙은 아주 미숙한 단계에 머무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의식들을 다 떨쳐버리시기 바랍니다. 패배주의와 사대주의를 다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처럼 믿음 안에서 자신을 한없이 긍정하고,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꿔가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감격하고 그 기쁨 속에서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새천년의 첫 번째 월드컵을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멋있고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무한히 잠재된 힘이 있습니다. 쪼잔하게 나누고 갈리고 다투는 우리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계속해서 이루어가야할 일들입니다.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에 너희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언제나 성령의 신바람난 삶을 이루어가는 우리 영락의 모든 권속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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