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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과 절망의 분기점 / 렘 20:1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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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과 절망의 분기점

구약의 말씀 : 예레미야서 20:11 ~ 1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께 아뢰었으니, 주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주께 노래하여라 ! 주를 찬양하여라 ! 주께서는 억압 당하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신다."

서신서의 말씀 : 베드로전서 1:18 ~ 21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 누가복음 9:57 ~ 62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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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들이 의사로 봉직하기 위해서 하는 선서가 있잖습니까. 소위 히포크라테스 선서인데 제가 오늘 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선서를 할 정도로 훌륭하신 이 분의 말씀을 하나 뽑아 왔습니다. 이 분 말씀이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인생이 짧은 것은 다 알겠는데 짧은 인생과 비교하여 예술은 정말 긴 건가. 사실 히포크라테스가 이 말을 할 때 이 분은 의사 선생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처방도 하고 때론 수술도 하고 병의 원인도 밝혀야 하겠는데, 너무나 많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자기 평생 동안 연구를 해봐도 올바른 처방을 다 내릴 수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분이 말한 예술은 우리가 말하는 요즘 말하는 예술이 아니고 의학 기술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평생에 아무리 한들 우리 인간의 신체를 다 점검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치료할 의술의 필요성은 영원 무궁토록 계속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짧은 인생 중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우리의 삶은, 우리가 누려야 할 행복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고통은, 인생의 길이보다 훨씬 긴 것 같습니다. 예컨대, 오늘 예술 작품이 존경을 받고 많은 분들이 다시 전시를 하고 연주를 합니다. 작품은 영원히 시간을 따라서 감명으로 오지만 그 속에 인생은 없습니까? 모든 예술 작품 속에 작품을 만든 작가의 정신은, 작가의 혼도 예술 작품과 함께 이어져 나갑니다. 고난을 노래했던 작품 속에 고난을 작곡한 분의 혼도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기쁨을 노래한 음악 속에 기쁨을 말하려고 했던 작가의 그분의 혼도 신앙도 같이 따라 들어갑니다.

비록 인생이 짧긴 하나 인생이 만들어낸 예술품 그것은 길이길이 빛날 수 있습니다.
짧은 인생 동안에 우리가 무슨 작품을 만들어서 비록 인생이 짧게 끝나나 저의 고백은, 저의 소원은, 저의 희망은, 제가 그토록 고뇌를 통해서 이루려고 했던 저의 목적은 길이길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 중에 희망의 얘기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아픔의 얘기가 있고 고난의 얘기가 있고 절망의 얘기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쉽게 벗어 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신 골고다의 언덕길 그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 처형, 그것은 고난의 극치입니다. 절망의 극치. 절망이 무어냐 하면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습니다. 실낱같은 잡고 싶은 지푸라기도 더 이상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절망입니다. 절망 가운데 우리는 탄식을 합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도 멈추는 곳이 있습니다. 절망이 멈추는 곳,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 이름합니다. 죽음이 오면 절망도 희망도 다 멈춥니다. 모든 것이 멈춘 그곳, 그것은 적막이요, 고요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입니다.

절망이 가는 곳, 고난이 가는 곳, 그렇게 인생이 끝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런데 절망이 멈추는 그곳, 죽음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터나고 다시 등장합니다. 십자가 죽음 속에서 부활의 영광이 다시 움터납니다. 고난이 죽고 새로운 희망이 솟아납니다. 그 희망은 다른 곳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죽은 곳, 절망이 마지막 종지부를 찍은 그 곳에 바로 희망이 움터 나옵니다. 절망이냐 희망이냐 하는 것, 이원론적 구분이 아닙니다. 절망과 희망은 한 동전의 양면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 그곳에서 희망이 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보내는 질문입니다.

예수께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가십니다. 이 분의 절망스런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이 같은 소외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 같은 절망의 극치가 있습니다. 이 극치는 이미 골고다 언덕에 가기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죽기까지 선생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 허락해주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들인 제가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시고 그 다음에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한탄하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여라. 오늘 말씀입니다. 인륜적으로 보면 예수의 말씀은 너무나 심합니다. 죽은 자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를 수 있어야지 그걸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의 복음을 선포하여라. 도대체가 인륜상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깊은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절망의 극치에서 죽음이라는 지경까지 가셨지만, 그 죽음에 연연하여 울지 말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릴 죽음 이후의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도하라. 왜 죽음을 보고 슬퍼하느냐, 죽음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하느냐. 이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죽은 자처럼 하지말고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기대하는 용단을 가져라. 이것이 첫 번째 뜻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뜻입니다. 죽음을 보고 또 죽음이 맞이하는 절망의 끝을 보고 운명이라 믿고 슬퍼하지만 말고, 죽음 이후에 올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지금 살아 있는 그대 생명 속에 체화하도록 하여라. 죽음 뒤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죽음 뒤에 모든 것이 끝나고,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깨달았으면 그 희망을 죽음 이전부터 지금 즐기도록 하여라. 준엄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한국의 교회는 그런대로 열성이 있어서 수난주일, 부활절 보통 어느 주일에도 열심히 나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서양에 가면 서양교회가 닥치고 있는 어려운 점을 아실 것입니다. 교회가 자꾸 빕니다. 주일도 비고 주일이 비다보니 평일도 물론 비고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기독교 국가라 이름하는 서구라파, 교회가 동구라파 교회가, 북미주의 교회들, 이 교회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뽑혀서 취임선서를 할 때면 성경책에다 손을 얹고 대법원장 앞에서 선서를 합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취임하는 공식행사에 성서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런 면이 있는가 하면, 어느 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찬송과 기도를 좀 하겠습니다. 예배도 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법원 판결이 헌법에 보장된 종교자유에 위반되는 것이니 공립하교 예배는 안된 답니다. 공식적으로 취임하는 대통령이 성서 말씀에 손을 얹고 취임하는 것은 뭐고, 공립학교에서 찬송을 부를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은 뭡니까. 도대체 모순되는 기독교 사회입니다. 많은 분들의 얘기로는, 이제는 대통
령이 취임할 때 성서에 손을 얹는 행위는 종교적 신앙적 행위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전통이요 정치적 관습이요 문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공립학교에선 통용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직까지 문화로 정착을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에 우리가 세속화란 말을 많이 합니다. 세속화가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사람이 타락하는 것이 세속화가 아닙니다.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이 신앙 행위가 아니고, 신앙적 도덕행위도 아니고, 그냥 사회적 관습입니다. 그렇게 성경말씀이 관습화되면 그걸 가리켜서 세속화라 이름합니다. 이런 세속화 사회를 다시 살려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서양사회들의 고민이요 과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내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 고난 길을 가시고 골고다 언덕을 가셨습니다. 성가대가 찬양하는대로, 예수께서 고난 받으실 때 당신은 어디있었습니까? 저는 없었습니다. 저의 알리바이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의 죽음은 하나의 종교적 행위요, 기독교적 관습이요, 나의 실제 생활과 관계가 없는 세속화의 산물입니까? 우리가 아는 십자가가 나무의 십자가뿐입니까? 그러면 우리 교회는 종교단체입니다. 이 종교단체도 키울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삶 속에 깊이 스며 들어오지 않으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를 지고 옛사람이 죽고 부활하여 새사람으로 부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저한테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가 지금 제 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습니까? 아니면 밖에 있는 객관적인 상징물로 하나의 상징적 관습적 현상입니까. 신앙과 불신앙을 가르는 경계점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저의 죽음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저의 부활입니다. 관습이 아닙니다. 컨셉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것, 나와 함께 죽습니다. 이것을 발견하라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태어날 때부터 고난을 말하고 부활을 말합니다. 고난의 문제는 모든 종교의 공통 관심사입니다. 고난이 어디서 나왔으며,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며, 고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종교마다 처방이 다릅니다. 성경말씀에 고난은 이렇게 해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받는 고난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이기에, 피조물인 우리가 받는 고난과 우리가 누리는 기쁨, 모두가 하나님과 연관 되어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무언가 관계되어있습니다. 이 관계를 끊는 고난은 우리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모두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도 우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부활도 우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죽은 자가 부활했지, 부활한 자 따로 있고 죽은 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옛 것의 죽음과 새로운 것의 탄생은 항상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고난 다음에 행복이 옵니다. 죽음 다음에 부활이 옵니다. 두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옛 것이 죽고 새 것이 새로 생긴 변화를 의미합니다. 인간에는 선이 있고 악이 있는 이원론을 믿지 않습니다. 빛이 있고 어둠이 있고 그렇게도 믿지 않습니다. 빛이 있던 것이 빛이 바래면 어둠이 되고 어둠 속에 빛이 비쳐서 어둠이 물러가면 빛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빛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질적 변화합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도 죽음에서 부활로 다시 질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죽음과 부활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빛과 어둠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변화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는 한 사람이 한 하나님이 일으키신 두 가지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는 절망이라는 사건, 또 하나는 희망이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어디서 교차합니까. 절망이 극치에 다다른 십자가, 부활이 생겨난 십자가, 그곳에서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교차점이 없이 두 개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절망은 죽고 희망이 삽니다. 절망을 걸머진 예수는 죽고 희망의 화신인 그리스도가 삽니다.

성경말씀에 예수와 그리스도의 이름이 두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절망을 지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는 골고다에서 죽고 그분이 다시 부활해서 사셨더니 그분의 이름을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적 테마는 '예수가 그리스도입니까'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와 같은 사람입니까. 이걸 증명하는 것이 기독론이요, 그리스도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그리스도가 예수이십니다'라고 예수와 함께 살아간 우리는 그리스도와도 함께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노력, 이것이 오늘 주신 성경말씀입니다.

누가 그러면 이 변화를 일으킵니까. 사람의 몸은 혈액이 순환이 되어 살아갑니다. 어디선가 혈액순환이 끝나면 죽은 목숨이 됩니다. 혈액은 이어줘야 사람이 살아갑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고난을 받다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생명이 끝나면 우리 속에 영적 육적 혈액이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난 줄로 알고 죽음인 줄 알았더니, 그 속에서 다시 혈액이 연관되어서 새로운 부활이 등장합니다. 누가 끊어진 혈액을 연관시켜 줍니까.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마지막 단절입니다. 그 다음에 부활을 통해서 다시 예수의 피가 이어지고 그래서 그리스도로 부활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 합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이 연결의 주인공이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죽음 속에 있는 단절, 부활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연속. 단절과 연속이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벌어집니다.

오늘 수난절 중간에 와 있습니다. 수난 속에서 희망을 심어가는 결단을 하십시다. 희망이 절망에서 움터나오듯이 절망은 희망을 심는 토양입니다. 그 속에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괴로우실 때, 예수를 여러분의 예수로 모시기 바랍니다. 기쁘시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모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소망 속에 고난을, 고난 속에서 소망을 함께 찾는 노력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 분기점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가지려고 하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이런 성경말씀을 반복합니다.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십시오."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가 오실 때까지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희망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여러분 계속 희망 속에 사십시오. 그때까지 여러분이 하실 일은 희망이 태어나는 근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죽으심이라고 표현하지 않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합니다. 희망이 고난 속에 태어납니다. 희망이 태어나는 가능성의 집인 십자가의 현장을 여러분은 잃지 마십시오. 이것이 성만찬의 의미입니다.

베드로 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를 통한 믿음과 부활을 통한 소망은 여러분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실존의 하나님으로 모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단절시키지 않고, 그 하나님 속에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여러분 속에 모시길 바랍니다. 신과 인간의 합일, 고난과 희망의 합일, 그 합일 장소가 십자가의 현장입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의 부활과 고난을 함께 묶어주는 구원의 십자가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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