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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잠재력 / 요 1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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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잠재력 (요 14:6-18)

영국의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3,000년 된 미라에서 곡식단지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완두콩이 들어 있었습니다. 3,00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돌덩이같이 딱딱하고 쪼글쪼글해서 도무지 생명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가서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전도하면서 "1년생 식물도 3,000년 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열매를 맺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100년도 못살고 죽어서 없어지겠는가?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식물에게도 생명의 잠재력이 있지만,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의 잠재력이 있음은 틀림없는 확고부동한 진리인 것입니다.

달걀과 오리알을 부화시켜서 호숫가에 갖다 놓으면 오리 새끼는 물을 보자마자 들어가 헤엄치며 노는데, 병아리는 물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병아리는 헤엄치는 본능이 없고 오리는 헤엄치는 본능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 됨은 생명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 순간부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정치, 경제, 종교, 학문, 사상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들입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류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생명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긴 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생명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은 일정한 어떤 목적을 향해 계속 흐름이 진행되어 갑니다. 생명은 결코 정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에게는 불안과 동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들에는 동요가 없습니다.

둘째, 이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어떤 통합적인 완성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이 손상을 입거나 파괴되면 다른 부분에 깊은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나무와 숲을 마구 훼손하고, 물과 땅을 오염시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연과 관계에서만 더욱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모든 형체를 가진 생명체들은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땅은 어머니입니다. 어린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의 품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가듯이 모든 생명체들에게 땅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땅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생명체들이 죽으면 역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넷째, 이 생명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그러한 등급은 모든 피조물들의 각양 각색의 종류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류, 곤충류, 동물, 자연(나무, 풀, 꽃, 채소)등 이중에서 최고의 등급은 인간입니다. 생명의 최고의 등급인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살아있는 것들과의 유기적 관계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개발하고 보존해 가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다섯째, 특히 인간은 생명의 실체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력을 갖게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공급받지 못할 때 무기력, 무의미, 고갈에 빠지게 됩니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을 찬양합니다. 시인이 세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매우 예리합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주의 영광은 영원하다
  주님은 친히 행하신 일로 기뻐하신다.
  주님이 굽어보기만 하셔도 땅은 떨고,
  주님이 산에 닿기만 하셔도
  산이 연기를 뿜는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때까지 시를 읊어서,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다."



시인은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지 않고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하신 분이 생명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 창조의 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공동체인 이 세상은 인간의 탐욕, 이기심으로 자꾸 훼손되고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 없는 상황에서 매우 희망적인 새로운 사건을 신약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읽는 관심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창조활동과 그가 지향해 가는 목표가 무엇인가입니다.



오순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인간 역사에 임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 매우 신비로우면서도 우리의 일상성에서 깊은 관련이 있는 것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 나타나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 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령 자체는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일어난 현상들입니다. 이것들은 성령이 생명의 영, 창조의 영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1: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 2:6)고 했습니다.



역시 오순절에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혼돈의 역사에 임하시므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습니다. 그 인간은 탐욕과 이기심에서 희망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엡4:6)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생의 "원리와 패러다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성령에 의해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났습니다. 그 공동체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세상의 기존 공동체와는 다른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통일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한 지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로 넘어가고 계십니다. 이 성령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어느 한 개인, 집단의 소유물로 남아있지 않고, 한 개인, 한 공동체를 넘어서 가십니다. 성령이 지향해 가는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한 개인을 넘어 전 우주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그 자체가 성령의 사역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지평을 나 개인으로부터 인류로, 내 가정에서 전 세계로 현실에서 영원으로 넓혀주십니다. 독일의 각성 운동 설교자인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는, 우리는 "종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 교회에서 세계에 이르는 길, 개인적인 근심에서부터 전체에 대한 희망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경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새로운 생의 계획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희망의 계획은 우리 집 울타리 안 만을 가꾸고 보존하고, 우리 가족만을 잘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 안에서만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아주 작은 창조적이며, 윤리적인, 생명적인 선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낙심 좌절, 무의미성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나 한사람의 생존을 위해 먹고 배설하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상한 갈대, 생각하는 갈대, 살아 있는 갈대



인간은 육신으로 보아도 연약한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조금만 과로해도 피곤해 합니다. 조금만 굶어도 힘을 못 쓰고,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노쇠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다 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약한 측면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흔히 인간은 강한 의지와 신념과 인내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숱한 염려와 근심, 미움과 갈등으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갖가지 어려운 사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연약한 측면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뜻대로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해 주시면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그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요14:16)"



우리 인간들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는 생명에는 분명 잠재되어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잠재력을 개발하고 발휘하여야 합니다.



역동적인 삶의 변화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생명(life)' 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생명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생활 속에 역동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채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온전한 신앙생활에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믿으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말씀이 말씀으로만 머물러 있으면 생명의 역동성을 잃어버립니다. 깨달음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이성적이고 지성적이 될지는 모르지만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지성이란 때때로 인간을 이중적으로 만듭니다. 확신이 없고 불안해집니다. 남이 지성적으로 보이니까 자신도 지성인인 것처럼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늘 갈등이 있습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분열과 교만을 가져오고 불순종을 가져옵니다.



성경은 '머리로 깨닫고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말씀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사는 생명 있는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주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동물은 바로 인간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태아가 탯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다가 세상에 태어나면 폐로 숨을 쉬고 입으로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또 영적인 동물이므로 영적 분위기에 쉽게 변화되어야 할 텐데,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자연인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인간의 편견과 교만과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는 무기력한 신앙은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전적으로 믿는 마음의 신앙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 구절을 대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당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팔레스틴의 지역적 환경과 문화적 제한 속에서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 복음을 전하자 3천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개발하여 지리적, 문화적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이지만 보다도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의 능력은 배우면 배울수록 한없이 무한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백 사람의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가능성을 믿고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난 할 수 없어. 나는 배우지도 못했어"라고 하며 자기의 잠재력을 믿지 않고 배워서 개발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파괴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절하하며 경멸하며 자신을 비하하며 멸시하는 사람, 적개심을 가진 사람, 의기소침한 사람,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여 훈련시키고 믿게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정신적 질병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려고 하고 파괴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지성인의 모습인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 모두를 망하게 합니다. 썩어지는 한 알의 밀 알에서 많은 결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아주 작은 겨자씨에게서 많은 열매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흰 바탕에 검은 잉크가 묻은 천이 있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넓은 흰 바탕은 볼 줄 모르고 까만 점만 보고서 그것이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왜 넓은 흰 바탕은 볼 줄 모릅니까? 그런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도 개발하지 못하고 항상 뒤떨어지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짧은 시간을 보지 마시고 긴 시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에 지배당하게 되지만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루종일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자주적이지 못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소망 가운데 날마다 개발하고 노력할 때에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믿는 대로 생활 속에 활용하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기도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에 옮길 때에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에 옮길 때에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일어나게 되고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개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순종하는 일을 가정과 교회에서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보살펴 주고 의지하고 사랑의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심되었을 때 서로 격려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도장이 가정과 교회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우물, 사랑의 우물, 생명의 우물을 관대하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얼마나 그 지식의 우물, 사랑의 우물, 생명의 우물이 깊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미도 주님께서 구원을 허락하신 우리 성도들 안에는 생명의 잠재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증식의 기적을 보라



결핍 의식의 반대는 풍성함의 의식입니다. 풍성함의 의식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는 양식, 지식, 사랑 무엇이든 모든 사람이 갖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내어 주게 됩니다. 배곯은 사람을 보면 음식을 줍니다.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지식을 나누어줍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마주치면 우정과 애정과 관대함으로 대접하고 그들을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개합니다.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복음을 나누어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면, 우리는 양식, 지식, 사랑, 생명 등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 몇 배로 증식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도 또 많이 남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고 순종하면 축복하신다는 믿음만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반쪽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생활에 적용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을 책임져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형제에게 사랑과 용기를 주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부자는 무엇인가를 이루어 가는 사람



평범한 말이지만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루어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누리는 사람입니다. 부자는 풍성함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10억을 가진 가난한 사람이 있는 반면, 백 만원을 가진 부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자로 살 것인지, 가난한 사람으로 살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합니다. 정말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사는 동안 그 무엇을 사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용하는 그것을 그만큼 잘 누리고 그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부자로 사는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참 자유합니다. 그것에 의해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은혜, 그것이 증식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 구원의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그 생명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의 힘을 발휘하고 개발하여 남아있는 시간동안 여러분의 삶이 그 증식의 기적을 이루는 삶, 풍요의 의식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상의 것, 즉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빵과 생선, 그리고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그 이상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관대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다하여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볼 수 있고 향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하지 않는다, 우리가 노래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윌리엄 제임스가 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관대함을 받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찬송하기 때문에, 경배하기 때문에 우리가 풍성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세상은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 노력과 지혜가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놀라운 가능성을 개발하고 활용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강한 것 같지만 실상은 넘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뒤에서 도우시는 분이 계셔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뒤에서 보호해 주시는 부모님이 있을 때에 아이들의 잠재력이 개발되고 능력이 커지는 것처럼, 우리는 부족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뒤에서 지키실 때에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평화롭게 합니다.





큰 생명공동체에 연결된 한 지체



한 40대 초반의 그리스도인 자매가 건강체크 과정에서 암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암이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행한 선고를 받게 되셨습니다. 이 분에게는 중학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이 자매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첫째는 고통스럽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이라도 이 땅에서 더 오래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어차피 이것은 고칠 수가 없는 병이기 때문에 집에서 편안히 요양을 하면서 덜 고통스럽게 죽음을 대비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내가 엄마로서 무엇이 최선일까? 아내로서, 엄마로서 내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치료받기로 결단을 하고 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매우 감동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이 가정 사역 전문 잡지에 났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에게는 죽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선택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너희들이 틴 에너지의 시절, 사춘기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너희들에게 엄마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너희들 곁에 있어 주기 위해서다. 어떤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나는 너희들이 정말 필요했던 시간에 엄마가 너희들 곁에 있었다는 그 기억을 위해서 나는 이 질병과 더불어 투병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기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는 인생 그리고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웃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생명의 잠재력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내가 살기 위해서 이웃들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인터넷이 그물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 세계가 서로 통하는 것처럼, 생명도 인간과 자연, 할 것 없이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인터넷이란 전 세계에 있는 컴퓨터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정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내 방에 앉아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전 세계 누구든지 와서 볼 수 있고 가져갈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나 자신이 큰 생명공동체에 연결된 한 지체가 됨을 뜻합니다. 전에는 나 중심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생명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 생명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그 교회의 머리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생명만 중요하게 여기던 좁은 시야를 버리고 이제는 전체 생명공동체를 보면서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게 됩니다. 이 생명공동체가 살아날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의 은총을 나누게 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연결되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명의 네트웍크에 연결되기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의 시야를 넓히십시오. 나만을 위한 삶에서 이제는 이웃을 돌보고 환경을 생각하며 전체 생명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11월5일 새생명 잔치를 앞두고 있습니다.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영암교회의 한 소중한 지체로서  새생명 운동에 모두가 참여하여 태신자를 갖고 잉태하여 구원에 이르는 새생명 잔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무기력해졌을 때에 보혜사 성령이 여러분 곁에 계셔서 인도하시는 영으로, 확신을 주시는 영으로, 변화시키는 영으로 여러분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생명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주신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역사에 동참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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