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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열쇠로 풀라 / 창 11:1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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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열쇠로 풀라

구약의 말씀: 창세기 11:1 ~ 19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4:11 ~ 15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 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6:13 ~ 19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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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는 아마 월드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월드컵은 단순히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키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1998년에 프랑스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렸는데, 프랑스는 월드컵 유치 국가이면서 월드컵 경기에서 우승까지 했습니다. 요즘의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는 프랑스가 어떻게 했기에 개최국도 되고 우승도 했는지에 관해 많은 연구가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권인혁 집사님은 프랑스 대사였기 때문에 그 상황을 현지에서 더 잘 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들은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 국민이 낙천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아도 상당히 낙천적인 국민인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그 사람들 말로는 Joie de Vibre "인생을 즐기자."는 것입니다. 삶의 기쁨, 삶의 축제, 이것이 프랑스 사람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 같습니다. 이렇게 낙천적이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1998년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월드컵 때에 최대한 인생을 즐기고 삶의 기쁨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이게 자기들의 월드컵 준비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프랑스 정신의 발현입니다.
여러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우승이었습니다. 우승을 해서 기뻤고, 인생을 모두가 다 즐길 수 있으니 기뻤습니다. 물론, 다 이루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만, 프랑스에 월드컵 축제의 가장 큼 기쁨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축구선수단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스 축구팀은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옛날부터 아프리카나 남미, 중미 쪽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온 사람들이 지금 프랑스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 전체에 기쁨을 가져다준 축구팀도 순수 백인 프랑스인은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아프리카의 알지에에서부터 시작해서 중미 카리브해에 있는 마리트니크 섬 출신의 사람들까지의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 가리지 않고, 무슨 인종이든지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로 자존심 높은 프랑스 축구팀을 형성하고서, 그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더불어 인생을 사는 즐거움을 극대화한 결과가 우승으로 나타났습니다. 단일 민족, 단일 문화가 아니라, 여러 색깔, 여러 언어, 여러 문화, 여러 민족을, 용광로처럼 융합하여 다문화적으로 팀을 이루었더니, 인생의 축제, 인종의 축제, 문화의 축제가 되었고, 월드컵 대성공의 기쁨까지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370억 명이 TV를 시청했다고 합니다. 서울대회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리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우리는 합하여 선을 이루었다. 생은 즐겁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교훈을 한국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까?
축구경기뿐만 아니라, 음악이며 춤이며 노래며 모든 것이 나라마다 다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축구를 탱고처럼 한다. 또 브라질은 삼바 춤처럼 한다. 이태리식 축구는 오페라식 축구이고, 독일식 축구는 콘서트식 축구이다."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노래와 춤과 운동은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축구는 어떨까 하고 생각하다가, 한국은 아리랑식 축구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랑 축구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사람이어서 아리랑이라는 말을 이해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축구가 되었든지 간에, 축구 골 하나 넣는 것이 수많은 사람을 슬픔에서 기쁨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볼이 갖고 있는 위력입니다. 프랑스 팀의 경우 식민지 출신 사람들이 다양하게 섞였는데, 물론 극우파들은 프랑스 팀이 아니라고 욕을 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가난한 지역 출신 선수, 소외된 계층 출신 선수, 이전에 식민지였던 보잘것없는 나라 출신 선수들이 힘있는 민족 선수들과 함께 모여서 볼을 찼더니, 우승을 얻게 되고, 370억 인구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놓게 되었습니다. 체증도 다 없애주고, 울던 울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꿔주게 되었습니다.
그들 축구 선수를 보고 우리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덴티티, 당신의 정체성이 뭡니까? 이 축구선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전에는 가난한 집 출신, 배우지 못한 가정 출신, 식민지 출신, 백인이 아닌 흑인이었으나, 그러나 지금 나는 월드컵 출신입니다. 월드컵 출신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축구도 인간에게 기쁨을 선사합니다. 볼 하나, 아무것도 아닌 볼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기쁨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월드컵을 계기로 삼고서 또 다른 기쁨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수억 명, 수십 억 명, 수백 억 명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월드피플컵(world-people-cup)의 주인이십니다. 생명 컵의 주인이십니다. 오늘 그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생을 즐겨 보십시다. 어떻게 살면 인생이 즐겁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날 보고 누구라고 하더냐? 출신 성분이 뭐라고 하더냐?"
"사람들이 선생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또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혹은 제사장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예수님의 아이덴티티(identity)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는 예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 얘기고, 너희들은 나를 뭐라고 하느냐?"
"내가 누구 같으냐?"
"내가 어디 출신 같으냐?"
"뭐하는 사람 같으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변해서 대답하는 말이 이겁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하늘 출신,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 뭐하러 오셨느냐고 물으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그리스도, 그것이 예수님의 아이덴티티입니다. 그분의 정체성(正體性)입니다. 예수께서는 굉장히 기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제서야 비로소 나의 정체를 새롭게 아는구나 싶었습니다. 인간들의 가정 배경, 문화 배경, 직장 배경, 전통, 신분질서, 국가, 종교 이 모든 것을 다 초월하여,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원자이라는 고백입니다. 그걸로 족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나의 정체성은 그대의 지혜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 하나를 전해주겠다. 이제 그대를 내가 반석으로 삼아 새로운 집을 지을텐데, 그 집을 교회라 이름하여라. 그 집에 오는 사람은 나와 함께 기쁨의 축제를 매일같이 맛보도록 하겠다."
오늘 경동교회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이 집은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집으로 바뀝니다. 오늘 그런 신앙고백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 창세기 11장에 보면 재미있는 설화 하나가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이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발랄, 곧 흩어지게 하다, 혼잡스럽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가 발벨로 바뀌고, 거기에 엘 자가 없어져서 바벨로 바뀌었습니다. 언어학자들의 분석입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를 경험한 후대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를 모아서 강력한 세계적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홍수 재난을 막고 싶었고, 인간의 멋진 문화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강력한 국가, 강력한 문화, 강력한 홍수 대책을 세우자! 그 상징으로서 탑을 쌓기로 했습니다. 보통 이스라엘에서는 탑을 쌓을 때 바위를 갈아서 만든 가루와 흙을 반죽해서 벽돌로 만들어 탑을 쌓았는데, 일조 조건이 좋을 경우에는 진흙과 돌가루를 이겨서 벽돌을 만들어 햇빛에 말려서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벽돌을 햇빛에 말리지 말고 불에 굽습니다. 그리고 불에 구운 벽돌에다가 각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자기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이름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 쓴 벽돌을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라가면서 하늘에 맞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자고 합니다. 그래서 쌓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 하나는 벽돌과 벽돌 사이를 접착시켜야 하는데, 성서는 그 접착제가 "역청"이라고 합니다. 이 역청이라는 것이 뭔가 하고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번역한 70인 역을 살펴봤더니, 역청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아스팔트를 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 당시에 불에 구운 벽돌을 아스팔트로 강력하게 접착시켜서 바벨탑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벽돌마다에 각자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탑을 쌓는 당시 사람들은 모두 언어도 하나, 민족도 하나, 색깔도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쌓은 탑이 하늘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굉장히 높은 탑을 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나는 인간들이 쌓은 이 탑을 허물어야 하겠다. 말이 같아서 이런 일을 하니, 언어를 혼란스럽게 해야겠다. 문화 속에 불을 질러서 문화를 완전히 혼란스럽게 해야 하겠다. 왜 그러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함께하기로 했는데, 인간은 지금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 잠깐 나가 주십시오. 우리끼리도 살 수 있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공간 밖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싹튼 것을 오만과 교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은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 인간과 항상 어디서든지 꼭 함께 계시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존방식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분은 어떻게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까? 바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홀로 영원히 사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삽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그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과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언어를 뒤섞어서 인간을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
한 번 뒤섞인 언어, 그것이 회복된 것은 상당히 오랜 후의 일이었습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제자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헬라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서로 말이 달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문화 배경도 달랐습니다. 출신 성분도 달랐습니다.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는데, 주의 성령이 불의 혀 같이 임하자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모두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밀어내면 그곳에는 흩어짐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는 공간은 무너지는 공간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금 새겨보아야 합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너희와 함께하는 자리가 파괴되고 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장소를 구했는데, 오늘 베드로 네가 말한 바로 그 고백을 내가 반석으로 삼고 그 고백 위에 너희와 내가 함께 있을 교회를 세우리라."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 경동교회가 언제 세워졌느냐 하면, 56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바벨탑이 무너진 그때부터 하나님은 경동교회를 세우고 싶어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세우고 싶어 하셨겠습니까? 바벨탑이 세워졌던 시날의 그 평지가 아니라,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반석 위에다가 경동교회를 세우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속하는 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삽니다. 이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생을 즐기자.
오늘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제부터 특권이 주어진다. 하나님을 즐겨라."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목적어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즐겁게 놀아라.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즐기기 때문에 그대들도 하나님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인생(人生) 속에 신생(神生)이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슬픈 울음 속에 하나님의 울음이 있습니다. 성가대의 찬양과 우리의 찬송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음악 속에 신의 음악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바로 이런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바벨탑에는 하나님이, 그분의 음성이, 그분의 말씀이 싶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오만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만은 인간들 사이의 대화를 막습니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단절시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싶은 곳, 그곳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를 즐기시고, 우리더러 당신을 즐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즐겨라. 나도 그대들을 즐기노라." 프랑스 인들이 인생을 즐기듯이, 우리 신앙인들도 인생을 즐깁시다. 신앙인들이 인생을 즐기는 것은 바로 신생을 즐기는 것이기도 합시다. 오늘 여러분, 하나님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즐기는 걸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함께 계시면 그곳에는 가난이 그치고 풍요가 옵니다. 왜? 하나님은 절대로 굶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자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더 이상 목마름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목마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눈 먼 자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눈이 뜨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영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소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갇힌 자에게는 해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묶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에게는 치유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전함을 회복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는 부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는,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곤경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가 살펴보십시오. 부정으로 얼룩진 이 사회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찾아보십시오. 혹시나 하나님은 아니 계시고 인간의 오만만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인간의 오만만 있다면, 그런 곳에서는 인생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어떻게 인생이 즐거울 수 있습니까? 인생이 진실로 즐겁기 위해서는 인생 가운데 신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재판정은 살인의 물증이 있어야 살인죄를 확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물증이 없어도 심판합니다. 성서는 살인하겠다는 마음만 먹어도 살인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법정에서는 간음의 증거가 있어야 처벌하지만, 하나님의 재판정에서는 간음하려는 마음만 먹어도 간음죄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물증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심중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싶어하십니다. 인생을 진실로 즐기고, 삶을 즐기려고 생각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핵심 속에 하나님이 열쇠를 가지고 임재하고자 합니다. 그 하나님 열쇠를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여십시오. 그러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기쁨은 죽음도 감히 엄습하지 못한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그분의 함께하심의 은총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신생과 함께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를 보장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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