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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그리스도를 모신 가정 / 신 6:4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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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6:1 ~ 4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한 약속입니다.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9:13 ~ 15
그 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거기에서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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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교회력으로 보면 5월 둘째 주, 어버이 주일입니다. 이 날은 원래 어머니주일이었습니다만, 1974년에 우리 나라에서 5월 8일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뀌면서, 교회에서도 이 주일을 어머니주일에서 어버이주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오늘 주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역사책을 좀 살펴보았더니, 어머니주일, 어머니날이라는 게 미국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조그마한 시골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웹스터"라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서 26년 동안을 주일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쟈비스"라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한테서 배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고맙고 또한 슬프기도 해서, 쟈비스 선생님을 위한 기념 추도식을 마련한 것이 어머니날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추모식은 버지니아주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따님 "안나"를 초청해서 평소에 쟈비스 할머님이 가정에서 어머니로서 어떻게 하셨는지 얘기를 듣고, 또 제자들은 쟈비스 선생님이 교회학교 교사로서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이야기하며, 그분을 기리는 행사였습니다. 딸 안나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항상 십계명의 제5계명을 일고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저는 그 가르침 위에서 오늘까지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고서 안나는 어머니가 베푸신 사랑을 기리면서, 하얀 카네이션 한 송이를 추도식 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어머니를 기리는 운동이 버지니아주에서 시작해서 동부 쪽으로 번져나갔고, 급기야는 미국의 국회가 1914년, 쟈비스 부인의 추도식이 열렸던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주일"로 정하는 결의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물론 미국 선교사들이 어머니날 전통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교회사의 기록을 보면, 1930년 6월 15일, 구세군의 "가정단"이라는 단체에서 어머니주일을 지키기로 결의했습니다. 구세군에서 먼저 어머니주일 행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제에서 해방 된 이후 1960년부터 모든 교회가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 보면 1955년부터 어머니날이 지켜졌는데,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확정한 것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 박사였다고 합니다. 이분이 5월 8일을 어머니 주일로 선포했는데, 마침 그때 5월 둘째 주일이 5월 8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5월 8일이 어머니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부터 이 날이 "어버이날"로 확대 개칭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날의 역사입니다. 일년 중에 이 날만 어버이주일이 될 수 없고, 일년 열두 달 내내, 365일 내내 어머니주일, 어버이주일, 어린이주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고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교육헌장 하나를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이 바로 이스라엘의 어린이 교육 헌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부모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헌장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께서 들으신 대로 이 헌장의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명령이자 교육 장전(章典)입니다. 이 장전은, "이 말씀은 모세처럼 돌판에 새기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놓고, 집에 있을 때나 길을 나설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밖에 나갈 때에는 손에 팔찌처럼 묶어 가지고 다니고, 이마에 붙여서 기호로도 삼고, 집 문설주에도 발라놓고, 대문에도 써 붙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글을 읽을 때가 되면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율법을 해설한 책을 읽게 하는데, 이 책이 탈무드라는 책입니다. 이 탈무드는 당시 법이요 또 신앙법전이요 신학 책이었기 때문에, 탈무드는 오늘날로 치면 마치 성서와 우리 육법전서를 합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글읽기를 시작하면, 매일매일 탈무드를 한 장씩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읽게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아이들이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한들 딱딱한 탈무드 좋아할 아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굉장히 딱딱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교훈집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부모는 그날 읽을 탈무드 페이지에다가 꿀을 발라놓고, 아이가 꿀맛을 보면서 책을 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탈무드를 읽으면 영적인 꿀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쨌든 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탈무드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 한 분뿐이니, 맘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교육 장전은 뭡니까? 신명기의 이 장전을 이어받으면 그대로 이상적인 우리의 교육 선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교육해야 합니까?
구약성서 말씀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밖에 나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교육 장전에는 이 임마누엘 신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자신들과 항상 함께 계셔서 몸과 마음과 뜻을 북돋우시니, 항상 함께 계시는 그 하나님을 그들도 항상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자신들을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만남을 여러분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항상 반복해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이 부모 사랑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신학적인 본질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거부한다고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반응 여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 방식대로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낳아서 길러 보았거나, 기르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한테 한번 물어 보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어린이들의 대답은 "아버지 같은 분이에요."입니다. "사랑이 너무나 많으신 하나님은 누구시냐?" "사랑이 넘쳐나는 하나님은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세요."라고 답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이한테는 하나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살고,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먹고사는 어린아이가 그릴 수 있는 최고의 언어는, 최대의 경험은, 최고의 세계는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절대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문 부호 하나 없이 믿을 수 있는 어머니 아버지 말고 어디에서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린이에게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는 자기 안에 계신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지 자기 말을 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긴 사람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젖을 통해, 아버지의 훈계를 통해 자식에게 전해줍니다.
자식은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몸으로 표현합니다.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에게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자식을 우리의 감정이나 염원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제발 부모의 감정을, 분노, 좌절, 희망을 쏟아 붓는 쓰레기통으로 삼지 마십시오."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쏟아놓고 싶은 감정은 다른 데 버리십시오. 자식이 쓰레기통입니까? 자식이 휴지통입니까? 아닙니다. 자식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이 담겨져야 하고,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의 대변자인데, 그들 속에다가 여러분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 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식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야 합니다.
또 내 자녀를 남의 자녀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내 자식은 그 자체로서 특수한 인격입니다. 왜 모든 인간이 똑같아야 합니까? 왜 지식을 비교합니까? 왜 생긴 걸 비교합니까? 내 자식의 생김새, 능력, 습성, 그것은 그것 자체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부모들은 자꾸 비교합니다. 상대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거기다가 자기 감정의 휴지통으로도 만들고, 자기가 못 이룬 희망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려고 합니다. 자식이 자기 희망의 대리자입니까? 자식이 도구입니까? 자식은 하나님이 임마누엘하시는 한 생명, 특수한 생명, 일반화될 수 없는 아주 귀하고 독특한 생명체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고 싶으면, 자식의 얼굴을 보면 됩니다. 사람들 말대로,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내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가르치는 사랑과 내가 가르치는 지혜가 자식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알고 싶으면 내 자식을 보십시오.
자식 된 우리가 자기를 알고 싶으면 부모의 얼굴을 보면 됩니다. 부모님은 자식들 인생의 교과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거울과 교과서, 이 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함수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구약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부모와 자식의 대화를 이끌어주는 광장입니다. 그러니 임마누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자식과 부모 사이를 사랑으로 이어가십시오. 하나님은 자식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자식된 예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가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임마누엘하시듯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임마누엘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함께 계셨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고 절규할 때에도 고통으로 함께 계셨고, 피 흘릴 때에도 함께 피 흘리고 계셨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도, 부활할 때에도 예수와 함께 계셨습니다. 언제는 계시고, 언제는 안 계시는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항상성, 그것은 인간의 선택의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남을 아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마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일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아십니까? 비결을 하나 말씀드린다면, 자식의 얼굴에 투영된 자기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노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을 아는 것은 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 지(知) 자를 썼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무엇이냐? 노자는 밝을 명(明) 자를 썼습니다. 해 일자와 달 월자로 이루어진 그 글자를 말입니다. 지식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밝음입니다. 남을 알면 지식이 쌓이지만, 자기 자신을 알면 인생이 밝아집니다.
아마 예수님이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남을 아는 지식은 전지하신 하나님이 주신 이성의 은사요, 자기를 아는 알아서 스스로 밝은 등불이 되는 것은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의 교육장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마음속에 새긴 이 장전이 오늘 밝은 해와 달이 됨으로써, 밝히 비추는 밝을 명(明) 자가 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압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내 속에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의 발견,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발견입니다.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그 신앙의 깊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제가 어느 책 하나를 읽었습니다. 저자는 불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제목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철수라는 사람입니다. 철수는 자라서 이제 글도 읽고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철수를 낳아준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습니다. 철수를 공부시키느라고, 벙어리 된 사람들이 의사를 소통하는 소위 수화도 배우지 못한 어머니! 철수는 어머니한테 수화 공부를 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비 하나를 잡아다가 나비의 모습을 어머니한테 보이면서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하늘을 가리키는 수화를 알려드렸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소를 보고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방을 보고 집을 보고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철수 어머니는 수화를 잘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철수는 어머니 가슴속에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을 수화로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물건이 아니어서 눈으로 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사랑을 표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수는 그냥 어머니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수화를 배우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그 울음이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사랑의 표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철수를 붙들고 함께 울어 버렸습니다.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사랑은 울어 버리는 것, 둘이 하나 되어 우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말이, 수화가 필요 없습니다. 한참 울다가 어머니와 철수는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기뻐서 파안대소하고 웃었습니다. 이것도 수화를 넘어선 수화입니다.
부모 된 우리는 자식과 끌어안고 울면서 사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까? 한참을 울다가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세대차, 많습니다만, 그 모든 것 이전에 함께 울고, 그 하나 된 눈물 위에서 파안대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이 너무나 당신의 사랑을 몰라주므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그렇게도 몰라주므로, 예언자를 보내도 모르고, 제사장을 보내도 모르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 자식을 보냈습니다. 그리고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몰라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 안타까워서 자식 예수와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날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자식의 몸이 창에 찔렸습니다. 피가 흘렀습니다.
십자가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자식 예수가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부둥켜안고 엉엉 운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바로 아들과 함께 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울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삼일이 지난 아침, 태양이 반짝이기 직전 하나님과 예수는 함께 함박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고 새 생명이 태동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 예수에게 어린이 하나가 오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막았습니다. 축복은 성인들이 받는 것이지 어린이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나에게 온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아이는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어머니가 하나님이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다라고 순진하게 말하는 사람, 부모에게서 절대적인 하나님을 보는 사람, 그래서 의문부호를 달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그냥 받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욕망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왜? 우리와 임마누엘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따로, 내 감정 따로, 그것은 자주성의 붕괴, 자신의 삶의 붕괴입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변화, 가슴의 변화, 인생의 변화, 삶의 변화, 그것은 어린이 같은 사람만이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 나라 차지하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끌어안고 우십시다. 그리고 밝은 함박웃음을 터뜨려 보십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한번도 존대어로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성인들이 뭔가 체면을 차리면서 부르는 아버지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람말로 "아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말로 하면 그냥 "아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한테 어린아이처럼 "아빠"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 하나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아빠! 우리가 인생의 격조와 체면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울고 함께 함박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주시는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는,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딸려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또한 이런 어린이를 "나한테 데려 오라. 내가 복 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아빠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여러분을 향해서 아빠, 엄마라고 부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신 임마누엘 하나님과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된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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