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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한테 와서 쉬라 / 사 12: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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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테 와서 쉬라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12:1 ~ 6
그 날이 오면, 너는 찬송할 것이다. "주님, 전에는 주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으나, 이제는 주의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니, 주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나는 주를 의지한다. 나에게 두려움이 없다. 주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이시다."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또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며, 그의 높은 이름을 선포하여라. 주께서 영광스러운 일을 하셨으니, 주를 찬송하여라. 이것을 온 세계에 알려라.
시온의 주민아! 소리를 높여서 노래하여라.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서신서의 말씀: 골로세서 3:12 ~ 17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온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한 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1:25 ~ 30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고자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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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의 찬양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찬양을 들으면서 매일 매일 매순간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서에 천국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찬양과 감동과 기쁨으로 사는 것이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은 다음에만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도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수필집에 나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살기가 지긋지긋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떠난 지 30여년 쯤 되는 사람인 모양인데, 이 사람이 이민 가서 지낸 일들을 담백하고도 솔직하게 썼습니다. 미국이 천국인 줄 알고 갔는데, 진짜 천국 같았답니다. 그러나 정작 살기는 굉장히 힘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살기 힘든 천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보다 훨씬 여건도 좋고 사람들도 예의 바릅니다. 그러나 부부가 아침부터 밤까지 맞벌이를 해야만 겨우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천국입니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밥을 함께 먹을 여유가 없는 천국! 빈틈없이 꽉 짜여진 법, 규범, 규례, 그걸 지키면 편하지만 그것을 지키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곧바로 규제를 받게 됩니다.
주말에 좀 쉬고 싶지만, 집을 좀 큰 것을 샀고 그집에 잔디밭이 있어서 잔디를 깎아야 합니다. 좋아서 깎는 게 아니고 안 깎으면 주변에서 욕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똑같이 잔디를 깎아야 합니다. 밤 8시가 넘으면 이웃에게 전화하기도 어렵습니다. 프라이버시 침해입니다. 애를 집에 놓고 외출했으면 좋겠는데, 어린애를 집에 두고 간다고 경찰에 신고당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꼭 데려가거나 유치원에 맡겨야 합니다. 돈이 듭니다. 식당에 들어가 한국에서처럼 아무데나 앉고 싶은 곳에 앉으면 좋겠는데, 꼭 기다려서 웨이터나 웨이트리스가 지정해 주는 곳에 앉아야 합니다. 주문을 바로 하고 싶은데, 꼭 웨이터가 와서 주문을 받아야만 주문할 수 있습니다. 저도 경험했던 일입니다만, 외국에서 살 적에, 밥을 다 먹고 급해서 빨리 나가야 할텐데, 계산하자고 해도 웨이터가 와야지요. 제가 한시가 급한데 10분을 기다렸던 일이 기억납니다. 자기 일이 끝나야 와서 계산 받는 것이고, 손님은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도 법과 질서구나 하고 느끼면서도, 자신한테는 괴롭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살기는 참 좋은 곳인데 살기가 불편한 천국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 나라를 떠났느냐? 우리 나라가 지옥 같아서 떠났다고 합니다. 떠나고 나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길 가다가 어깨 툭툭 쳐도 미안하다 소리 한마디 안해도 되고, 지하철 탈 때 발을 막 밟고 지나가도 웬만하면 괜찮고, 큰 소리로 떠들어도 되고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 없고, 자동차도 맘대로 끼어 들어도 되고, 줄서야 할 때도 줄서지 않고 새치기하는 사람이 없나, 술 마시면 소리소리 지르고 난리 치는 사람이 없나, 그래도 말하는 사람 없고, 지옥은 지옥인데 너무나 편한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과는 반대로, 많은 분들이 외국에서 우리 나라로 오는데, 특히 돈 벌러 오는 분들은 여기가 천국인 줄 알고 오는 것 같습니다. 돈 버는 액수, 버는 돈의 가치로 보면 아마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에 비해 여기가 천국일 겁니다. 그런데 외국인으로서 당하는 서러움이나 외로움, 혹은 직장에서 당하는 착취와 구타, 문화적 소외감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들에게는 여기가 힘든 지옥과 같은 천국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살기도 좋고 편한 천국, 그런 것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천국은 천국이지만, 조금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지옥인데 살기는 좀 편하게 만들어놓으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살기 좋고 편하기도 한 천국을 찾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그런 천국을 찾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우리 하나님을 교회에 모셨습니다. 교리라 이름하는 큰 신앙고백의 문서 속에 하나님을 모셔두었습니다. 너무나 잘 모시다보니, 하나님이 교회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니, “교회를 떠나면 구원이 없다!” 이렇게까지 선포되었습니다. 구원도 교회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가능한 것이지,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한 천년을 지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은 시멘트 안에 갇히셨고, 교리 안에 갇히셨고, 교회제도 안에 갇히셨고, 그곳에 와야만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교회를 찾아와야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나온 말이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입니다. 이해하시겠죠? 이렇게 된 세상에서는 교회에 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뭐가 문제가 되느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더니 답답합니다.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게다가 교회만 나가면 지옥이라니 제대로 숨을 쉬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편에서 본다면, 문화나 문명이나 역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교회라는 시멘트 안에 갇힌 하나님을 해방시키자, 교리주의에 묶인 신을 해방시키자는 주장이 대두되고, 그래서 들고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교회 철문 안에 갇힌 하나님을 해방시켜서 밖으로 끌어냅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해방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가리켜 종교개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해방되면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도 계실 곳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어디로 옮겼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교회 옹벽에서 해방받은 하나님은 이제 어디에 계시느냐 하면,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십니다. 이제는 교리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이성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갑니다. 인간의 양심 속에 들어갑니다. 이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계십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교를 가리켜서 양심의 종교, 이성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런 물결을 타고 이성주의도 생겼고, 계몽주의도 자유주의도 생겼습니다만, 특별히 마음의 종교, 양심의 종교를 강조한 교파들이 생겨났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침례교를 세운 로저 윌리엄스란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자유,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영혼 속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영혼이라고 이름한다면, 그 영혼 속에 자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침례교입니다.
아니면 “인간 각자의 가장 깊은 영혼과 이 내적인 마음속에 자그마한 등불이 있습니다. 이 등불이 비치는데 그 등불 빛의 이름은 신앙이라는 빛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내재한 내적인 신앙의 빛, 그 빛을 찾기 위해, 함께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마음을 모아 명상 해보십시다. 그러면 신앙의 불빛이 우리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퀘이커라 이름하는 집단이 생겨났습니다.
감리교를 시작한 웨슬리 목사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야 됩니까? 불빛만 가지고, 자유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게 달구어져야 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마음을 달굽시다.” 그래서 감리교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라고 하는, 교리라고 하는 제도에서 해방된 신이, 이제 각자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한 오백 년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지금 모든 교회사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20세기 초엽 이야기 하나 하려고 합니다. 인간 속에 신이 내재해 계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양심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라고 외치던 인간이 만들어낸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쟁입니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전 역사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정도로 처참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기독교 대륙 한복판에서 생겨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이어 터졌습니다. 무수한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3.8선 아래, 위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갔고, 월남에서도 죽어 갔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와중에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인간들의 반성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교회라는 옹벽에서 해방시켜 놓았더니, 우리의 양심 속에 모셔놓았더니, 그렇게 모신 하나님이 어딜 가셨기에 우리는 인간을 대량 살상합니까? 혹자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죽은 게 아니라, 인간의 양심 속에 모셔놓았던 하나님은 미안하게도 인간의 양심이 죽어서 있을 곳을 잃어버리신 겁니다. 교회로 찾아가 봐도 교회가 타락해서 하나님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 양심, 이성의 빛, 실존, 뭐라고 표현하든 간에 다 타락해서,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장소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하나님은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교회에서 해방시켰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벽을 무너뜨리신 겁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양심 속에 모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 양심이라 이름하는 곳에 들어오셔서 함께 살겠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쓰는 용어는 아무리 신학적인 용어나 신앙의 용어라 해도 인간의 용어일 뿐,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 반대입니다.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전쟁의 참화 가운데에서 물을 때 우리는 겸손하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우리에게 내재해서 함께 계신 하나님, 우리 양심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이 타락하여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시지 않고 우리를 넘어서, 세계를 넘어서, 이성을 넘어서, 모든 질서를 넘어서, 계신다. 그 하나님은 초월하여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찾아낸 답변입니다. 초월했다는 말은 우리와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와 질서와 이기심과 탐욕과 죄악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초월하시는 하나님!
오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초월하여 계십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속에, 알량한 양심 속에 가둬 두는 한,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를 초월하여 위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양심이 올바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것이 아니라, 초월해 계신 그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내 양심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습니다. 변하고 변해서 지금은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이제 모든 가치를 시장이 결정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시장경제!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 구조 속에, 세계화 구조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시장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시장에 상품을 내놓고 값을 매깁니다. 이제는 인간의 문화도, 도덕도, 가치관도, 사고방식도 상품성이 좋아야 사람들이 사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종교도, 교회도 오늘날에는 시장상품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본격적입니다. 교회는 뭘 생산합니까? 종교가 생산하는 품목은 뭡니까? 인간의 삶의 의미, 의미라 이름하는 상품을 생산합니다. 의미라고 이름하는 원자재를 생산합니다. 교회는 외칩니다. 우리는 의미라는 원자재를 팝니다. 이 원자재를 사다가 거기다가 정치체제라는 옷을 입히십시오. 경제 체제라는 이름을 입히십시오. 이데올로기체계든 뭐든 맘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경쟁이 붙습니다. 그래서 종교도 시장에 내놓은 종교, 상품화한 신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너무 경쟁이 심하다 보니 인생의 의미, 인생의 가치관, 인간의 행복, 신적인 기쁨, 광채, 영광, 이 모든 것이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어떤 종교에서는 가격파괴를 내겁니다. “여기에 오시면 하늘이 주는 행복을 비싼 가격이 아니라, 싼값에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안수 한번 하는 것으로 여러분은 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격을 내렸습니다. 부흥회를 열 테니 오십시오. 특별집회 할 때 오십시오. 산으로 오십시오. 잠실운동장으로 오십시오. 거리에다 지하철에다 써 붙입니다. ”더 이상의 가격파괴는 없습니다.“ 이게 오늘의 시장경제화된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교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세계에 살면서 우리가 무슨 구원을 외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팝니다. 복과 구원을 주는, 하나님이라 이름하는 그것을 팔 테니, 싼 값으로 사가라고 외칩니다. 중세 시대의 면죄부와 뭐가 다릅니까? 인간이 시장의 상품으로 화하고, 인간이 믿는 신인 하나님이 상품이 되고, 인간이 가격을 매기고, 가격을 파괴하고, 가격을 높여서 폭리를 취하고, 바겐세일도 하고! 인간들이여, 어서 오십시오. 여기가 좋습니다고 외쳐댑니다.
여기가 천국입니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시장화된, 상품화된 종교가 역겹다. 피곤하다. 난 여기를 벗어날 것이다. 차라리 신의 이름이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 가면 바겐세일은 없을 것 아니냐? 나에 대한 더럽고 사악한, 추잡한 개념은 없을 것 아니냐?”
저는 이런 상황에 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은 돈 액수로 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가격을 매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는 인간들의 시장 가치에 따라서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몽땅 거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교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환율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랑만으로 십자가 공로를 통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만을 붙들고서 이제 시장에서 나와야 합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경동교회는 차별화된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가격파괴는 생각도 안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겐세일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상품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자기희생적 은혜, 그 은혜만 가지고 감동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값을 매겨서는 안 되는 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오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한테서 쉬고 싶은 사람은 다 오너라. 나와 함께 쉬고 싶은 사람에게는 내가 줄 옷이 하나 있다.” 그 옷 이름은 골로새서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답게, 거룩한 사람답게 입어야할 옷이 있는데, 그 옷의 이름은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이니, 입고서 나와 함께 탈출하자. 내가 그대들을 용서한 것 같이 그대들도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여 함께 거하자.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모든 것 위에, 옷과 용서, 용납 위에 사랑을 더하라. 사랑만이 그대들을 완전하게 묶는 띠이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묶이자. 묶이면 그대에게 평화가 충만할 것이다.”
진실로 평화와 안식을 추구하고 또 누리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묶는 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가진 사람, 그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감사하고, 은혜에 감사하고, 가격을 따질 수 없는 엄청난 보물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 감사의 방법은 시를 Tm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방법은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방법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내가 쉬고 싶다. 나한테 와라. 그러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나와 함께 시장에서 빠져나와서, 가격 경쟁 사회를 벗어나서, 나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세계 가운데에서 산책하며, 노래하며, 감사하며, 행복을 누리자.”
전능하신, 초월하신 하나님이 이제 새롭게 된 여러분들의 양심 속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여러분들의 가정에 함께 계시고 싶어 합니다. “세상을 바꿔라. 양심을 바꿔라. 마음도 바꿔라. 내가 거기에 함께 있고 싶다.”
오늘 저는 경동교회가 바로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너희와 함께 쉬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푸른 초장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그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쉬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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