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의 기초 / 사 29:22 ~ 24

  • 잡초 잡초
  • 182
  • 0

첨부 1



  신앙의 기초 / 사 29:22 ~ 24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29:22 ~ 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주, 곧 야곱 족속의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이제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수모 때문에 창백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그의 자손, 곧 그들 가운데서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길 것이다." 야곱의 거룩한 분을 거룩하게 받들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섬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혼미하던 사람이 총명해지고, 거스르던 사람이 교훈을 받을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3:9 ~ 15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터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가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닦아 놓은 터 곧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터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은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7:7 ~ 1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셨다.

--------------------------------------------------------------------------------




  우리는 지금 2002년에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 다음 세대는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더, 혹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된 시대에 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10년 전, 20년 전 또는 30년 전을 돌아보면, 당시와 지금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세계는 어떨까 하고, 미래에 대한 분석도 하고 또 미래상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미래학자들이 인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피터 드러커’라는 사람이 책을 많이 썼던데, 저도 그 사람 책 중에 한 권을 읽어보았습니다. 앞으로 있을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 사람의 지론 중의 하나는 다음 사회 역시 지식 기반 사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지식이 중심입니다.
본래 지식은 국경이 없기 때문에 세계화 물결 속에서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지식은 누구든지 손쉽게 얻을 수 있으므로 사회적 신분의 상승이 쉬워지고, 마지막으로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지식이 권력과 성공을 보장하기 때문에 지식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져서, 실패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지식 사회 역시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이 있을 것 같다는 분석입니다. 전통사회와 다르다면, 지식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는 점입니다.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이론적 지식도 있고, 일하는 현장에서 얻어지는 실천적 지식도 있고, 또 과학 연구 속에서 축적되는 과학적 지식도 있고, 훌륭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적 지식도 있습니다. 지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잠언을 읽어보면, 이 지식에 관한 얘기와 함께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뭐냐 하면,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정된 붙박이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유랑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사를 자주 다니신다면 잘 아실 것입니다. 가재도구 사놓은 것 다 팔아버리던가 줄여야지, 잦은 이사에 어떻게 그 물건 다 들고 다닙니까? 이스라엘은 한 가정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이동하고 유랑했으므로,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동해도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의 기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지식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쓴 잠언에 보면, 머릿속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은 머리의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지식이 따뜻한 사랑의 가슴속에 담길 때에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랑의 가슴속에 담긴 지식을, 잠언서는 지혜라고 이름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측하는 지식 기반 사회가 되어도, 우리의 지식이 잠언서의 말씀대로 따뜻한, 아주 인간적인 사랑이 뜨겁게 용솟음치는 그런 가슴속에 담길 수 있다면, 지식 기반 사회는 다시금 지혜로운 사회가 될 겁니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꿈꿔야 될 것 같습니다.
드러커의 주장 중에 제일 관심을 끄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난 2030년을 시점으로 놓고 두 나라의 변화를 예측했습니다. 독일과 일본이 그 둘입니다. 독일은 현재 인구가 8천 2백만 명 가량 되는데, 2030년이 되면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9백만 명이 줄어든 7천 2백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구가 줄어도 현재의 독일의 부와 능력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면, 매년 1백만 명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드러커의 진단입니다. 이런 사정은 이태리나 스페인이나 네덜란드나 스웨덴 등 유럽 쪽 나라 사정이 약간의 편차가 있을 뿐 비슷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동북아 쪽으로 와서 일본에 관해 썼습니다. 일본 현재 인구가 1억 2천 5백만 명인데, 2030년이 되면 약 3천만 명이 줄어서 9천 5백만 명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도 현재 누리는 부나 사회적 경제적 모든 가치를 유지하려면, 그걸 뒷받침해 줄 소위 고급 지식 노동자가 필요한데, 이건 일본 정부의 발표가 아니라 드러커의 예측이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일본의 계획은 한국에서 매년 50만 명 정도의 고급 인력을 5년 취업 조건으로 초청하여 일본 경제를 살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우리도 현재 5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어서 바닥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또 자기들의 고급 지식 기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고급 노동력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현재 제일 동포 수가 거의 60만 명을 넘는다는데, 여기다가 고급 두뇌 노동자 50만 명을 합하면, 일본 사회에 엄청난 한국인 사회가 형성되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제 인구 이동이 극심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드러커의 말을 빌리면, 기술과 지식과 재능은 국경이 없어서 세계화 물결 속에서 세계를 마구 떠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그런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제는 앞으로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되어 노인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과 독일의 경우 2030년경이 되면 65세를 넘은, 소위 은퇴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습니다. 지식사회가 되면, 은퇴 이전과 이후, 직장에 있을 때와 떠났을 때를 이전처럼 구분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산업사회의 연령 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연령 구조가 생겨날 것입니다. 65세 이상의 인구가 생산적으로 공헌하고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앞으로 지식기반 사회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은퇴 연령이 철폐되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드러커는, 앞으로 지식사회가 되면, 40대가 직장 생활이라는 제1의 인생의 최고봉에 달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40대 이후부터는 내리막길이 되는데, 그때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제1의 인생과 제2의 인생의 분기점은 65세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40대와 50대로 갈릴 수가 있습니다. 저로서야 예측은 곤란합니다만, 어쨌든 은퇴 연령은 자꾸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시대가 실버 소사이어티(silver society)가 된다면, 은퇴는 쉬는 것을 뜻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생산해서 세금을 내고 재산을 모으는 세대가 있는가 하면, 제1의 사회와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새로운 인생, 제2의 사회가 있어야 합니다. 제1의 인생이 있으면 제2의 인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동일한 지식 기반이 연결해 줍니다. 제1의 경력사회와 마찬가지로, 은퇴 다음에 있을 제2의 경력사회도 의미 있는 사회가 됩니다. 활동하는 시절이 있고 활동하지 않는 시절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활동 시기가 있고 또다른 형태의 활동 시기가 있습니다. 하나의 인생이 있고 또다른 인생이 있는 것이지, 실무에 종사하는 인생이 있고 은퇴한 인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이 둘이 하나로 연결된 시대가 될 겁니다.
이런 생각과 관련시켜 볼 수 있는 논의가 요즈음 교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부분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주5일제 근무의 완전 실시입니다. 교회들마다 걱정이 많습니다. 토요일이 완전히 휴일이 되고 나면 주일 예배는 어떻게 하나, 일주일에  주일날 하루 쉬는 것도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교회 출석에 영향을 미치는데, 주5일 근무제가 되면 교회는 텅 비지 않겠느냐는 걱정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오시오” 하지 말고 “교회가 갑시다”라고 합니다. 어디로 갑니까? “산으로 갑시다. 바다로 갑시다. 어디든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교회가 갑시다.” 이제 교회가 사람을 찾아다니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은 그린 처치(green church)로 가자, 마운틴 처치(mountain church)로 가자, 하면서 별 처치(church)로 다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5일제 근무제가 주는 의미를 우리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서 엿새 동안에는 일하고 이레가 되는 날에는 쉬게 되는데, 이것이 전통적인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문명이 하도 발달하게 되니,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일 말고 인간이 만든 또다른 안식일이 생겼습니다. 토요일입니다. 주일날은 하나님이 만드신 영적 안식일, 토요일은 육적 안식일! 하나는 세속적 안식일, 다른 하나는 거룩한 안식일입니다. 이 두 안식일을 어떻게 할 겁니까? 닷새 동안은 일하고 쉬는 여섯째 날 안식일을 그냥 무용화해야 합니까? 아니죠. 그날도 인생이 꽃피는 날입니다. 주일날이 일주일의 마감이 아니라 새로 시작되는 일주일 시작이듯이, 토요일도 이제는 단지 쉬는 날이 아니라 제2의 인생이 꽃피는 날입니다. 이 날도 우리에게 보람있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맘껏 즐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드러커가 말한 지식 기반 사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안식과 일함, 젊음과 늙음, 이런 것들이 구분이 없어지는 사회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우리가 잘 쓰는 “점잖다”라는 말을 안 쓴다고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점잖다라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인데, 그럼 늙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앞으로는 여러분에게 점잖다는 말 안 쓸 생각입니다. 늙은 것도 서운한데, “늙으셨군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체적 연령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젊을 때의 제1 인생과 나이가 들었을 때의 제2 인생을 같이 묶어 보람있게,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맞게 살아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따뜻한 가슴속에 담아 지혜를 낳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전부가 다 금 또는 은 또는 보석과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로 집을 짓는 복을 받았습니다. 금집을 짓든, 나무집을 짓든, 풀집을 짓든 그건 자유입니다. 고층빌딩을 짓든, 단층집을 짓든, 다세대주택을 짓든, 여러분 능력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집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름하는 모퉁이돌 위에다 세우십시오. 그러면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활이 별도로 있는 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다른 것은 그 삶의 기반, 그 인생의 집이 선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지혜를 가지고 집을 지을 때, 맘껏 지으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그 달란트는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달란트를 세울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지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유로운 작품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기초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은 기초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학기술문명이 이렇게 발달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기초과학을 거론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술과 학문이 꽃을 피웠는데도 불구하고, 예술과 학문의 기초가 무엇인가를 다시 찾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상과 사고가 이렇게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출발점, 곧 인생의 기본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기초의 튼튼하지 못해서, 우리가 세워놓은 모든 집들이 다 무너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비극적 판단도 우리 주변에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덕은 계속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제도가 미비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죠. 사실은 기초가 튼튼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자체가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건물을 짓는 것은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어떤 재료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건물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건물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구세주로 모시는 신앙고백, 그 위에다가 지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기초를 든든히 놓으십시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눈먼 사람이 예수께 나왔는데, 사실 이 눈 먼 사람은 이전에 의원들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당시 전통 의술로 병을 고치던 사람도 찾아갔습니다. 신 의술을 배운 의사도 사람도 찾아갔습니다. 많은 의사를 찾아가서 눈을 고치기를 바랐지만, 지식의 기반으로는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한테 왔습니다. 예수께서 침을 뱉어서 눈에 바르고 물으셨습니다. “당신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믿느냐?” “믿습니다.” 다른 성서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병을 고칠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이제 인생의 기초를, 삶과 죽음의 기초를 하나님에게 놓았으므로, 당신은 구원을 받았고 병을 고치게 되었다. 네가 믿느냐?”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을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하십니다. 쾌락도 즐기고 잠도 맘대로 자고 일도 자유롭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간섭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잔소리꾼이 아닙니다. 단,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석에 놓여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마하트마 간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아주 고전적인 얘기 하나를 했는데, 칠거지악(七去之惡)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만, 내용은 다릅니다. 멀리해야 할 일곱 가지 악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첫째, 정치가 필요하지만, 원칙이 없는 정치, 꼭 지금 우리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만, 그건 죄악입니다.
둘째, 부가 있을 수 있으되, 일하지 않고 모은 부가 있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셋째, 많은 사업이 있으되, 도덕이 없는 사업들은 죄악입니다.
넷째, 쾌락이란 것이 있습니다. 쾌락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쾌락은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없는 쾌락, 그것은 죄악입니다.
다섯째, 교육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인격이 없는 교육, 그것은 죄악입니다.
여섯째, 기술은 소중합니다. 우리의 기술 문명은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이 배제된 기술, 그것은 죄악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분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은 다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데, 희생적 봉사가 없는 예배, 그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간디의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을 뒤집으면 민심이나 백성이 원하는 것이 뭐냐를 아는 정치의 원칙이 지켜질 때, 정치는 악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열심히 정직하게 일해서 벌어들인 부는 복입니다. 도덕의 기반 위에서 사업을 열심히 해서 사업이 번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양심에 따른다면, 인생의 즐거움, 인생의 쾌락은 우리한테 복입니다. 그래서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기쁨이 있고 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교육에 인격이 깃들어 있다면, 교육은 복입니다. 사람을 위한, 사람이 중심이 된 기술문명도 복입니다. 이웃과 화해하고 봉사하면서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예배도 복입니다. 복과 악 사이에 경계선이 딱 하나입니다. 기반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까?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이 모두, 우리한테 주신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달란트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단, 성공하고 싶으시면, 연령과 상관없이, 은퇴 여부와 상관없이, 일하는 날, 안식하는 날, 다 초월하여 여러분의 생명과 여러분의 달란트가 다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이 돌 위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얹어놓고 새 집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사회도 다시 그렇게 건설하십시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건설하십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의 기초 위에 세우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