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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와 함께살자 / 겔 18:30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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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 함께살자


구약의 말씀: 에스겔서 18:30 ~ 32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디모데전서 1:12 ~ 17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맡은 일을 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그분을 섬기는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5:1 ~ 7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



오늘 성가대의 찬양은 어제 붉은 악마의 응원보다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의 아멘 소리는 영 신통치가 못하네요. 우리는 아마도 6월말까지는 어쩔 수 없이 월드컵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고 들어도 그 소리뿐이니 말입니다. 어젯밤 경기 보면서 어떤 느낌 가지셨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어젯밤에는 온통 가슴 조리는 경기 때문에 아마 협심증이 뭔지, 심근경색 증상이 뭔지를 경험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월드컵이 주는 여러 가지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나 선수나 할 것 없이 주어진 인생의 과정을 최후의 순간까지 아주 성실하게 밟았더니, 마지막에 큰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성에는, 일을 하다 잘 안 되면 마구 신경질 내면서 포기해 버리는 기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렇게 착실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고 여러분 놀라지 않았습니까? 매순간의 성실함,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우리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나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종말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우리는 승부차기에까지 임했고, 결국 승리를 얻었습니다. 저는 그것 하나를 다시 배웠습니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내일 모레는 6월 25일입니다. 그날은 전쟁이 시작되었던 날입니다. 그런데 또 우연히도 내일 모레 우리에게 “전쟁”을 하라고 합니다. 1차 전쟁에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침시켰고, 이제 내일 모레에는 독일의 전차군단과 맞붙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52년 전 6월 25일, 우리가 전쟁에 휘말렸던 날! 그날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야 합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우리에게 커다란 비극으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족이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고 있으며, 온 겨레가 얼마나 큰 심리적 적대감 가운데에서 살아야 했습니까? 전쟁은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 나는 일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합니다.
내일 모레에 치르는 전쟁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축구공을 통해서, 페어플레이를 통해서, 서로를 살리는 기쁨의 전쟁입니다. 죽이는 전쟁이 아닌 평화의 전쟁, 그걸 “전쟁”이라 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그 평화의 대결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스포츠를 통한 평화의 구현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배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축구 역사만 아니라, 말, 언어를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성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말은 대한민국 하나밖에 없는데, 요즘에는 “대한민국”이 아니고 “대~한민국”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식민지가 되기 전에 우리 나라의 이름은 “대한제국”이었는데, 해방되고 나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제(帝)” 자에서 “민(民)” 자로 바뀐 것인데, 그걸 또 줄여서 “한국”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아무 뜻도 없이 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는데, 요즘에 따져봤더니, 한국이라는 이름의 “한”이라는 글자는 “으뜸”을 뜻하는 한자였습니다. “제일” 혹은 “크다”라는 뜻인데, 한국이 큰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그때도 지금도 조그만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도 모자라서 그 앞에다 큰 “대” 자를 붙여 놓았습니다. 얼마나 이 나라가 작았으면 크고 또 크고 싶어했겠습니까? 저는 한번도 한국이 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대한민국도 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에 세계화시대라고 하니까 말입니다만, 우리가 “대한민국”, “한국”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이 말을 서양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Republic of Korea, ROK라고 합니다. 한국이라고 하든, 대한민국이라고 하든 어쨌든 영어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에 우리가 “대~한민국”이라고 그러죠? 이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고, 여러 외국신문들과 보도문들을 뒤져봤더니 Republic of Korea는 그대로인데, 그 앞에다가 Great 위대하다, 크다라는 말을 붙여서 보도하더라구요. 이거 좋은 말이다,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Great Republic of Korea.
과거에는 Great 안 했냐? 안 했습니다. 대~한민국 하고 인토네이션을 준 것은, 이제부터라도 위대하고 싶다, 그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냥 작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우리도 크게 살고 싶다. 우리는 닫고 살았는데 이제는 열고 크게 살고 싶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처음 시작했든지 간에, 대~한민국은 제가 보기에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고, 이제부터 우리는 크게, 위대하게 그리고 넓고 깊게 살고 싶다는 미래형 도전입니다. 이 도전은 스스로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우리 경동교회도 이제는 바뀌어야 될 것 같습니다. “경동교회” 하면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경~동교회”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다. 뭘 “경~” 해야 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위대한지는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위대한 경동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싶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는 정말 보다 크게 살게 되었으면 싶습니다.
1953년 우리가 전쟁을 겨우 임시 봉합식으로 마무리하고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에 가서 헝가리와 붙었는데, 우리 보도를 봤더니, 9:0으로 졌습니다. 전쟁 치르고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2002년, 우리는 여러 역정을 헤치고 결국 승부차기로 가긴 했습니다만, 4강으로 진입했습니다. 극과 극,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 지금 승리에 취해 있습니다.
아마 이번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조금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도 이기도록 해주시라고 기도했을 것이고, 우리도 기도했으니 말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던질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링컨 대통령이 아주 재미있는 답 하나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군과 북부군이 싸울 때, 북군의 참모가 대통령에게 와서, 하나님께 우리편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말이 “하나님을 우리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다고 그래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우리가 얻은 승리는 우리의 독단적 소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니, 그 승리를 하나님의 편에 선 저희에게 나누어 주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편이 되어서 함께 누리게 된 이 승리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니, 패배한 자를 위로해 주소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소서.” 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지식도, 우리 성공도, 우리 희망도 재산도 그 모든 것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성서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와 복은 하나님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그분 안에서 내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성실하게! 오늘 이 순간을 성실하게! 이것이 우리가 이번 월드컵 경기와 응원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는 두 가지 최후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최후 이야기를 먼저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최후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이십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주 크게 믿었기에 집단의 살림을 맡겼던 가룟 유다가 “스승님,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자, 함께 따라온 제사장들의 종들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예수를 체포합니다. 예수님이 항변합니다. “강도 잡듯 무장하고 나한테로 왔느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잡혀갔고, 가룟 유다는 배신했고,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의 최후의 시간입니다.
사도행전으로 가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최후의 인간적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 땅 마지막 왕, 아그립바 앞에서 사도 바울이 심문을 받습니다. 유대 땅은 아그립바 이후에 유대인들이 군중을 동원해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벌였다가, 로마 제국의 발굽에 밟혀서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은 전세계 산지사방으로 찢겨져 흩어집니다. 그걸로 유대의 역사가 끝납니다. 그 마지막 직전의 왕 아그립바! 그 사람은 예수를 심문했던 헤롯 왕의 조카 되는 사람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사도 바울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당신한테 선고를 받으면, 로마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고, 거기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과의 만남, 내 땅에서의 만남은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제가 마지막 할 말은 이것입니다. 왕이시여, 예언자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십시오.”
아그립바의 이야기입니다. “그대가 그 몇 마디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느냐? 가당치도 않다.”
사도 바울이 얘기합니다. “짧거나 길거나,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왕을 비롯하여 누구든지 제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고, 그 다음에 부활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오늘 포승줄로 결박당한 이 모습 말고는 저와 똑같은 복을 받게 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이 복음을 받으십시오.” 아그립바 왕은 못 받습니다. 단,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던들…” 하는 말로 오늘 얘기가 끝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땅에서 자기 나라의 마지막 왕 아그립바와 대면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마지막 장면인 것입니다.
결국 아그립바는 바울을 구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다시 끌려서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생겨났습니다. 바울의 최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는 자신들이 죽였던 사도 바울의 종교, 그가 전파했던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합니다. 기독교를 그토록 핍박했던 로마제국이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습니다. 혹시 아그립바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었더라면,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만, 아그립바가 그후의 공인된 기독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심문을 받고 죽어갑니다.
오늘 사사기에는 삼손의 마지막 장면이 나옵니다. 삼손이라고 하는 사람은 당시의 사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단일 국가로 통치하기 직전까지,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부터 왕정이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이백 년 기간 동안은 사사들이 활동했던 기간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개의 지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동맹체였는데, 이 시대가 사사시대입니다. 이 기간 동안 각 지파에 사사가 등장해서 자기 지파와 이스라엘을 이끌고 외침으로부터 지켜 주었습니다.
삼손은 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단 지파에서 유명한 사사로 등장합니다. 삼손은 요즘말로 하면, 12지파의 민병대 사령관입니다. 이 민병대 사령관들 중에는 삼손 같은 힘센 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정주부요 제사장의 아내인 드보라라는 여성이 나와서 민병대 대장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또 그런가 하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창녀에게서 난 입다라는 사람이 나와서 민병대 사령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각 지파를 도와주었습니다.
오늘 삼손은 힘이 센 자로서, 블레셋과 접경해 있는 가장 작은 단 지파 출신으로 민병대 사령관 일을 하는데, 문제는 여성 편력이 심했습니다. 세 여성들이 편력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크게 문제가 된 여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들릴라”라 이름하는 한 여성입니다. 그는 삼손의 인생에서 마지막 여성입니다. 이 여성은 미모도 출중하고, 화술도 뛰어났고 그리고 외교적 능력이 있어서 블레셋 지배층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블레셋과 결탁하여, 들릴라는 삼손을 무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드디어 삼손은 들릴라한테 배반당해서 블레셋의 감옥에 갇힙니다.
들릴라는 첩보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훌륭한 여성 첩보원 같습니다. 그에게 바보 같은 삼손이 완전히 말려듭니다. “당신 그 센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여러 가지 거짓말로 넘어가다가, 들릴라가 끈질기게 조르는 통에 삼손은 자기 힘의 원천을 알려줍니다. “내 머리카락을 자르면 나는 힘을 쓸 수 없소.” 그래서 곯아떨어진 삼손은 머리를 잘렸고, 힘이 없어진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두 눈을 뽑고, 놋사슬로 묶어 연자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민병대 사령관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삼손의 마지막 날,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 곡식의 신인 다곤 신을 모신 신전에 큰 제사를 드리려고 모였습니다. 신전에는 블레셋의 모든 지도자들과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옥상에도 삼천 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두 눈을 뽑힌 삼손의 광대극을 보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삼손이 여기서 마지막으로 간구합니다. “주 야웨여, 이번 한번만 강하게 힘을 주옵소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해 주십시오.”
삼손의 집안 사람들, 단 지파 사람들은, 이방 블레셋 여자랑 놀아난 삼손, 거기서 엄청난 죄를 지은 삼손, 이 삼손의 이름을 지파에서 지웠습니다. 이제 삼손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삼손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신전 주요 기둥 두 개를 두 팔로 밀어내어 신전을 무너뜨린 결과, 위에 있던 삼천 명도 죽고, 아래 있던 관료들이나 지도자 모두가 죽었는데, 성서 표현대로 하면 그때 죽인 수가 살아서 죽였던 수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자 삼손을 명부에서 제했던 그 친척들이 삼손을 복권시키고 블레셋에 가서 삼손의 시신을 모셔다가 삼손의 아버지 묘소에 합장했습니다.
예수가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한 것처럼, 삼손은 들릴라에게 배반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치욕의 자리에서 결단합니다. “제 죄를 이 죽음으로 대신합니다. 제 죽음으로 우리 민족의 희망을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뜻도 이 죽음을 통해 다시 세우소서.” 하고 기둥을 밀어내고 그 속에서 적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자기를 내던진 삼손의 죽음을 통해서 블레셋 나라가 붕괴합니다. 블레셋은 다곤 신전이 무너지면서 모든 지도자가 함께 죽어서 권력의 공백 상태가 되어 붕괴했다고 합니다. 오늘 죄를 지은 삼손은 죄인이지만 마지막 순간 민족에 봉사합니다. 자기 자신을 민족의 원수들과 함께 묻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삼손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복권시켜 줍니다. 이게 삼손의 마지막 순간들입니다.
얼마 전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적에, 부산의 UN군 묘지에서 영국군이 묻혀 있는 묘역을 참배했던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6. 25 때가 되든지, 외국 원수가 우리 나라에 오든지 하면, 항상 소위 무명 용사 묘지에 헌화하는 장면을 봅니다. 무명용사, 죽었지만 이름이 없는 군인, unknown soldier! 근데 부산에 있는 UN 묘지에 묻힌 영국군 묘역 앞에는 이런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unknown soldier but known to God." 우리는 이름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는 무명용사! 우리 인간에게는 무명, 그러나 하나님한테는 유명! 이분들이 평화를 지켰습니다. 삼손의 주검을 가져다가 아버지 무덤에 묻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묘역에 썼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사 삼손 여기에 잠들다.”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지금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름이 남은 사람도 있고, 이름 없이 죽어 가는 희생자들도 많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고 사라져 갔습니다. 그들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평화의 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붉은 악마가 외치듯이, 우리도 위대하고 싶습니다. 위대함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곤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권력은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속속들이 부패했지 않습니까? 권력이라 이름하는 다곤 신의 신전에 우리의 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도덕은 위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부패라 이름하는 다곤 신을 무너뜨린 다음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로는 신앙이었지만, 실제로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신앙이었습니까? 혹시 그것이 우상과 가까운 신앙이었으면, 삼손과 함께 무너뜨리고, 살아 계신 의로우신 하나님과 함께 다시 건설하십시오. 나라도, 가정도, 교회까지도, 각자 가슴까지도 그것이 다곤 신의 신전이라면 전부 다 무너뜨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 다시 세우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새로운 나라가 생깁니다. 대인(大人)들이 생겨납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일어설 확신 있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이 함께 나누려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관여하시려고 합니다.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넘쳐나야 합니다.

오늘 삼손은 죽음으로 민족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 앉은 여러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들불처럼 퍼져나가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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