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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썩을 몸과 썩지 않을 몸 / 사 25:7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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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을 몸과 썩지 않을 몸

구약의 말씀 : 이사야 25:7 ~ 9
또 주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주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하였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 전서 15:50, 53~55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복음서의 말씀 : 요한복음 21:15~17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쳐라."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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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난주간, 그저께 성금요일 저녁 우리 성가대가 하는 음악회, 참으로 감동적인 음악회였습니다. 와서 들으신 분들은 동감하겠지만 못 오신 분들은 참으로 유감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훌륭한 음악회였습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는 특별히 1부 예배는 어린이교회학교 중고등교회학교 학생들임 참석했고, 이 단순한 꽃장식이 아니고 이 아래 백합화들은 우리 교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꽃 한송이들이 우리와 함께 이 부활절 예배에 장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뜻 깊은 날이라 생각합니다.

부활절 설교를 이 교회에서만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할 때마다 이 부활절 설교처럼 힘든설교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장 라시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가운데, 목사가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 교인들 알게 하려고 열심히 하는데 그 어느 여성이 못알아 듣습니다. 그런 그림이 생각납니다.

저도 부활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고, 설교를 한 것은 꼭 70년전부터 입니다. 그 70년전에 교회에 다니고 하던 때에는 부활에 대한 문제를 어렵게 생각 안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으면 시체는 무덤에 가지만 영혼은 하나님 앞에 가서 교회에 나가고 세례를 받은 교인이고 교회에서 책벌 받은 일도 없고, 무험하게 믿은 신자가 되면 천당에 가고, 천당에 들어가 살게 되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대로 마지막날이 되게 되면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와하고 울려 퍼지게 되면,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하게 되면 그러면 무덤속에 들어가 있던 시체들이 다 무덤속에 나와서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새하늘 새땅에서 영원히 산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별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제가 흔들리게 되고 벽에 부딪치게 됐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한두가지 이야기를 하면 우선 제 2차 세계대전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핵무기가 나옵니다. 핵폭탄(원자폭탄)에 그것에 죽은 수만명의 사람들 그 사람들 시체가 없습니다. 그대로 날라간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니라 지금 요사이에는 나보고도 죽은 다음에도 화장하겠다는 서약서를 써라 하다면, 내 대답은 '나 못하겠다'. 그건 우리 가족들이 할 일이지 내가 할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만 요즘은 화장이 대 유행입니다. 화장을 하면 재를 통에다 담습니다. 그리고 재를 통에다 담아 흐르는 물에 좍뿌려 버립니다. 근데 예수님이 나팔을 불며 내려올 때 무덤속에 있던 시체들이 살아 나온다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한데 부딪치면서 다시 성경을 죽 읽어보면 성경에 생명이란 이야기가 300회 이상 나옵니다. 근데 사실 이런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사도바울은 죽어 썩을 몸이 절대로 썩지 않을 것을 이어받을 수 없다. 죽어 없어질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이어받을 수 없다. 그런 것입니다.

하물며 이 영혼이 하늘에 올라갔다가 나팔소리를 들으며 내려온다 하는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 당시에 이교도라고 하던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에 속한 것이지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일날 예배 드릴때마다 사도신경을 외우는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수십번씩 나도 신앙고백을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냐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것이냐에 이러한 문제를 많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내가 이렇게 깨달아서 내가 얻은 대답은 이렀습니다하고 한마디로 대답을 해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성서에 기록된 300번 이상 나오는 생명은 그것은 어떤 H₂O가 물이라는 식의 하나의 물리적인 법칙처럼 그렇게 선명하게 이야기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념화가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신구약성서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아담과 하와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뜻이 뭐겠는가

지금까지 모든 신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굉장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생각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 대로니까 하나님도 사람의 모양대로 코도 있고 눈도 있고 입도 있고 그리고 오장육부도 있는 그러한 분이라는 말뜻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저는 하나님 안에는 다른 어떤 피조물 안에도 없는 하나님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에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사랑과 생명은 불가불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지만, 그 안에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안에서 그 안에서 받아들이고 반사하고 사는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에덴동산 이야기를 들으면 여기에서 이 아담과 하와, 남자의 뼈로 하와를 만들었을 때 두 사람이 마주보는 때 무슨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면 '이 뼈는 뼈중에 뼈고, 내 살 중에 살이구나. 같은 뼈고 같은 살이다.' 그런 사랑의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하고 부르면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반갑게 뛰어가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 돌보고 가꾸고 살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 어떻게 사는냐 바로 생명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먹고 영원토록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결국에 뱀의 얘기는 뭐냐하면 욕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리에 욕심이 들어와서 사랑의 자리에 욕심이 나와서, 하나님처럼 되보고 싶다. 그래서 생명나무를 따먹지 않고 죽음을 만드는 욕심을 채워주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의 자리엔 욕심, 그러니까 이 생명의 자리에 죽음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와 죽음으로 운명 지워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인간들, 하나님은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느냐,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생명, 로고스, 그것이 육신이 되어 사람 가운데 왔다. 첫 번째 아담과 꼭 같은 모양이지만 첫 번째 아담은 아닌 하나님의 성육신 모든 인간과 똑같으나 다른점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그 분안에는 욕심대신에 사랑이 있었다. 사랑으로 자기 몸 전체를 바쳤다. 그것이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피 흘린 죽음으로 참된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진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나타났는데, 이 십자가에 죽는 예수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끝일 수가 없다. 거기에는 모든 것을 자기 팔에 피 한방울 까지 그 원수들까지 사랑하고 축복한 그 사랑을 죽음이 이겨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죽음이 지배하던 자리를 생명으로 바꿔 놓은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그러면 이 부활한 예수는 자기의 혼으로 자기 혼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기 위해 오신 것인가 그는 바로 이 거룩한 죽음을 정복한 사랑을 결국에 사람들에게 값없이 나눠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이다. 생명이라 다짐한다. 내가 곧 생명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참 생명 죽음이 이겨내지 못하는 이 생명, 이것을 너희들에게 줄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이것을 받을려면 나를 먹어라, 나 전체를 먹어라. 피를 마셔라. 내 살을 그대로 먹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살과 피를 다 주었으니 그것을 다 먹어라. 너희도 너희들 안에 내 사랑이 들어가는 그것이 무엇이냐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7절에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부활을 시키신 바로 그분께서 그리스도만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여러분 안에 바로 그 생명의 영을 여러분 안에 주어서 죽음으로 끝날 몸을 살린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이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안에 우리 안에 있는데 그것은 부활의 생명은 예수를 잘 믿고 교회를 잘 다니다가 죽는 때 그 때에 믿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는 영혼이 나온다 그러한 뜻으로 절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생명, 바로 그 영, 바로 내가 살아서 숨쉬는 현재, 오늘, 여기서 내 몸속에 와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부활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현재 살아 있는 내 몸에서 약동하고 몸부림 치고 있고, 용솟음 치고 있다. 내가 그것을 느끼고 현실적으로 믿고 산다. 그것이 나는 부활을 믿는 신도들의 생활이다. 이것이 진정 없으면 사실에 우리들이 믿는다는 거,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거, 그 이야기는 사실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닌겠는가!

결국 나 자신의 삶을 근원적으로 움직이고 나를 공부하게 만들고, 내가 취직을 하고, 장사를 하고, 내가 한 모든 것은 내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던 이 삶! 죽어버리고 거기에서 삶의 껍데기가 완전히 벗겨져 버리고, 그 안에서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에 나타난 부활의 생명이 왔다.

우리가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 나의 삶 속에서 현재 경험을 못한다면 내 육체는 살아있지만, 요한계시록 3장 1절에 보게 되면 내 육체는 살아 있지만 너는 살아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너는 이미 죽은 자다 말이야, 생명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오늘 요한복음 21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인 베드로에게 찾아옵니다. 이 베드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한 그분에게 이제 세 번 되풀이 물어봅니다. 너 이제는 나를 믿느냐 이제는 너 나를 모르겠다 아니하고 알겠다고 하겠느냐? 하고 물어야 옳은데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뭐냐면 믿느냐고 아느냐고도 묻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양을 먹여라.' 세 번 똑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양을 먹여라,' 끝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결국은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말씀을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생겨지느냐?

요한1서 3장 14절에 여러분이 보게 되면 결국에 내가 죽은 다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여서 정말 사랑을 받아들여 이것을 사는 사람들, 그 순간 죽음의 영토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영토로 옮겨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죽음의 영토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 유명한 샤르뎅은 우리에게 참으로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은 이 세상 안에 사랑의 인력권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랑의 인력권, 생명의 영토지 사랑의 인력권 안에 생명이 지배하는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진정 이러한 성경의 분명한 사실이 왜 우리는 그것을 다 알면서, 아직도 내 욕심의 껍데기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살아서도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은 몸이 되어지는 그것을 왜 벗어버리지 못하느냐. 이것은 사랑한다고 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통만은, 고통만은 없는 하나님의 축복 고통만은 없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갈라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십자가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시간적으로 금요일 오후3시에 죽고 그 다음 다음 날에 살아났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 십자가에 죽는 바로 그 속에 부활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고 산다고 하는 것은 역시 고린도 전서 15장에 '썩을 몸은 썩지 않을 것을 이어받을 수 없고 죽을 것은 죽지 않을 것을 이어 받을 수 없다'고 한 사도바울은 바로 53절에다가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않을 몸으로 바뀌어 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오늘에 우리들이 주님의 양을 먹이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뭡니까? 제가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정말로 예수 믿는 사람 부활절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 청각이 다른 것은 무엇이냐. 저 여리고로 가는 길가에서 불한당을 만나 피 흘리는 바로 그 사람의 죽어 가는 사람의 음성을, 슬픈 음성을 들어 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 사람에게 가서 돌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하면 너도 살리라. 영생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이었습니다.

지금 오늘 우리 귀에 들리는 신음 소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오후에 여기서 외국인 노동자의 삶, 또 우리에게서 한푼의 구호도 없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이북에 죽어가는 우리의 동포들 말할 것도 없지만,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은 이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사람에 대해서만 쓰지 말자. 여기에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한 이 동산에 동물들 식물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지금 죽어갑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지구 자체가 상처를 입고 죽어 갑니다. 이 지구는 뭡니까? 이 지구는 예수님의 양들을 먹일 젖줄입니다. 그 젖줄을 칼로 토막질을 해가지고 젖이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뒤덮고 있는 황사현상이 뭡니까? 서울 거리를 뒤덮는 미세 먼지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누가 만든 것입니까?. 우리가 오늘 지구의 아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데서 우리는 고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고통이 없는 즐거운 생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어져서 고난 속에서 정말 부활의 맛을 보고 그 고난 속에서 내가 사랑을 위해 겪는 고난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함께 하는 나를 경험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부활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얘기를 마쳐야겠는데. 여러분이 설교를 이렇게 하는 나보고 혹 이런 질문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목사님도 나이 많아서 언젠지 모르지만 오래지 않아서 여러분이야 세상 떠난다, 내 말로 죽을 텐데 눈감고 심장이 딱 멈추면 목사님을 그러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영으로 유령처럼 나타납니까? 그래 뭐로 나타납니까? 그 실체가 뭡니까? 그건 어떻게 생긴겁니까? 그 생명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는 겁니까? 그런 것을 물어 보고 싶지 않아요? 궁금하지 않아요? 나도 궁금합니다.
제 대답은 "모르겠다."

무슨 목사가 마지막에 모르겠단 말을 하는가... 내 책임 아닙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을 보면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신비 속에 있다. 그것을 마치 화학실험이나 물리실험에 얻는 것처럼 요렇게 요렇게 요런거다. 그렇게 말할 순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얘긴 할 수 있다. 전 그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내 죽음으로서 내 모든 것이 다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안에 들어온 그 사랑 그 사랑에서 결코 떨어 질 수 없다는 로마서 8장 39절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면 족하고, 그 이상 하나님 안에 있는 신비를 내가 엿보고 들여다보고 마치 내 손으로 만진 것처럼 얘기하는 설교를 할 마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참된 생명의 신비속에 숨겨져 있는 생명의, 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약동하고 있고 살아 숨쉬고 있고 그것이 내 몸으로 하여금 피 흘리는 자들의 얼굴을 보게 하고 지구의 비통한 아픔을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증거다. 나는 그것을 보고 그것에 응해서 살아가는 것 그 삶 속에 결코 끊어 질 수 없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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