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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속에서 씨앗을 보신다 /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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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에서 씨앗을 보신다 (딤전 1:12-17) 

이태리 화가요 조각가요 건축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 헤매다가 로마 어느 교회를 찾아가 성가대원으로 아름다운 용모와 신앙생활을 잘하는 모범 성도로 "삐에트로 반디넬리"를 선택하여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후에 가룟 유다를 그리고 싶어 로마거리를 다 찾아다니다가 징그러운 거지요 흉칙한 사람, 보기만 해도 끔찍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데려다가 그렸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삐에트로 반디넬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정반대의 두 가지 모습을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지만 나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모습은 나쁜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만남 이후에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거나 더 나쁜 모습으로 변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자주 듣고 잘 아는 바울이 변화된 자신을 솔직하게 고백한 말씀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지금은 나를 능하게 하시고 그의 일군 삼아주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고 아들과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다 털어놓은 고백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도 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능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15)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얼마나 험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고 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복음의 훼방꾼 노릇하다가 주님 앞에 깨어져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못 된 인간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능하게 변화됩니다. 예수님 만나지 않고는 제아무리 세상에서 똑똑하고, 도덕적으로 점잖고, 대단한 줄 알아도 죄 값으로 죽어 지옥 불에 떨어질 가련한 죄인일 뿐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15)



바울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네가 죄인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다. 그것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과거사로 말하지 않고, "괴수니라"고 현재사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죄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을까요?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을 붙들고 싸운 결과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을 볼 줄 모르고 다른 사람 잘못만 보고 살기 등등하게 설쳤던 바울입니다.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겸손히 낮은 자리에 처하면 능한 자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5;5).



자기 직분에 충성된 자라야 능하게 변화된다(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직분을 맡길 때에 자격이 있어서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충성 되이 여겨서 맡겼고 긍휼을 베풀어서 맡긴 것입니다(고후4:1). 부족하지만 충성된 사람은 점점 능하게 변화되어 갑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쓰십니다.



재주 있고, 건강하고, 시간도 많고, 재물이 있어도 충성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좀 지나면 주신 것도 다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점점 약해지고 무능력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충성된 자에게 직분을 맡기시며 그 직분에 감당할 만한 능력과 은사를 주십니다. 그것을 직능이라고 하는데 충성된 자에게 주십니다. 충성된 자는 추수하는 날에 어름 냉수 같아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잠25:13).



우리들도 이제부터 능하게 쓰임 받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납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 줄을 압시다. 맡겨주신 직분에 충성을 다합시다. 이런 자를 반드시 능하게 해 주시고 믿음과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그 주님께 감사합시다



미리 내다보시며 우리 속에서 그 씨앗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키워주시는 방법은 "인정"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인정을 받으며 먹고 마시며 자라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정해주고 일을 맡길 때 우리는 힘을 다해 일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사회인으로 성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같이 하십니다.



80세가 되었던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부탁 받았을 때 극구 사양했습니다. "정말 주님, 저는 죽어도 그 일은 못합니다" 라는 식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결국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사환같이 일했습니다. 그를 충성 되이 여겨 크거나 작거나 주님의 일을 맡겨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작아 보여도 큰 일을 맡기십니다. 바로 구령, 영혼 구원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혼과 함께 불우한 분들을 살피며 소외된 이웃에게 머슴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잃은 양 같은 영혼들, 소외된 이웃, 그분들을 맡기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장차 변화될 모습을 보십니다. 미리 내다보시며 우리 속에서 그 씨앗을 보시기 때문에 일을 부탁하십니다.



우리 속에 충성된 마음을 보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영혼구원)을 맡기시는 것은 우리를 충성 되이 여기시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능력을 주시면서 직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사도의 직분, 복음전하는 직분을 주신 것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사울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청년 때에 그는 무척이나 교회를 핍박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을 그리스도께서 '충성 되이 여겼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가 모든 일에 충성할 그런 사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난 후에 주님이 그를 보실 때 그를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 되이 일할 사람으로 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게된 것은 이런 은혜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신 성도님들, 또는 아직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실까요?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을 충성된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보시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주시겠다는 적극적인 뜻이 담긴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제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아, 이 일은 어느 분께 부탁드려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이는 그 분이 충성스럽게 일할 가능성을 보는 것도 있지만 그분을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도록 해드려야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충성된 종"으로 보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보신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위대한 일을 성취합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만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도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개발 해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새 생명 잔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혼을 생각할 때 불쌍하고 소외된 삶을 생각할 때 불쌍하며 도우면서도 우리가 잘 난 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한 그런 선교가 필요합니다. 불쌍한 마음을 품은 선교운동, 교회운동이 되어야 비로소 교회는 운동에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죄와 허물이 많을 경우에도 고의적이 아니고 실수로 알지 못하고 행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알지 못하고"란 말씀은 지식적으로 알지 못하였다는 말보다는 이해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소식을 알았어도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이해하지 못했었기에 바울은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인 줄 알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허물보다 우리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용서와 평화를 주시려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긍휼 때문에 성장합니다. 이 긍휼을 따라 우리도 이제 소외된 분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면서 전도함으로써 새 생명 잔치에 초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은혜의 빚진 마음을 보신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하실 때에 한 죄인인 여인이 와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셔 씻으며 옥합의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 주인에게 말씀합니다. 눅7:44-46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랑의 빚, 은혜의 그 빚진 마음이 클 때 우리는 주님의 먼지 덮힌 발과 같은 우리의 이웃, 소외된 지체를 향해 우리의 눈물과 향유로 부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불쌍히 여기심 받은 데 대한 감사가 있을 때에야 우리의 어려웠을 때, 고난의 때, 환난의 때에 긍휼을 베푸신 주님을 향해 보답하는 심정으로 이웃을, 소외자들을 더 힘써 찾아주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 안에, 여러분들 안에 이 사랑의 빚진 마음, 은혜에 빚 진 마음을 아십니다.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우리는 의인의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고 아직도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신분으로는 의인이니 "죄인인가, 의인인가를 물으면 의인입니다" 라고 해야 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 면에서 "우리는 이미 그 것을 전제하고서 우리 자신을 씻고 겸손히 주님의 일을 위해 사랑의 빚, 은혜의 빚진 자로서 충성하기 위해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외쳐야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우리 하나님이 보시며 기대하시는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산모의 인내심을 보신다



적어도 모교회의 하나로서 세워진 우리 교회에게,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동정녀 마리아같이 거룩한 모태를 준비한 우리 성도님들에게서 주님은 산모의 인내심을 보기 원하십니다. 사실 여인이 인내하려고 해서 합니까? 그 어머니의 인내, 산모의 인내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거룩한 모태를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모 태에 태신자를 잉태하게되는 것입니다. 태신자! 한자로 풀자면 "잉태된 신자" 란 뜻입니다.



믿는 자를 잉태한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첫째는 불신자의 잉태

어떤 사람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으나 우리의 믿음 속에서는 그분이 앞으로 믿음을 가지고 신자가 될 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분은 우리의 믿음 속에 잉태 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라고 하신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태신자가 된 분을 우리는 소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저 분이 예수님을 믿게 될 거다", "저분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오며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나는 믿음으로 본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주여, 믿습니다. 저분을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기까지 믿음 속에 품고 있겠나이다. 해산의 날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대상이 첫 번째 태신자입니다.



(2) 두 번째로는 신자의 잉태

태신자의 또 하나는 예수님을 이미 믿고 거듭났지만 그러나 마치 새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신앙의 변화, 열심이 필요한 경우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태신자로 품고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때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 사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아주 희생적이었던 신자들이었습니다.



(갈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이런 분들이 신앙생활에 뒤로 후퇴하자 바울 사도는 이들을 태신자로 삼았습니다. 다시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마음에 잉태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은혜의 모습, 신앙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기도하면서 말합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갈라디아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태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로서는 이른바 장기결석교우들 중에 이런 태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회복의 은혜가 바로 태신자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잉태하고 출산하는 기간 내지는 과정이 필요하게됩니다.



즉, 태신자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의미는 (3) 일정 기간의 잉태기간입니다. 태신자의 회임기간, 임신기간,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품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죄인 중에 죄인으로 행동할 때도 주님은 그를 참고 계셨습니다. 바울사도의 부족함을 참아주셨습니다. 이런 기간에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태신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품고 계시는 그 기간을 인내하셨습니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태신자는 "일체 오래 참으심"이 필요합니다. 그 오래는 산술적으로 시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잉태와 출산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 계산법에 해당합니다. 어떤 때는 한 달의 태신자가 천년같이 안타깝게 시간을 끄는 듯 느껴지고 어떤 경우는 수년이 지나도 잠깐 지난 것같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든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래 참는 인내 속에서 태신자는 태어납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새 생명 잔치를 위해 태신자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적극적인 복음운동, 전도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운 확장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챤의 영적 코드-충만 



더 이상 성장을 멈춘 아이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도무지 충만하지 못한 우리를 주목하시며 가슴아파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의 충만함을 위해 몸 찢고 피 흘려주신 주님이십니다.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는 상황들이 어떠하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충만한 영혼(내적 충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바라는 소망과 기대는 자녀들의 '건강'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충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와 문제는 충만하지 못한 교인들의 증가와 부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내적 성숙 없이 몸만 커지는 아이와 같이 내적 충만 없는 외적성장은 하나님의 코드가 아니며 그것은 중대한 위기입니다.



열매 없는 잎의 무성함, 성숙 없는 성장, 변화 없는 부흥, 방향 없는 속도, 목적 없는 성취는 우리가 전심을 다해 대적하고 싸워야할 이 시대의 골리앗입니다.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 충만과 곤고함이 동시에 공존하지 못합니다.



충만하지 않으면 그런 대로, 그럭저럭 살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곤고함으로 다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방안에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 차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럴 수도 있음에 소망은 있습니다. 어두운 방안에 불을 켜면, 어두움은 서서히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의 곤고함도 그와 같이 순식간에 충만함으로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충만해야 할 것들이 부족하고, 부족해야 할 것들로 충만해지면 그 시간부터 우리의 삶은 극심한 기갈과 황페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이다 병에서 사이다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에 공기로 가득 채워지듯이 우리에게서 충만이 빠져  나가면 그 자리에 온갖 죄성, 독성,악성,상처,쓴뿌리...들로 무성하여 지는 것입니다.

충만함은, 해결되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초월케 하는 힘입니다. 충만함은, 형통케 하는 힘이 아니라, 막힘도 감사케 하는 힘입니다.

충만함이란, 온갖 무성한 잡초들과 쓴 뿌리를 제거함이 아니라, 오히려, 잡초 같은 인생들을 날마다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어 쉬게 하심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잊어버리게 하는 은혜(망각의 은혜) 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충만할 것을 부탁하거나 의논하지 않습니다. 다만, 명령할 뿐입니다. 충만함은 크리스찬의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며, 부전공이 아니라 전공과목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세상의 영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으며,

신령한 것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육의 것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으며, 의로운 것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죄들로 충만할 수밖에 없으며,

영의 생각으로 충만할 수 없으면 육의 생각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건강함보다 건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듯 충만함보다 이미 주어진 충만을 지키는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다. 충만은 현재이어야 합니다. 어제의 충만도 내 것이 아니며 내일의 충만도 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충만해야 합니다. 어제의 충만함으로 오늘의 문제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유능한가? 얼마나 유명한가? 얼마나 유식한가? 어느 교회 출신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직분이 무엇인가? 얼마나 소유하고 사는가? 아파트 평수가 어떤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도 충만한가? 지금도 충만한가? 무엇이 우선순위인가? 를 묻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신가요? 지금은 어떠신가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요인

한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여러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매우 중요한 요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교회가 가진 지도력입니다.  그러면 누가 지도력을 갖습니까? 목회자요, 중직자 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의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고, 교회 성숙의 책임은 중직자에게 있다.'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과 성숙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두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한 수레는 앞으로 진행할 수 없습니다. 제 자리에 서 있거나 간다고 해 봐야 맴돌 뿐입니다.

교인들이 바라보는 그룹이 바로 이 그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눈에 쉽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보다 앞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목회자요, 당회원이요, 안수집사요, 권사입니다.  '저 분이 저 정도 신앙생활 하는데 나는 이 정도면 되지'하는 생각이 많습니다. 중직자의 신앙의 선이라고 하는 것이 특별히 당회원의 신앙의 선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의 책임은 거의 담임을 하는 목회자에게 있다."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라는 한 개인의 문제이지만 중직자들이 함께 져야 할 짐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의 대부분이 목회자와 중직자들의 모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목사가 '어떤 모습으로 주 앞에 서있는 자인가'가 매우 중요하고 동시에 그 교회에 '어떤 중직자들을 세우느냐'는 그 교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사활이 달려있다 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지금 교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피부로 실감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의 앞날을 책임져나가야 할 중요한 직책을 맡은 교회지도자들이 전도운동에도 앞장서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영혼구원의 큰 운동을 맡기시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주님의 믿음의 눈은 그렇게 보십니다. 새 생명 잔치를 위한 태신자 운동은 우리 교회 부흥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딤전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 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하나님은 "만세의 왕" 이십니다. 만세의 왕, 변질이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내세우시고 숨으셔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창조주로서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그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만세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성경에서 천국과 세상을 구별하는 표현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대"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오는 세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만세, 모든 세대의 왕이시란 말씀은 이 세상과 천국에서 다같이 다스리는 주권자시란 뜻입니다. 만세의 왕이신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함 없이 불쌍히 여기시면서 두 세계를 다 보시면 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세대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 천국에서 살 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준비는 무엇입니까? 다음 세대에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쓸 면류관이 있는데 바로 우리가 전도해서 주님을 풍성히 만나서 새 생명으로 새 출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 : 25)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우리가 태신자를 삼고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영성을 닮아가는 것을 볼 때 기뻐하고 간증을 삼아서 거룩한 자랑감이 되는 분들이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여러분, 이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냥 입으로만 "영광을 돌립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표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의 중요한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우리는 오늘 전도하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자, 전도하자, 그리고 넓게는 온 땅에 선교하자, 이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하고 그래서 봉사하며 그래서 만민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도 하는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태신자 운동은 하나님께 구원운동의 영광을 돌려드리려는 운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전 교회가 전 구역, 남녀 선교회, 교회학교가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전도팀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으신 후에 큰 역사는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일에 힘껏 참여하시는데 특히 구역 지도자들이 이 운동에 크게 앞장 서셔야합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온 구역이 온 세상을 교구로 삼아 선교의 장막을 펴는 구역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소외된 자를 찾아서 나아갑시다. 먼저 말씀의 세계 속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갑시다. 새 출애굽의 행렬을 일으키고 그 선두에 서서 앞장서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우리 주님도 우리를 오래 참으신 후에 40년을 기다리시고 광야의 목자생활 하던 모세를 부르셨듯이 이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오래 참을 각 오를 가지고 긍휼의 모태 속에 태신자를 품읍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 속에서 분명히 거룩한 영혼의 씨를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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