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빛의 열매 / 사 2:1 ~ 5

  • 잡초 잡초
  • 224
  • 0

첨부 1



  빛의 열매 / 이사야 2:1 ~ 5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5:8 ~ 14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 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은밀히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빛으로 말미암아 폭로되는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5:13 ~ 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갈증이고 희망인 모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얘기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양에도 있고 동양에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부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의 선녀가 땅에 내려와서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몰래 훔쳐본 나무꾼이 선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선녀가 벗어놓은 옷을 감추었습니다. 옷이 없는 선녀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어서 결국 나무꾼과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삽니다. 이게 이야기의 주요 내용입니다.
서양에서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선녀와 나무꾼이 아이들을 낳고 오손도손 한참을 살았는데, 어느날 선녀가 나무꾼 남편에게 사정을 합니다. 이 정도 살았으니, 옷을 넘겨주어도 되지 않느냐? 그래서 나무꾼이 옷을 넘겨주자, 선녀가 옷을 입고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문자 그대로 옷이 날개였습니다. 하늘에서 왔던 사람은 다시 하늘로 가고 맙니다. 하늘과 땅은 섞을 수 없고, 하늘이 땅에 임했더라도 하늘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동양에 오면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붙습니다. 선녀가 하늘로 날아가기는 하는데,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사랑스럽고 애처로워서 양쪽 팔로 두 아이들을 안고 함께 날아갑니다. 동양적 해석입니다.
우리 나라로 오면 거기에 하나가 더 붙습니다. 선녀가 하늘에서 애들을 데리고 살다보니, 남편이 그리워지고 불쌍해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두레박 하나를 내려 줍니다. 남편인 나무꾼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납니다. 말하자면 이산가족 상봉입니다. 여기서 끝이 났으면 해피엔딩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효성이 중시되었기에 또 다른 해석이 이어집니다.
하늘에 가서 선녀와 자식과 함께 살게 된 나무꾼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땅에 남겨두고 온 나이 드신 어머님이 너무 애처로워서 어머니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선녀에게 사정한 결과,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 나무꾼은 용을 타고 땅에 내려가서 어머님을 잠깐 뵙고 오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하늘에서 온 아들이 너무 반갑고 기특하여 어머니가 팥죽을 끓여줍니다. 용 위에서 어머니가 주신 팥죽을 먹다가 뜨거운 팥죽이 용의 등에 떨어지는 바람에, 용이 놀라서 하늘로 날아가 버립니다. 결국 나무꾼이 하늘로 갈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결말이 납니다. 나무꾼은 지상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 이야기의 끝입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오늘 설교의 주제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옛날부터 어느 나라 어떤 지방에서든지 하늘과 땅의 만남을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해후, 만남, 하나 됨은 모든 사람의 희망사항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면 무슨 역사가 이루어집니까? 그 역사에 관해서는 지역마다 사람마다 희망하는 것이 다르고 해석도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담긴 하늘과 땅의 만남 가운데 어느 경우가 제일 좋은 것이라고 보시겠습니까? 아마 한국의 경우가 제일 좋다고 칭찬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마지막 어머니까지 하늘로 모셔갔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어쨌든 하늘과 땅은 만나서 행복의 공간을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오셔서, 혼돈과 허무, 허무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지요, 아무것도 없는 이 땅에 제일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창조의 제일 작품입니다. 세상에 빛을 주시니, 어둠이 물러가고 공허와 혼돈이 없어졌습니다. 이어서 육지도 생기고 바다도 생기고 천지만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둠을 쫓아내고 밝음이라 이름하는 빛을 만들었습니다. 이 말을 종합하면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빛이 하나님의 빛이라고 하면, 그 빛의 제일 속성 역시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물으면, 창세기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선하다고 하는 것이 뭡니까? 악한 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명을 창조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만드시는 분, 생명을 지키시는 분,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을 가리켜서 선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선한 사람, 그런 사회를 선한 사회라고 부릅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 보면 "여러분은 빛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빛의 결과는 첫 번째가 선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통해서 세계와 함께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생명을 창출하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생명이 가능하게 하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연과 숲과 환경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빛 속에 드러난 자연을 보시고,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좋다!" "참으로 선하다. 내가 선한 것처럼 인간도 선하고 이 세계도 선하다. 생명이 있음으로!"
인간과 함께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 선한 피조물과 함께 기뻐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오늘 찬송으로 찬양하고, 기도로 기리며,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만나는 분은 선하신 하나님,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시켜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빛의 첫번 열매는 선이요, 선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이것이 창조 역사의 핵심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어서 말씀합니다. 빛의 자녀 된 여러분의 두 번째 결실은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구약성서는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이지만, 그 선하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세계, 가정, 국가, 사회, 심지어 성전까지 포함하여 그 모두를 유지시켜 주는 법칙은 의입니다. 왜? 본래부터 하나님은 의로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니, 그분이 통치하는 곳에는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납니다.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심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주십니다. 예언자들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 공의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를 심어 평화를 거두라!"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는 생명이신 하나님은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칼을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듭니다. 인간이 창을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듭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생명이 움터나는 역사요, 생명의 풍요함 가운데 들어 있는 찬양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하지 않는 것, 전쟁을 막는 것, 살인하지 않는 것, 오히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미워하지 않는 것, 도리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생명의 원리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분단도 부족해서, 이렇게 자꾸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서해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사람이 죽는 일이 생겨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역사가 남북간에도 있게 해 주십시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그런 역사가 있게 해주십시오."
한반도에서도 예언자가 나온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안보만 아니라 평화도 지키고, 교류도 하면서 생명도 지켜라."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반도에서도 우리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전쟁과 죽임이 아니라, 진실한 평화 가운데에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올바른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평화, 그런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잠자는 사람들아 깨어나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미 그대들을 일으켜 세웠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미 죽은 그대들을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내지 않았느냐? 왜 아직 자고 있느냐? 왜 죽은 사람들과 함께 있느냐? 이곳에 의가 넘치는 평화의 동산을 만들어라. 깨어 일어나라. 그리스도가 부르신다."
우리는 오늘 우리를 부르는 그리스도의 음성, 그 음성을 듣고서 그리스도와 함께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생활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는 손님과 같습니다. 집안에 손님이, 때로는 나그네가 찾아옵니다. 그 찾아온 나그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묵을 방도 주십시오. 나그네에게 무관심하면, 그 나그네가 주인을 쫓아내고 안방을 차지할지도 모릅니다. 죄란 바로 이런 겁니다. 죄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여러분을 찾아올텐데, 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먹을 것을 안 주고, 사려 있게 대하지 않으면, 그 죄가 여러분을 쫓아내고 여러분의 양심의 안방을 차지하여 여러분을 죄인으로 만듭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이게 탈무드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에베소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속칭 지성인, 부자, 잘나고 힘있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에베소에서 힘있고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랬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아무 쓸모가 없고 불필요한, 썩어 문드러질 존재입니다. 육체란 영이라 이름하는 하나님의 입김을 담고 있을 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죽음을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했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이원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그 생각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있었습니다. 소위 이원론자들은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육체가 무슨 짓을 저지르던지 하나님께서는 일체 카운트하지 않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육체의 일인 성적 타락은 영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육으로 행하는 모든 폭력은 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성적 타락이 극심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횡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핵심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영육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육으로 죄를 짓되, 자유롭게 짓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원론은 결코 성서적이 아닙니다. 비록 죽으면 썩을 육체이기는 하나, 우리 육체의 건강함 속에 하나님의 입김이 여전히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는, 하늘과 땅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이런 이원론적 사고는 인간에게 부패를 초래합니다. 성서에는 그런 이원론이 없습니다. 하늘이 땅 속에 들어와서 땅의 모습을 입었으므로, 그 땅도 하늘의 땅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의는 육 속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육신으로 살고 있는 가정 속에도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산물 속에도 하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무가치한 것이라고 버리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위선자란 이런 사람입니다. 탈무드는 인간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인간 중에 가장 훌륭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남에게 선을 베풀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자기도 기꺼이 봉사하고 남도 함께 봉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자기도 베풀지 않으면서 남도 베풀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악한 사람입니다. 이 두 유형은 확연하게 달라서 구별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자신은 선을 베풀지만, 다른 사람은 선을 베풀지 말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고,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위선자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행합니다. 하늘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하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더러는 지옥에 투자하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만 구원받겠다며 스스로 신앙의 울타리를 만들고, 자기 혼자만 선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죄악으로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위선자만 되어도 그나마 다행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더러는 선을 베풀게 하고, 자신은 아예 선에서 멀어져가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탈무드]에는 명칭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스로는 선한 일을 하면서 남들은 악하여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한다면, 자기는 선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서 남보고 선행을 하도록 시키는 사람은 위악하는 사람, 위악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위선도, 위악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면,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함께 선을 행하도록 하십시오. 이웃도 함께 선을 행할 여지를 마련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 아닙니까? 독선적인 선인들만 모이는 "선별된" 사회, 그래서 근본주의 경향의 사회는 위선자들이 설치는 사회입니다. 남들에게는 선을 요구하고서 자기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저지르는 사회는 위악자들의 사회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위악자와 위선자들의 사회가 아닙니까? 차라리 선과 악으로 확연히 구분되면, 빛과 어둠으로 나눠지면 분명합니다. 그러나 빛의 모양을 가진 위선과 위악, 이거 어떻게 구별하면 좋습니까? 예수께서 거기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주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빛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빛의 세 번째 열매입니다.
예수께서는 빛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빛은 반드시 비추어야 하는데, 빛이 되기에 앞서 빛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음식물 속에 스며들어가서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썩지 않게 하는 기능이 없으면 그 소금은 밖에 버려서 발에 밟힐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장 배추를 절일 때 소금은 반드시 녹습니다. 형체가 변합니다. 그렇다고 소금이 없어지는 것 아니라는 점입니다. 형체를 유지하든지 형체를 잃어버리든지 소금은 소금으로서 남습니다.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예수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예수가 자기 몸을 희생했다고 예수 자체가 없어진 것 아닙니다. 예수는 소금처럼 십자가에서 썩지 않게 하는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소금은 녹아서 썩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썩지 않는 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빛이라고 합니다. 소금과 빛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소금이 녹아서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녹아서 생명이 된 생명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빛으로 영원한 생명을 갖습니다. 십자가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이요, 그 구원의 사건은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사건으로 승화됩니다.
촛불을 켜서 다른 초에 불을 붙인다고 처음 빛을 준 촛불의 빛이 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초가 있는 동안 촛불은 자기 광채를 내며 탑니다. 자기를 희생했다고 자기 빛이 줄어드는 것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소금이 형체가 변했다고 해서 소금의 짠맛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 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소금과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빛의 자녀 된 여러분, 선하게 사십시오. 빛의 하나님은 선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 의롭게 사십시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거두셨습니다. 빛의 자녀 된 여러분, 진실하십시오. 소금과 빛이 되신 하나님은 오늘도 진실하셔서 십자가의 진실로,  부활의 진실로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오늘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땅은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 가운데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