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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쓰실 그릇 / 욘 2:6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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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쓰실 그릇

구약의 말씀: 요나서 2:6 ~ 10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내 목숨이 힘없이 꺼져 갈 때에, 내가 주님을 기억하였더니, 나의 기도가 주께 이르렀으며, 주님 계신 성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주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뭍에다가 뱉어 냈다.

서신서의 말씀: 디모데후서 2:20 ~ 25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가 말한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귀하고 성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멀리하십시오. 그대가 아는 대로, 거기에서 싸움이 생깁니다.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잘 가르치고,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1:9 ~ 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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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신서 본문, 디모데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쓰기를 원하셔서 택한 그릇들의 종류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고, 사기그릇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릇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택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그릇이 갖추어야 할 덕목 네 가지를 적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의(義)의 그릇이어야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그릇이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셋째, 사랑의 그릇을 쓰십니다. 넷째 평화의 그릇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는 다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그릇들입니다. 이 그릇들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야 합니다. 하늘이 담겨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본문의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뜻은 이 그릇들을 통하여 이 세상을 평화의 나라로, 평화의 가정으로, 평화의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십니다. 제자로 택하고, 사도로 택하고, 동역자로 택하고, 사역자로 택하고, 그릇으로 택합니다. 그렇게 택하실 때 택함 받는 일이나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리게 됩니다만, 공통적으로 쓰이는 호칭 가운데 하나로 동역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그릇으로 택하시면, 택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파트너가 됩니다.
이 동역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동역자라는 말은 성서 원문에는 헬라어로 “쉬네르고스”입니다. 복수로 쓰면 “쉬네르고이”가 됩니다. 이 말에서 요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너지 효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경쟁하던 두 회사가 합병을 하게 되면, 하나 더하기 하나 이상의 효과, 둘을 합한 것 이상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큰 효과가 납니다. 그 효과를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쉬네르고스란 바로 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동역자라는 말에 담긴 뜻이 아주 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면, 하나님과 내가 합친 그만큼의 효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둘이 합친 것보다 월등한, 전혀 예상치 못한 기적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그런 효과를 만들어 낼 파트너로, 쉬네르고스로 여러분들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시너지 효과는 단순 계산을 넘어 예상한 것의 열 배가 될 수도 있고, 삼십 배가 될 수도 있고, 백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은 택하신 하나님과, 택함 받은 우리 쉬네르고스의 상호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는 방법, 시간, 종류, 이런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선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일단 택함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쉬네르고스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 효과가 없으면 우리 신앙은 나태하고 죽은 신앙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 이름하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자 제자들을 택했습니다. 만약에 오늘 용어로 표현해서, 예수께서 하늘나라 주식회사 사장이셨다고 생각하고, 그분이 채용한 직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의 수제자는 베드로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베드로라는 사람은 수제자이기는 하나 못 배운 사람이고, 고기 잡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격이 너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많고, 실제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흥분해서 칼을 들어 잡으러 온 사람 중 하나의 귀를 잘랐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로 성격이 급합니다. 고기 잡는 것만 할 줄 하는 어부 베드로, 성격이 급해서 실수가 많은 불완전한 사람이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잘 선택한 것입니까?
예수의 제자 중에 도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자 모두가 믿었는데, 단 한 사람 도마는 “당신이 귀신인지 우리 선생님인지 못 믿겠습니다. 만져본 뒤에 믿겠습니다.”며, 결국 창에 찔린 자국과 못박힌 흔적을 만져보고서야 믿었습니다. 이게 도마입니다. 매사에 의심 많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예수가 선발한 인재입니다.
안드레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그를 분석해 보면, 성격은 아주 내성적이고 업무추진력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쓸모가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좋고, 마음씨는 고와서 예수가 제자로 뽑았습니다.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형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치적 야망이 많았던 사람들 같습니다. “주님께서 만약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저희 형제를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 두 형제 어머니의 부탁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정치적 야망에 불타는, 정치적 이기주의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걸 알고도 그 둘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부모 된 사람들은 자식들을 취직시키기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자식 된 사람들은 취직하려고 필기시험도 보고 면접도 보아야 하고, 자격시험을 보기도 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심사관이라면 어떤 사람을 뽑았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며느리를 맞고 싶을 때, 사위를 맞고 싶을 때 어떤 사람 뽑고 싶습니까? 선택의 기준이 다 다를 겁니다. 그런데 예수의 선택은 우리가 보기에 별로 신통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별 것도 아닌 기준을 가지고 제자들을 뽑은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우리의 스탠더드로 보면, 가장 훌륭한 자격을 지닌 사람은, 미안합니다만,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였습니다. 기록에 보면 가룟 유다는 학식과 덕망이 높고, 세상일에 경험이 많고, 사업에 감각이 뛰어나고, 사람이 사교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 계산이 빠르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만, 그것도 꼭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외적 조건을 갖춘 사람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보 같은 어부들과 문제 많은 사람들은 전부 부활한 예수의 증인이 되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덕목을 지닌 유다는, 성서에 보면, 예수가 부활하기 전, 아니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가장 잘난 사람은 배신자가 되고, 못난 사람들은 산 증인이 되어 이천 년 교회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럴 줄 알고 뽑았습니까? 배신할 줄 알고 뽑았습니까? 아니면 실격자인 걸 알고 뽑았습니까? 그건 우리가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유다는 훌륭한 자격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배신자가 되어 스스로 죽고 말았습니다.
성서 말씀을 읽어보면, 유다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당대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성스럽고, 따라서 비교적 남들의 존경을 받던 계층, 말하자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잘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하면, 기독교인들은 당장에 위선자나 악한 사람들을 떠올리지만, 그러기 전에 바리새파 사람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당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그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이나, 사막으로 나가 은둔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유대 사회를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은 그 둘이었습니다.
사두개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제사장 계열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집전하며, 백성들의 속죄와 샬롬을 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구약 성서 중에 오래 전부터 경전으로 여겨졌던 “모세 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 다섯 책만 경전으로 인정하고, 시편과 예언서 모두는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며, 또한 내세도 없고, 따라서 부활이라는 것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사장직을 독점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소위 랍비라 이름하는 자들로, 율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자들이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스스로를 성별하고 율법을 엄격히 지킨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세 오경만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부활도 믿고, 천사도 믿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갈 내세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일 점 일 획도 어김이 없이 율법을 준수하려 했습니다. 계명을 지킵니다. 법도 지킵니다. 도덕도 지킵니다. 십일조도 빠짐 없이 냅니다.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신앙적 도덕적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바리새파 사람들 열 명만 있으면, 아마도 이 땅의 정치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준법정신 강한 사람이 이 사회에 있다면, 아마도 이 사회가 이렇게 병들고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파를 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리새파를 본받자고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부족했느냐고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법치적이고 도덕적인 국가가 훌륭한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 국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도덕적 가치기준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제발 바리새파 사람들만큼이라도 준법적, 도덕적 이런 양심적 세력이 되십시다. 이것이 저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한 가지를 더 요구합니다. 아니 한 가지 더가 아닙니다. 한 가지는 한 가지인데, 그것은 너무나 근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진실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의로운가?” 이 문제에 대해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율법 앞에서 의롭습니다. 그들은 예를 들어 감옥에 갈 요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법 앞에서 떳떳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형편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법 앞에서, 율법 앞에서 당당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머리를 못 듭니다. 사람들 앞에서, 인간 앞에서 법 앞에서 아무것도 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한 사람은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이 아니라 율법을 못 지킨 세리였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이루어 놓은 인간공동체는 좋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공동체로 승화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생각했던 자기들이 만든, 자기들이 인정하는 스스로의 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답변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그릇, 쉬네르고스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출신이나 성분이나 학식이나 재능이나 예능이나, 그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 그런 결단을 가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부, 신경질 많이 내고, 실수도 많이 하는 어부가 아니고, 훌륭한 학식을 갖춘, 가룟 유다만큼이나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하면, 하나님의 시너지 효과는 아마 훨씬 더 컸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재능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재능은 하늘의 뜻과 합해야 시너지 효과를 내어서 인간 그 자신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 하나님 앞에서 의를 갖추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 물음에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못하시겠거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의로울 게 없습니다. 당신의 의로 저를 덮어주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시사 당신의 의로움이 담길 그릇으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십시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나의 동역자로 삼을 것이다.”
여러분 그런 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그런 그릇에는 담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에게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처참함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바로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지식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계산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경륜이 잘못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하늘의 의로 둔갑시킨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식과 덕망이 많았지만, 결국 제자 명단에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은 진실로 믿음이 깊은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사도신경을 공부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성자가 믿음을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사람은 아예 믿음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의 뜻은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십니다. 두 번째 믿음은 살아 있는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세 번째 믿음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 속에 제가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분 속에서 결단하고, 그분 속에서 그분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함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내 안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내 안에 있는 경지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가장 훌륭한 단계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사오며” 할 때 영어로는 “I believe in G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속에 풍덩 잠겨서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 속에 들어가지 않고 믿는 것은 그냥 하나님을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나는 하나님 품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저한테 임마누엘하시고, 저는 하나님께 잠겨서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택한 저라는 그릇을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지배하도록 하소서.“ 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 희생적으로 전체를 바치는 믿음, 그 믿음을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아버지를 믿는 자식은 아버지의 가슴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객관화, 대상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완전히 믿고 그 아버지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자식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개념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자식을 끌어안을 뿐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만큼, 아버지도 자식을 믿어주는 마음이 강합니다. 믿음은 상부상조입니다. 이것은 국민의 지도자와 국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의 믿음만큼 백성의 믿음이 따라옵니다. 믿음이 서로간에 교환되지 않으면, 그건 믿음의 사회가 아니라 불신의 사회입니다. 그 불신의 사회에서는 오직 일방적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일방적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그릇으로 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그릇 안에 무얼 담는 겁니까? 하나님의 그릇 안에 담을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사랑을 담으십시오.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보면,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길 그릇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요나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적대국 니느웨! 거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니, 솔직하게 말해서 요나는 싫습니다. “차라리 저더러 여기서 죽으라고 하십시오.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적대국 니느웨에 가서 왜 구원을 전하라고 합니까? 그들은 망해야 합니다. 적은 그냥 죽여야 되는 것이지, 적은 굶어 죽어야 하고, 적은 저주받아 죽어야지, 왜 적을 구원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요나와 다릅니다. 적도, 심판을 통하든 채찍질을 통하든 회개시켜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적을 무찌르고 우리를 보호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잘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용광로에 넣어서 회개시켜서 구원의 나라에 함께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싫어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싫음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를 주십니다. 그런 사랑을 담을 그릇, 그만큼의 용량을 가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라디오에서, 생선회 전문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 이야기가, 회를 뜨는 칼의 종류가 많은데, 하나에 천 이백 만 원 짜리 칼이 있다고 합니다. 제일 비싼 칼이 그렇고, 싼 칼은 몇 백 만 원 짜리도 있다고 하는데, 왜 비싼 칼, 또 여러 가지 칼을 쓰느냐고 묻자, 이 사람 설명이 칼에 따라서 자기들이 뜨는 횟감의 맛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횟감을 자를 때 부위마다 쓰는 칼이 다릅니다. 비싼 칼로 부위에 맞는 칼로 잘라야 진짜 횟감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우리한테도 칼 종류가 많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잘라 없애는 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셔서 잘라 없애는 칼이 아니라, 잘라서 모든 사람에게 맛을 줄 수 있는 칼로 쓰시는구나 싶습니다. 인간의 칼은 사람을 잘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칼은 잘라서 맛을 내고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일을 일으키십니다. 그런 정도의 그릇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셔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십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이 함께 어울린 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나라, 그 나라는 완전한 평화의 나라, 이름하여 샬롬의 나라입니다. 그 평화를 향한 결단, 이것을 오늘 예수께서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와 믿음과 사랑을 갖춘 그릇들이 구하는 바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이런 그릇들 속에 뭔가 채우기를 원하면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이런 그릇들이 와서 노크하면 반드시 열어 주십니다. 복음서의 본문은 생선 달라는데, 뱀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 중에서도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그냥 도깨비 같은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제가 보기에 정보가 부족하여 못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정보는 넘쳐납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수히 많은 정보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선택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이 정보의 홍수 속에 무엇을 선택하실 겁니까?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이 없이 어떻게 정보가 유익이 될 수 있습니까? 영감이라는 말은 성령에 감동된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 이것을 오늘 영감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된 그릇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이런 그릇이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장로님들을 뽑을 때에도, 이런 그릇인 분들이 뽑혀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영광의 그릇으로 삼아주시는 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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