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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의 내용 / 출 6:6-9, 롬 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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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내용 ( 출 6:6-9, 롬 4:13-15 )

 
  요즘에 많은 사람들에게 네덜란드는 한국축구대표팀의 전 감독이었던 히딩크의 고향으로 기억됩니다. 네덜란드는 풍차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네덜란드에 유명한 것이 많이 있지만 네덜란드는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를 낳은 곳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탕자의 귀향'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인물은 한 손은 남자의 손, 다른 한 손은 여자의 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묘사된 하나님은 남자로서의 사랑과 여자로서의 사랑을 모두 보여주는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가정에서 자녀는 아버지에게서 정의와 용기 등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사랑과 자상함 등을 배운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게서 아버지다움을 배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어머니다움도 동시에 배웁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다움과 어머니다움을 양 손에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달래시는 하나님은 강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자상한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엄하게 꾸짖고 힘을 나타내실 때는 아버지 모습이지만 다시 백성들을 달래고 애처로워하실 때는 마치 어머니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출애굽기 6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다고 하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그 언약의 내용을 설명하십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 줄 때 참 답답합니다. "내 마음 알지?"라고 말해보지만 마음을 모를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 때는 마음을 보자기 뒤집듯이 속을 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고 참 답답합니다. 계시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둔하여 뒤집어 보여주고, 열어 보여줘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봤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지만 만물을 본다고 아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인간의 무지와 둔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답답해하실 것입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거듭 다짐을 하고, 확인하고, 언약을 재확인하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보십시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을 빼어내며, 건지며, 구속하리라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거운 짐에서 빼어내며, 고역에서 건지며, 구속하리라고 하십니다. 빼어내는 것이나, 건지는 것이나, 구속하는 것이나 다 같지만 거듭거듭 하나님은 다짐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이 용기가 백성들에게는 절실합니다. "빼어내며"란 말은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심초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도 대가를 다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건지며"라는 말은 탈취하다 혹은 구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떠내려가는 것을 건져내는 큰손의 모습입니다. "구속하리라"란 말은 매각한 것을 다시 사 들인다 혹은 무르다 혹은 복수하다는 뜻입니다. 애굽으로 잃은 백성을 다시 그의 백성으로 사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판 것을 다시 물러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친척이 살해당하면 대신 복수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고엘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아내와 결혼하여 자손을 잇게 해주는 것입니다. 룻기 4:10에는 "보아스가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은 룻을 보아스가 아내로 맞은 것입니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갚는 자입니다. 이런 고엘 제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납니다. 성도를 대가를 지불하고 성도를 사 옵니다. 성도를 사탄에게서 탈취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복수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속을 편 팔로 하시겠다고 합니다. 1절에서는 강한 손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손도 강하신데 팔까지 펴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강력한 활동을 의미합니다. 강한 손을 가진 그 팔을 펴시고 구원하십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팔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빠 팔뚝에 한번쯤은 매달려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아빠의 힘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그 때는 아빠가 제일 힘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 크고 나서 보니 아버지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힘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은 좋은 생각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힘이라는 생각은 든든한 믿음입니다. "여호와 나의 힘이시요"라는 말은 구약에 빈번한 표현입니다. 신명기 33:27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그 팔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이사야 51:9에는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팔이 깨야 우리가 삽니다. 여호와의 팔이 펴져야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찬송가 464장을 보세요. 정말 힘이 되고 의지가 됩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잔잔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가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시편 89:21에는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이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팔을 의지하십시오. 그 팔에 힘이 있습니다. 그 팔에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17세기 부엌의 성자라고 불리던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성경이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팔은 결코 짧아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느끼고 체험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매달릴 만큼 힘이 있는 팔입니다. 우리를 위해 항상 펼 만큼 긴 팔입니다.

둘째,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적 부분입니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언약은 최고의 언약입니다. "삼고"란 말은 지정하다 혹은 인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월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였다고 합니다. 이사야 43:1에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또 있습니다. 이사야 45:3에는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재물을 주어서 우리를 지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명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택의 시대입니다. 영화관도 이제는 멀티 플렉스라고 해서 작은 영화관이 여럿이 있어서 영화도 선택하게 합니다. 자동차를 살 때면 옵션이라는 자동차 사양이 많이 있습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도 다 채널 시대가 되어 채널을 선택하며 시청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팔리는 아이스크림의 종류만 하더라도 37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선택 사양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명입니다. 하나님이 지명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지 우리의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은 성취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5-6에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언약을 성취하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9:45에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옛날 족장들과 맺은 구원의 언약이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이런 '백성'의 개념은 신약에 계승됩니다. 베드로전서 2:9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합니다. 다시 베드로전서 2:10에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합니다. 죄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제 백성이 되었습니다. 지난 월드컵 때 보세요. 대한민국의 백성이 된 것이 이렇게 감사하고, 긍지를 느끼고, 보람이 있고, 어깨가 으쓱해질 때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긍지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이 벅찬 감격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셋째, 맹세한 땅으로 인도하고,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맹세한 땅'이라고 하십니다. '맹세'란 문자적으로는 손을 든다는 뜻입니다. 맹세할 때에 손을 들기 때문에 이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맹세하십니다. 왜 인간은 맹세하지 못합니까? 인간은 쉽게 변하기 때문에 맹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맹세하실 수 있습니다. 수백 년 전의 맹세를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수백 년 아니라 수개월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끔은 저도 강의와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잊을 때가 있습니다. 다시 전화해서 지난 번에 분명히 제가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그 쪽에서 약속했다면 그러냐고 하고 어쩔 수 없이 갈 때가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기업이란 '모라솨'란 히브리 말입니다. 이 말은 쫓아내고 점유하다 혹은 유산으로 이어받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이 계획을 하실 때에 가나안 족속들은 이미 쫓겨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에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하시면서도 보이는 땅, 확실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약속은 받았지만 무언가 눈에 보이는게 있어야 인간은 확신합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구할 때 기적의 흔적들이 우리의 삶 속에 부산물로 남게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기적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의 흔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확실한 것을 보고싶어 합니다. 기드온은 처음 사사로 부르심을 받게 될 때에 믿기지 않았습니다.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양털을 한 줌 마당에 둘 테니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다른 땅에는 내리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다른 곳은 마르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믿어지질 않아서 다시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번에는 양털은 마르고 땅이 젖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것도 보여주셨습니다. 그제야 기드온은 나라를 구하는 사사로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니면서도 "내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 만인 줄 압니까? 우리 모두가 믿기를 더디하고 두려워하고 무엇인가 봐야 한다고 떼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보세요. 우리 인간들에게는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질의 복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영의 복은 육의 복을 동반합니다.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더 명확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에 대하여 긍휼이 여기시고 고쳐주십니다.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십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풀어 먹을 것을 주십니다. 갈릴리에 나아가셔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영혼 구원자이기 때문에 육체 문제는 필요 없다, 난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축복과 기복은 다릅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기복의 종교가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는 기복적이란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샤마니즘의 영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기복적이 아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95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메시지의 중심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후에 경제 개발이 한참이던 60년대 이후에 경제논리에 약간 편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기독교는 복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복을 받지 못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축복관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물질이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등한히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구약의 언약은 기업을 잇는 물질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언약은 물질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로마서 4:13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언약을 얻었습니다.

결론
찰스 스탠리는 '깨끗한 영혼으로의 초대'에서 자녀 양육의 기술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여러분의 자녀와 대화를 나누고 자녀의 삶 속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순수한 관심을 보여 주십시오. (2)자녀를 무조건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이십시오. (3)분명한 한계를 두십시오. (4)자녀의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십시오. (5)부모의 믿음을 전수시켜 주십시오. (6)자녀들이 지혜를 얻도록 가르치십시오. 자녀 양육의 기술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기술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술입니다. 우리를 구속한 하나님은 우리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기업을 주셨습니다. 구원받고 백성이 된 영혼의 복뿐만 아니라 땅을 차지하고 기업을 잇는 물질의 복도 함께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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