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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와 평화를 구하라 / 겔 37:15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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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화를 구하라

구약의 말씀: 에스겔서 37:15 ~ 23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네 민족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일러주지 않겠느냐?' 하면, 너는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에브라임의 손 안에 있는 요셉과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지파의 막대기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유다의 막대기를 연결시켜서, 그 둘을 한 막대기로 만들겠다. 그들이 내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하셨다고 하여라. 또 너는, 글 쓴 두 막대기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 손에 들고, 그들에게 말해 주어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고 있는 그 여러 민족 속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며, 사방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며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우상과 역겨운 것과 온갖 범죄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범죄한 그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구해 내어 깨끗이 씻어 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사도행전 2:43 ~ 47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7:7 ~ 12
  "구하여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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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이자 동시에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주일입니다. 광복이라 하면 57년 전에 우리가 역사적으로 맛보았던,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그 해방이 가져다준 자유의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오늘도 길이 길이 간직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은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자유를 담을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 그릇은 평화라 이름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와 자유 두 가지를 오늘 주일의 예배에 응축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어느 사회든지 과거에서 배움을 얻는 일 없이는 오늘을 건전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광복절이 되면서 여러 잡지나 신문들이 관련기사들을 보도하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간략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요즘에 언어도 국제화시대가 되어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는 언어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원래 일본말이 아니었으나 일본을 거쳐서 우리 나라에 들어온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래 중국말이었는데, 일본어를 통해서 우리말이 된 것이 있습니다. 우동, 가방, 라면 등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어디 말인지 몰랐는데, 본래 중국말이랍니다. 그것이 일본으로 갔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우리가 오늘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포르투칼 말이었는데 일본어가 된 것을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말도 있는데, 담배, 덴뿌라, 빵 등입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본래 스페인 말이었는데, 일본을 거쳐 우리말이 된 것은 메리야스입니다. 프랑스 말이 일본으로 갔다가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쓰봉(바지), 쎄무 가죽 등입니다. 영어의 경우에는 와이셔츠, 타올, 빵구, 바께쓰, 도나쓰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모른다 할지라도 어쨌든 일상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상이라는 것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혹시 우리가 57년 전에 받은 해방의 기쁨과 감격도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무디어져서, 이제 8․15 기념예배가 생생한 현실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 역사의 사건에 대한 기념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자신들의 출발을,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출발점을 엑스도스, 우리말로 출애굽에서 찾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오래된 사건입니다만, 그들은 출애굽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57년 전에 우리가 얻었던 해방의 감격은 , 그 자유는 57년 전 그해의 것만이 아니고, 당시의 축하 이벤트에 묻혀버릴 개념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도 우리가 맛보아야 할 사건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해방이란, 광복이란 자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57년 전에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때와는 달라진 상황 속에서 또다른 자유를 얻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해방 이후, 역사를 이어 오면서, 자유를 우리의 생활 근거로, 사고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였습니까? 식민 상태에서의 해방이라는 자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방된 후에도 광야생활 동안에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 동안에도, 이 땅에서 독립국가를 이루며 사는 지금도 이 자유라는 복은 계속해서 심화되어야 하고 확대되어야 합니다.
57년 전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한테 주어진 사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과거의 사건을 오늘에 되살릴 때마다 우리의 파트너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본입니다. 저는 일본을 잘 모르긴 합니다만, 최근에 일본에서도 자기들이 세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서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지에 관해 전문가들마다 이런저런 방도를 내놓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읽은 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한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난 월드컵 대회 때 일본과 한국의 차이에 관한 글이 많았습니다. 사회학도 연구하고 정치학도 배우고 신학도 공부한 어느 젊은 평론가가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일본은 자신이 원했던 16강에 도달했을 때, 모든 일본의 신문과 TV의 기사 제목은 “일본은 승리했다” “일본 승리”였습니다. 한국도 공동 개최국으로서 16강에 꼭 진출하고 싶어했고, 16강에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16강에 진출하자마자 한국의 모든 언론은 “가자 8강으로”라고 외쳤습니다. 일본은 16강에 들어가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계획한 대로 결과가 나오자 행복해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목표를 16강까지로 설정해 놓고 16강에 도달하니까, 딱 뛰어넘어서 “가자 그 이상으로”를 외친 것입니다. 모든 언론이 약속이나 한대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또는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적극적 사고방식, 개척적 사고방식을 일본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자기가 계획한 것이 이뤄지면 그것을 일단 평가하고 거기에 머뭅니다. 그래서 이 평론가의 말이 “한국과 일본이 결합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적극적 개척정신과 일본의 치밀한 계획성,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서로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 말속에는 우리 한국인은 계획성이 없다는 지적도 들어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평론가는 또 하나를 지적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적극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능력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하도 짚어보기 때문에, 좋은 말로 일본은 예의가 바르고, 한국은 치고 나갑니다. 한국의 행동력과 일본의 예의 바름, 두 가지가 합쳐지면 참 좋겠다는 것입니다.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다 포함해서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관심 가지고 전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뭐냐고 물으면, 자기들로서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평론가의 견해가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 말로는, 일본을 움직이는 도덕적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란 바로 상식이라고 합니다. 시대적 상식, 오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다 동의하고 공감하는 가치,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 제국주의 시절,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인들이여 전쟁에 나서라”고 하면, 당대 상황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 최대의 도덕이었다는 것입니다. 패전한 다음에 다시 천황의 이름으로 “이제는 평화에 협조하라”고 하면, 변화된 당시 상황에서 평화에 협조하는 것이 사회적 컨센서스(consensus)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도덕입니다. 도덕적 척도입니다. 일본은 그걸 상식이라고 이름합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뛰어넘으면 도덕적 가치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면서 이 평론가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이 과거 식민지 전쟁에 대해서 죄책 고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이 양국의 관계에 걸림돌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당시의 우리는 일본인으로서 최선의 일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최선을 다한 당대의 상식을 잘못이라고 규정하기가 심리적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합의와 다수의 사고를 뛰어넘는 것은 일본의 사고 방식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 월드컵 때도 봤더니 16강까지라는 사회적 공감, 그 목표를 이루자마자, 바로 그것을 뛰어넘자 하고 구호를 내겁니다. 한국은 상식을 뛰어넘는 사회, 우리 일본은 상식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일본에서는 선과 악의 기준은 당대 사회의 다수에 의한 상식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믿는 것처럼, 사회적 상식과는 상관없이 하늘에 계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주시는 선악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부흥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은 이겁니다. 일본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사회적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이므로, 절대자 신이 준 선악 기준은 통용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사회학도였다가, 이제 신학을 공부하고서 목사가 되려고 하는 한 중년 전문가의 진단입니다. 만일 이 진단 속에 일말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우리는 57년 전에 받은 이 자유의 복을 어떻게 견지해 가야 하는가에 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 자유를 갖고 싶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받았던 그 자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에서, 다시 말해서 야웨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 무이하신 주님,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확고한 관계 안에서 지켜져 왔습니다. 그 관계가 망가지고, 우상숭배가 자행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까지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빌론의 식민지가 됩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가 됩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자유라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를 누릴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이 관계가 철저할 때, 이스라엘 땅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서 전체의 고백입니다. 거꾸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과 멀어져 갔을 때에는 언제나 평화는 깨졌고, 평화라는 그릇이 깨지면 그 그릇 속에 담겨진 자유는 여지없이 유린당했습니다.
57년 전에 자유를 얻고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자유!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짐하고 약속했습니다. “이 자유를,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을 절대자라고 믿는 우리 신앙을 견고히 함으로써 지켜가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억압당했을 때에 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 곁을 떠나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57년 전에 얻게 된 자유를 감사하지만, 이 자유는 북쪽에는 없습니다. 자기들 방식대로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겠지만, 솔직하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방식대로의 자유는 북쪽에 없습니다. 왜 남쪽에는 이런 자유를 주시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물질적 복까지 주시면서, 북쪽에는 자유도 없는데 배고픔까지 보태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현실에서 다시 광복 57주년 기념 주일을 맞으면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배부른 자유인, 상대적이지만 북쪽은 배고픈 부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북쪽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너무나도 귀중하고 소중하여, 이 자유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이 자유를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는 북쪽의 부자유가 자유로 바뀌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한 결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만의 자유는 가능했지만, 이 자유를 앞으로 계속해서 지키려고 하면, 싫으나 좋으나 북쪽과 전쟁 없는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켜야 할 자유, 나눠야 할 자유, 이 자유를 생각한다면,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열어 줍니다.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라.” 우리 나라는 해방 이후에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복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해외를 다니면서 많이 느끼셨을 줄 압니다.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많은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아프리카의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아직도 어려운 점이 많지만 우리가 받은 복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일본과 비슷하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의 상식이 절대가치로 지배하는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는 쌀이 남아서 사료로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배고파서 굶어 죽어간다고 합니다. 정서적 이유 때문에, 감정적 이유 때문에 북쪽에는 쌀을 못 주겠다고 합니다. 짐승에게 사료로 줄 망정 못 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당대의 최대의 공감대이며 그래서 여기에만 따른다고 하면, 일본이나 한국이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절대적 도덕적 가치가 되고 맙니까? 결국 이것을 넘어서지 못해서? 이것을 뛰어넘으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감사히 먹고 남는 것은 분명히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정서 때문에 북에 못 준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상식입니다.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남는 것을 동포에게 주지 않은 채 사료로 동물에게 준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만큼을 빼앗아 가실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싫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일본의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적극적 사고, 한 단계를 넘어서서 생각하는, 그 위의 단계를 생각하는 사고를 가질 수는 없습니까? 선악의 기준을 당대의 대중적 지지에 두지 않고, 그걸 넘어선 절대적 가치에 두고서 한번 상승할 수는 없습니까? 우리가 중진국을 넘어서 선진국에 들어선다고 하는데, 우리의 사고는 후진국 상태로 후퇴해야 합니까? 미래지향이 우리의 비전이라고 하는데, 비전이 아니라 과거 회귀로만 빠져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오늘 다시,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남쪽에서만 아니라 북쪽에서도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용감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분명히 하고, 그분의 뜻은 인간 사회의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눠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도덕적 상식이나 성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이웃과 함께 나눠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싶으면, 장차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북쪽에 있는 동포들에게 남는 것 가지고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그러면 답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회적 상식, 오늘의 시대가 형성한 인간적 상식, 이 컨센서스 빌딩(consensus building)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고의 도덕이라고 생각하는 우는 범하지 맙시다. 57년 전의 해방의 기쁨은 우리의 상식, 우리의 인간적 판단을 넘어서, 주님께서 기적과 같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21세기에 우리에게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복을 생각하면서,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보십시다. 남쪽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습니다. 신앙도 훨씬 더 성숙해져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도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도 누리고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IT산업도 상당히 개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고통의 과정 가운데에서도,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개척할 수 있다는 역사적 실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할 필요는 없으나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런 특별한 은총을 누리면서 지금까지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맡겨주실 미래의 비전과 사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북쪽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 문제만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서 우리는 자유를 선포하는 평화의 역군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의 그릇 속에 자유를 담아 만방에 전파하는 그런 민족으로 부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주신 복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니라. 나는 너희들의 야웨 하나님이니라. 이 한 가지를 너희 인생, 너희 신앙의 비전으로 삼아라.”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 속에 자유와 평화를 잉태시키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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