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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존 하시는 하나님 / 신 7:7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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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존 하시는 하나님 / 신 7:7 ~ 11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주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신다. 주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6:6 ~ 11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 한 번만 죽으신 것이요, 그가 지금 살아 계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14:43 ~ 50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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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우리에게 가슴 벅찬 기쁨을 준 것 하나는 월드컵 경기입니다. 월드컵 경기가 끝나가면서, 우리에게는 즐거운 과제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 과제란 한국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경동교회 이미지는 무엇인가도 물을 수 있습니다.
엊그제 제 아파트 지역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유치원 다닐 만한 나이의 꼬마 아이들이 조그만 공을 가지고 축구를 하는데, 자기들끼리, 이제 겨우 말 배운 아이들끼리 하는 말이, “너는 브라질 해라, 나는 코리아다.” “너는 터키다. 너는 독일이다.” 다른 아이 하나가 “너는 스페인 해라”라고 하니까, “그건 져서 안돼!” 합니다. 이제 말을 시작한 아이들이, 터키가 어디에 있고 브라질이 어디에 있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 머리에도 이미 브라질, 터키, 독일, 한국이 각인된 것입니다. 브라질이나 독일에서 무슨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나라들 이름 자체가 아이들 머리 속에 박혀 있습니다.
그 동안 나라마다 상품을 만들어 팔 때 고유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습니다. 일본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뭡니까? 개인적인 고백입니다만, 옛날에 라디오를 사거나 TV를 살 때, 하이파이 제품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이파이(Hifi)는 HighFidelity의 준말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일본 제품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계는 스위스 제를 선호하는데, 스위스 시계는 정확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정밀! 독일제 기계는 튼튼해서 나중에는 망가지지 않아서 큰일일 정도입니다. 튼튼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하면 감성과 열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이미지는 뭡니까? 우리에게 이미지가 있습니까? 요즘에 마땅한 이미지를 찾는 노력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미지가 딱 떠올라야, 그 이미지에 맞게 브랜드를 만들어서 상품도 팔고 수출도 할텐데…. 이제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는 왔으니, 이제는 한국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이미지를 만들자!
어제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의 이미지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졌습니다만, 상대인 터키와의 3, 4위전 경기를 보면서 사람들 이야기가, “이기면 좋겠지만 져도 좋다. 왜냐? 터키는 6.25 때 참전해 준 우리 혈맹이니까! 싸워서 져도 좋다.” 실제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터키가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50년 전에 파병해 준 것을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기억하고서, 비록 축구경기이기는 하지만, 혈맹간의 축제가 되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터키 사회에 각인된 코리아의 이미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지든 이기든 간에, 옛날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감사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 신세대의, 아니 우리 전부의 성숙도가 여기에까지 이르렀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전에, 하필이면 6.25 때 참전해 준 혈맹과 축구경기를 하는 아침에, 혈맹보다 더 가까운 혈족간에 작은 “축제” 하나가 벌어졌습니다. 공 가지고 하는 평화의 축제가 아니라, 총을 가지고 하는 죽음의 축제입니다.
연평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혈족간의 이 축제는 우리가 바라야 할 축제입니까? 왜 하필 그날입니까? 혹시 이 일에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대한 시샘이 작용한 것인지, 혹시 어느 언론의 보도처럼 우발적인 사건인지, 또는 계획된 전략의 일환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하필 생명을 지향하는, 미래를 지향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을 때, 과거 지향적이고, 분단의 아픔을 재확인하는 축제가 벌어지게 된 것에 비애를 느낍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국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월드컵 기간에 형성한 미래 지향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여전히 분단과 대결의 이미지가 세계인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꺼림칙합니다. 계속 이렇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앞날에는 항상 이렇게 걸림돌이 있습니까? 교전이 있었다고 놀랄 우리도 아니지만,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극복해야 할 걸림돌임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도 하늘나라의 축제를 벌이는가 하면, 동시에 이와 비슷한 걸림돌의 역할을 매일처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죄책 고백기도를 드리고 중보의 기도도 드립니다.
이 나라의 이미지를 다시 만드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미지 없이는 기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지 문제는 상품 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지가 어떠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출발부터 있었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창조 때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창세기 보고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형상”이라는 말이 이미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따라서 인간을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하면 생각나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그러면 눈에 그려지는 게 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할 때 내 가슴에 가장 아픈 그 무엇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기쁜 그 무엇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라틴말로는 “이마고 데이(imago Dei)”라고 합니다. 이마고 데이가 우리말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매는 권세를 가졌다. 이 권세로 너희에게 명하나니, 가서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하나님의 말씀도 가르치고 제자로 삼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모든 말씀을 지키게 하여라.” 아버지는 뭐고 아들은 뭐며 성령은 뭡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이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는 뭡니까? “아들”의 이미지는 뭡니까? 또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이신 “성령”, 그분의 이미지는 뭡니까?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이끄신 야웨 하나님, 그분의 이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오늘 신명기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특별히 빼어난 점이 있어서도 아니라, 그냥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민에게 하나님이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아모스도 마찬가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공의가, 정의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하나님,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마고가 이스라엘의 이마고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법이 십계명이라 이름하는 법입니다. 그것을 중간에 놓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심으로써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공의의 기본적인 실현 대상은 네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가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는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과부! 과부는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돌보아 주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습니다. 셋째는 가난한 자! 물론 가난하면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생존을 위협당합니다. 넷째는 나그네! 최소한의 법적, 종교적 신분도 보장받을 수 없어 그냥 밟히는 외국인들입니다. 이 네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과 영적 양식을 같이 먹여 줄 수 있는 공의, 그 최소한의 공의가 지켜지는 사회, 그것을 공의로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은 눈으로 갚아라. 귀는 귀로 갚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 원칙은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인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의를 지키려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한테 백만 원을 빚졌으면, 최소한 백만 원은 갚아 주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심리적 부담을 안겼으면, 그만큼의 부담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하면 더욱 좋지만, 최소한 이건 하라는 뜻입니다. 그 이상은 우리에게 맡겨진 자율적 결단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못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위반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심판받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눈은 눈으로”라는 율법의 원칙을 비판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눈은 눈으로”라는 원칙만이라도 지켜진다면, 이 사회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잘못을 범해 놓고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지도자가 “나는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합니까? 법정에 나가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남의 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만큼의 잘못을 인정하면 좋을텐데, 그렇게 하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율법을 욕하기 이전에, 율법의 기본 정신이라도 따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 죄악을 범합니다. 죄악을 범해서 구약시대에 가지고 있던 아버지 하나님의 이미지, 정의는, 공의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불행에 빠질 때, 이스라엘 때문에 이방 족속들이 불행에 빠질 때, 하나님은 이제 온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또 다른 이미지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께서 등장하시는 장면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사 자기 아들 독생자를 보내주셨으니,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선민으로 뽑은 것처럼, 오늘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 온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셔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이미지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는, 인간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아들의 이미지로 구현됩니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약에서 보여주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이미지는 정의로운 하나님!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아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는 사랑!
그 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자기 몸을 바쳐서 희생적으로 사랑합니다. 시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가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 엄청난 찬양을 통하여 그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사랑이 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하늘과 땅을 매는 권세를 가졌다. 이 권세를 가진 자로서 명하나니, 가라, 가서 전파하라. 공의를 전파하여라. 사랑을 실천하여라. 그러나 혼자 보내지 않겠다. 내가 성령을 함께 보낼 것이다.”
성령이 누굽니까? 성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성령은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공의는, 율법적 공의까지를 포함하여, 근본적으로, 아니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한, 공의는 살리는 공의입니다. 심판해서 죽이고, 뭘 잘라내는 공의가 아니라, 죄인까지도 용서하여 새사람으로 바꾸어 영원한 생명, 구원의 영역으로 이끌어주시는 살리는 공의, 생명의 정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삼위일체적 공의입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달리신 십자가, 그 십자가에 영원한 생명을 일으키는 생명의 영이 함께하시자 부활이 생겨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으로 이끄는 공의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공의와 사랑과 생명이 합하여 심포니가 되면, 그분은 그속에 항상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항상 계심, 항존(恒存), 우리가 바라는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온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만이 아니고 내일에도 함께 계시겠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계시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 잠깐 쉬었다 오십시오. 제가 악을 조금 행해서라도 인생을 즐기고 싶은데, 하나님이 항상 계시면 제가 즐기지 못하지 않습니까?” “독재를 해서라도 힘을 확인하고 싶은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독재를 합니까?” “착취해서 많이 갖고 싶은데,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착취를 합니까? 하나님, 이 더운 여름에 잠깐 바캉스 좀 하고 오시지 않겠습니까?” 할 사람도 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항상 계시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잠깐 휴가를 즐기셨으면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병들어 아파 누웠을 때, 한계에 봉착해서 어쩔 수 없을 때, 우리가 너무나 타락하여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셔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품을 수출한다고 할 때, 상품의 이미지, 상품의 브랜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상품의 질이 브랜드만큼 믿을 수 있어야 판매에 성공하는 것이지, 저질의 상품이라도 브랜드의 인지도만 있으면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질 상품을 수출하면 브랜드조차 망가지게 됩니다. 다시는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가짜 상표를 붙이거나, 진짜 상표를 붙였지만 내용이 부실한 것, 이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우리가, 새로운 브랜드를 붙인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 브랜드의 명성을 떨어뜨린다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망가뜨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뭐하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차라리 내 이미지를 벗어버려라. 나는 너를 내 이미지로 창조했지만, 이제 내 이미지를 거두어 가겠다. 나를 떠나라. 나한테 휴가를 요청하지 말고 나를 아예 떠나라. 그리고 멸망해라. 어떻게 하여 내 이름을 내건 교회가, 내 이름으로 사는 신자가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느냐? 내 이름만은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같이 계실 것입니다. 단,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항상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 속에, 양보의 고난 속에, 아픔의 고난 속에, 죽음의 고난 속에, 죄를 사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함께 있겠다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 정의와 사랑과 생명의 영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끄시며, 또한 고난의 복판에서 살아가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그 은혜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한 가지를 결단하십시다. 내 이름이 더러워지는 것은 내 책임이지만, 하나님의 이름만은, 하나님의 “이마고”만은 범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가시면,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면 산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고 따르는 자는 손해보는 것 같지만, 괴로운 것 같지만, 죽는 것 같지만, 내가 영원한 생명으로 그와 항상 함께 있는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복된 약속을 여러분이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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