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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에 관한 이야기 / 눅 8: 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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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에 관한 이야기
눅 8: 35-39

  오늘은 누가복음 8장 35절에서 39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존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여 얼마 동안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귀하고 천한 것은 재료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재료가 귀하면 그릇도 귀하고, 재료가 천박하면 그릇도 비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였든지 금그릇, 은그릇은 귀하게 쓰여지고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은 천하게 쓰여지는 그릇입니다.
  계속해서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금그릇이라 할지라도 더러우면 귀하게 쓰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일지라도 존귀한 그릇이 있고 비천한 그릇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큰집'은 '교회'라고 생각해도 좋고 '온 세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릇'은 우리 교회로 말하면 '우리 교인들이요', 세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들'을 두고 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존귀한 것들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보다 더 존귀한 사람 (35-37)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존재가 아니라 보다 더 존귀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존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하만물을 전부 지으실 때 유일하게 사람에게만은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고 할 때 얼마나 큰 영광이요,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게 됩니다. 타락을 했을지라도 사람은 존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봄 동산에 눈이 녹아지듯 전부 소멸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만 고장 난 것뿐입니다. 고장이 났을 때 고치면 다시 쓸모가 있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타락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망가진 영혼을 재생시키므로 하나님 앞에 제구실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천국의 후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사람은 존귀하나 전부 똑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존귀하고 중생한 사람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 보다 더 존귀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로되 전부 똑 같지 않고 보다 더 존귀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절에서 37절을 보면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거라사라고 하는 곳에 가셨습니다. 거라사에 갔더니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사람은 군대 귀신이 들려 있었습니다. 즉 귀신이 한 두 마리가 아니라 군대가 들어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힘이 장사였습니다. 쇠고랑을 채워도 다 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첫째 '옷을 입지 아니하고'라 하였습니다. 다 큰 사람이 벌거벗고 살며, 옷을 입어야 될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입어야 될 장소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도덕한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윤리 도덕은 사치일 뿐입니다.
  두 번째로는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서 살더라'고 하였습니다. 즉 공동묘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 거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 큰 어른은 집에서 살아야 되고 가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전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즉 무책임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공동묘지가 사람이 살 곳입니까? 거기가 사람이 있을 자리입니까? 자리 잡을 곳이 안될 자리에 서슴없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살지 않아야 할 곳에 가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귀신들려 미쳐야만 미친 사람입니까? 자기 가정에 대한 책임을 안 지고 엉뚱한 곳에 가서 살림을 차리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정에 이런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곧 본문의 주인공과 같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 하반절을 보면 '심히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지나가는 앞길을 막아 버립니까? 얼마나 사나운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헤꼬지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탈은 써서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인간 노릇이나 구실은 전혀 하지 않는 존재요,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도 그 사람 하나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귀신아 나가라'고 명하신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신을 알았습니다. 그 때 예수께 귀신에 들린 사람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즉 귀신이 "저 산비탈에서 풀을 뜯고 있는 돼지 2천 마리가 있는데 우리가 그리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이 2천마리 이상이었습니다.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예수께서 "무슨 소리냐? 당장 나가지 못해?"라고 명시면 나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돼지에게 들여 보내달라고 할 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신들이 돼지 속에 전부 들어가므로 눈이 뒤집히고 미쳐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미친 사람일지라도 사람 하나의 값이 돼지 2천마리 보다 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 밥벌이를 못해도 돼지 2천마리 보다 더 귀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식구 중에 문제를 일으켜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돼지 2천마리 보다 귀하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가자 성경은 첫째 '옷을 입고'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난 후에 그 사람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옷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것입니다. 옷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르지만 혹시 제자들이 주었는지 옷을 깨끗이 입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한 생활과 자세를 보여 준 것입니다.

  두 번째 '정신이 온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정신없이 살았다는 말입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없는 짓을 했다면 청산해야 합니다.

  세 번째 '예수의 발아래 앉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만났더니 예수에 의해서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예수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온 동네가 달려 붙어도 전혀 못하던 것을 예수께서 말씀 한마디로 완전히 변화시키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그것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을 보고 거라사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밀려나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주님 우리 동네에서 빨리 떠나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예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시고 떠나 가셨습니다. 예수께 떠나달라고 한 뜻은 '주님이 이 곳에 계시면 우리 돼지가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돼지 몇 마리가 우리에게는 귀할 뿐이요, 예수는 귀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정신이 온전해진 귀신 들렸던 사람, 예수의 무릎 아래 앉아서 무릎 꿇고 주의 제자가 되고 떠나지 않고 주와 함께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존귀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돼지 몇 마리 때문에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리는 즉 예수를 내 쫓아 버리는 그 사람들이 존귀합니까? 사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예수로 알아서 귀히 여기고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더욱 존귀한 사람입니다. 철두철미하게 예수의 제자로 사는 존귀한 사람이 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보다 더 존귀한 가정 (38-39상)

  가정은 존귀합니다. 내 가정만 존귀합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똑같이 존귀합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제는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주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40년 목회 생활 뿐 아니라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활해 온 것을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내용 중에 한 제목이 나의 결혼생활입니다. 제가 연애를 열심히 하던 이야기, 중매자가 중매를 서서 만나보고 결혼 할 뻔했던 이야기 등을 자세히 썼습니다. 제 아내는 제가 전혀 생각도 안 했던 여자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만나서 쉽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지 않으면 10년을 연애하였을지라도 결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파탄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지 않았는데 억지로 결혼을 하면 결혼한 후에라도 깨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동네가 달려 붙어 중매를 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지 않으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니 엉뚱하다 싶은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제 아내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어야만 성사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결혼한 여러분들의 아내, 여러분들의 남편은 하나님이 오죽 잘 알아서 짝지어 주셨겠습니까? 그래서 내 가정이 귀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가정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존귀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보다 더 존귀한 가정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8절에서 39절 상반절을 보면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이 나가서 온전해 진 사람이 "나는 예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 없이는 못 삽니다. 즉 나와 함께 계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내가 어디든지 따라다니면서 예수께 시중 드는 제자가 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래라"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데리고 다니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감격하여 시키는 일은 다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했는지 일일이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교육으로 되었습니까? 안 배우는 것은 배우는 것 만 못합니다. 즉 배우는 것이 안 배우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배운다고 하여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되는 것은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네게 행하신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완전히 새로워지고 변화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께서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변화가 아주 큰 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정에 예수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네가 구원을 얻었으면 빨리 가서 네 가정부터 구원하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은 전부 귀하지만 구원받은 가정은 보다 더 존귀한 가정입니다. 이 때 그 가정에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가정이 벌컥 뒤집혔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지만 뒤집혔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아니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정은 하나같이 예수를 믿고 예수가 이렇게 좋더냐 우리는 예수 덕분에 살수가 났다고 하면서 난리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가정이 보다 더 존귀한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도 예수 안 믿는 사람 없이 하나같이 예수를 믿어 벌컥 뒤집히고 새로워지고 달라지는 존귀한 가정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안 믿는 식구가 있어서 신앙과 불신앙이 싸우고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다 같이 예수를 믿어 "예수"이 한마디에 하나가 되고, "믿음"이 한마디에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존귀한 가정이겠습니까?
  스코틀랜드에 안드레 마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유명한 목사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가정에 대해서 써 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보면 자기 4대조 조상 즉 4대조 할아버지가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예수를 믿지 않고 막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가 화란 여자인데 얼마나 경건하고 독실한지 자녀 12명을 낳았습니다. 경건하고 독실해서 12명을 낳은 것은 아닙니다. 축구팀을 한 팀 만들어 놓고도 한 사람이 남아서 박수치며 응원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자녀를 하나같이 예수 잘 믿는 자녀로 키웠습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3대를 지나고 2대를 지나서 자기까지 내려 왔는데 즉 4대를 거쳐왔는데 그 가문이 모두 312명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목사가 모두 42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내 놓으면 알만한 저명 인사들이 많아서 절대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인사가 대다수입니다. 그렇기에 어디에 내 놓아도 너무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312명중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만 존귀한 가문이요, 존귀한 가정입니까? 믿지 않는 가정보다 믿는 가정이 보다 더 존귀한 가정입니다.
  귀신들렸던 사나이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가정으로 돌아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누가 믿지 않겠다고 하겠습니까? 가정이 벌컥 뒤집혀서 전부 하나같이 예수를 믿고 충성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가정이라고 해서 전부 똑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가정은 존귀한 가정이 있습니다.

  셋째, 보다 더 존귀한 사명 (39하)

  남자가 장가들어서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리고 오면 남편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혼하여 아들 딸을 낳으면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밖에 나름대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명과 여러분들의 사명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즉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어도 못할 사명, 죽었다 살아나도 못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7절을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있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백한 말입니다. 내가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데 이 사명을 위해서는 내 목숨이라도 내어놓고 생명을 투자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 사명이 그렇게 귀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생명 보다 사명이 귀하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사명이 있어서 태어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니까 사명이 주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기 까닭에 생명 보다 귀한 것이 사명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알기 까닭에 사명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투자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은 못합니까? 오히려 더 잘 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 노릇하는 것도 믿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도 잘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주께 받은 사명은 복음 증거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다른 어떤 사명보다 더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9절 하반절을 보면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에게 또 어디에 가서 무엇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까? 집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큰 일 행하신 그 복음 즉 네가 변화된 사실을 일일이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성내에서 전파했습니까?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면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자기 집에까지 가는데 입을 꼭 다물고 갔겠습니까? 너무 감격하여 입을 다물라 해도 다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집에까지 가는 동안 성내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온 성내 사람들이 달려 붙어도 절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예수께서 해결하지 않았느냐?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 나는 예수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노라. 이렇게 새 사람되었노라. 너도 나를 보고 예수를 믿어 보라"는 식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이 사명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체험적인 은혜가 중요합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생생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10월 6일부터 4일 동안 총동원 출석 전도하는 특별한 기간을 정해 놓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가족 혹은 가문 또는 친구 그리고 이웃들에게 이 사명을 잘 감당해서 성공하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놀아운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함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에 사무엘 챠드윅이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꾸 구두를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구두 닦기가 죽기 보다 싫은데 자꾸 닦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학교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죽기 보다 싫은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아버지가 매일 아침이면 구두를 닦으라고 하는데 정말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 그럼 네 생각을 조금 바꾸어 보자" "그래요? 그럼 구두를 닦지 않아도 됩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지의 구두를 예수님의 구두라 생각하고 한번 닦아 보아라"고 하였습니다. 그 나이 때는 선생의 말씀을 잘 들을 때가 아닙니까? 정말 예수의 구두라 생각하고 닦으니까 싫지가 않았습니다. 아침을 기다려 열심히 구두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 다음에 학교에 다닐 때에는 내가 예수를 위해 공부한다고 생각 하니까 공부가 그렇게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교회 학교 선생의 그 말 한마디에 자기의 인생은 변화가 되었고 이렇게 목사가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일, 즉 예수가 이렇게 좋다, 예수 믿고 나는 이렇게 되었노라, 너도 나를 보고 예수 믿어 보라고 증거하는 사명이 가장 존귀한 사명이라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보다 더 존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자체는 똑 같지만 더 존귀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변화된 사람, 새로워진 사람, 어제보다 오늘에 달라진 사람은 보다 더 존귀합니다. 둘째는 보다 더 존귀한 가정이 있습니다. 가정은 모두 다 존귀하지만 온 식구가 다 같이 예수 믿고 예수의 일,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같이 손발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가정이 보다 더 존귀한 가정입니다. 셋째는 보다 더 존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명이 있어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그 큰 일을 일일이 고하는 일 즉 복음 증거하는 일이 보다 더 존귀한 사명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시고 이 사명에 충실하여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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