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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용하는 마음을 갖자 / 민 11:24-30, 약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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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관용하는 마음을 갖자
본문 : 민11:24-30,약4:11-12

숲속에 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연못에는 개구리와 물방개와 소금쟁이, 그리고 물매암이와 우렁이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연못의 우두머리인 개구리가 며칠 연못을 비우면서 물방개한테 관리를 맡겼습니다. 물방개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늘 말썽을 피우는 소금쟁이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한동안 조용한 듯 싶던 연못에 이번에는 물매암이 나서서 설치는 것입니다. 물방개는 연못의 평화를 위해 물매암이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렁이가 나서서 술주정을 부렸습니다. "저런 등신같은 놈이!" 물방개는 우렁이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연못은 고요하기만 하였습니다. 얼마 후, 밖에서 돌아온 개구리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활기차던 연못이 죽음의 늪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자 물방개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연못의 평화를 위해 말썽부리는 녀석들을 없애버렸습니다." 개구리가 크게 한탄 하였습니다. "미운 말썽꾸러기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운명인 것이다. 마음에 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없애다보면 함께 없어지고 마는 거야. 완전치는 못해도 서로 마음을 맞추어서 살아야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유난히 관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감싸주고 하는 마음들 말입니다. 이러한 관용하는 마음들이 없어서 사회가 대단히 시끄럽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가정들 또한 무척 시끄럽습니다. 아직도 한약협회와 약사협회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질줄 모른 채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과거의 잘못만을 탓하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성도 중요하고 회개도 해야하고 과감하게 뜯어 고치기도 해야 하지만 관용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를 악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5 공화국 때부터 하려던 실명제를 어렵게 결단을 하여 실시를 한다고 발표를 하고보니 안할 때는 왜 하지 않느냐고 비방하고 판단하더니 이제는 너무 이르다느니, 혹은 시기 선택이 잘못 되었다느니, 또는 어느 부분을 뜯어 고쳐야 한다느니 하고 비방하고 판단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너무나 관용하는 마음, 즉 용서가 없고, 이해심이 없고, 사랑이 없고, 감싸주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누구든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습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서 이해해 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먼저 비방하고 판단하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보다는 바로 그곳에도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감싸주며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진정으로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피차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과 다름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판단하는 것은 그 법을 준행하고 따르는 자가 할 일이 아니요, 재판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재판자가 누굽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시지요. 재판자는 오직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러면 "너는 도대체 누구인데 이웃을 판단하느냐?" 고 주님이 물으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내가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을 내가 빼앗아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잘잘못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4:5에는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잘잘못에 대한 판단을 오직 하나님께 맡겨 드리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관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백성들의 불평이 너무 심하여 그들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나간 모세는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모세가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모세에게는 계속 임하셨지만 칠십 장로에게는 잠시만 함께 계셔서 예언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 홀로 담당했던 백성들의 짐을 대신 나누어서 담당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명이 빠졌습니다.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들이 회막앞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강림하셔서 똑같이 예언을 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이러한 일을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서 일러바쳤습니다. 옆에 있던 여호수아가 이를 듣고 말했습니다. "이를 금하십시요." 모세는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칠십인 장로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수아의 잘못된 판단에 모세는 관용하는 자세를 가지고 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세는 자신만이 경험하고 있는 성령의 함께 하심에 대하여 큰소리도 칠 수 있고, 권위를 가질 수도 있고, 자랑할 수도 있고, 욕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오히려 스스로 그런 자신의 위치를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원망하고 시비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감싸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들에게도 백성의 짐을 담당하게 하시는 일을 우리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모세의 생각이었습니다. 설령 모세가 칠십인의 장로를 모을 때 이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되어진 것이고 여기에 순종치 않는 것은 모세의 말에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것이라해도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셨고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똑같은 하나님의 신이 강림하신 일을 어찌 사람이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판단한다면 문제이지요. 주께서 오시면 어둠에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비슷한 사건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9:38-39에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도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금하였다고 말하나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관용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싸주고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가는 일이 시급한데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나 하고 있다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적은 아닙니다. 요주의 인물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판단 요건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사도행전 5:33-39 말씀에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교법사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복음을 전하던제자들이 잡혀왔습니다. 그들을 없애버리려고 할 때 가말리엘이 말합니다. "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되었니다. 그러다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유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둡시다.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며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이 교회에서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교법사 가말리엘의 말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누가 훼방하고 말린다고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은 아무리 이루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각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되 하나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 끼리는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고 감싸주고 이해하는 관용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며 최선의 선택입니다. 처음에 예화로 드렸던 내용을 상기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미운 말썽꾸러기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운명이다. 마음에 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썽장이를 없애다 보면 함께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완전치는 못해도 서로 마음을 갖추어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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