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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명한 것 같이 / 살전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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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명한 것 같이
살전 4: 9-12

  오늘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에서 1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명한 것 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1절을 보면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라고 하는 말을 '우리'로 바꾸어 제목을 '우리에게 명한 것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명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전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성경이 우리에게 명한 것 같이 라고 하여도 좋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면 알 것입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에는 공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공식이라고 하는지 무엇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기하학 문제를 풀 때에는 공식과 똑 같은데도 공식이라고 하지 않고 원리라고 하였습니다. 수학을 풀든지 기하학을 풀든지 간에 공식과 원리가 있고 그 공식과 원리를 대입시켜야 문제가 전부 풀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풀리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반드시 풀어야 하는 문제에는 공식이 있고 원리가 있는데 그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랑의 생활 (9-10)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새 계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한가지 덧 붙여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새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새 계명이 있다는 것은 옛 계명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옛것이 없으면 새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옛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똑 같은 말입니다. 옛 계명의 표준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표준이 바뀌어서 '네 몸과 같이'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내가'라는 말은 예수님이 사랑한 것 같이 라는 뜻입니다. 옛 계명에는 '네 몸과 같이' 사랑은 사랑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표준이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표준이 새로워지면 계명도 새 계명이 됩니다.
  옛 계명에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몸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는지 소주병을 들고 나팔을 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건강이 견디어 낼 재간이 있겠습니까? 술에 오간장이 다 녹아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사람이 시커멓게 변해서 죽어갑니다. 제가 제 몸을 얼마나 망쳐 놓습니까?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자꾸 술을 퍼 먹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 몸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새 계명의 표준은 "예수님이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 사랑을 표준으로 하여 너도 사랑을 베풀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웃을 위해 예수님이 죽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죽어줄 만큼 사랑했는데 내가 왜? 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합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미워하면 결과는 예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을 예수님이 어떻게 사랑했는가? 나를 예수님이 어떻게 사랑했는가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명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에서 10절을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라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교인들끼리 사랑하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을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굳이 몇 마디 하라고 하면 첫째로 너희들이 지금 나누고 있는 사랑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을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모범적인 사랑입니다. 즉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이야기를 하다가 왜 마게도냐 라는 말이 나옵니까? 헬라 나라가 둘로 갈라집니다. 그래서 한 쪽은 아가야라고 합니다.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입니다. 한 쪽은 마게도냐라고 하는데 마게도냐의 수도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얼마나 자기들끼리 사랑을 많이 하는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 모든 다른 이웃 교회 교인들까지 사랑하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까지라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범적인 사랑입니다.
  셋째로는 끝없는 사랑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래도 한 마디를 더 권한다면 더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 같이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사랑이 넘치는 교회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명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딸이 시력이 너무 나빠서 보이기는 보이는데 더듬어야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내가 두 눈 중에 한 눈은 빼서 딸에게 주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습니다. 여러분 눈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단을 한 의사가 "어머니 오른쪽 눈은 그렇게 좋은데 왼쪽 눈은 오른쪽만큼 좋지 않고 조금 덜 좋습니다. 의학적으로 눈을 빼려면 덜 좋은 눈을 빼는 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어머니가 뭐라고 하였을 것 같습니까? "더 좋은 오른쪽 눈을 주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고마운 분인 줄 아십니까? 어머니의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눈을 빼서 딸에게 주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그런 것입니까? 전혀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래도 그림자만큼 흉내를 낼 수 있는 사랑은 어머니가 아들 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르침을 따라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사랑하는 사랑이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똑 같은 것입니다. 내가 다 먹고 입고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사랑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성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명하는 바입니다. '내가 굶더라도 너희에게 밥 한끼를 준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현대에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이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은 사랑의 생활을 명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근면의 생활 (11-)
  십계명 중에 제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제 4계명은 하나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만 외우고 끝내 버립니다. 중요한 것이 안식일을 지켜 예배하는 것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주일을 반드시 지키어 예배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은 왜 빼어 버립니까? '주일을 반드시 지켜 예배하라'는 것과 '엿새동안은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은 똑 같은 계명입니다. 엿새동안 게으름을 피우고 얻어먹고 살다가 주일에 나와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일을 안 지키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믿는 사람으로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주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열심히 일만하고 주일을 안 지키는 것이 나쁘다면 주일을 지키면서 엿새동안 철저하게 놀고 먹는 것은 똑 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들에게 부지런한 생활을 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놀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저보고 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들은 젊었을 때 즉 일할 만할 때에 일할 만큼 다 일하신 분들입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어찌하였든지 간에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명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근면의 생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1절을 보면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첫째 떠들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일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일하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가르치면서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는데 주님이 재림하면 세상은 끝나고 우리는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히 영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재림을 듣고 배운 사람들이 오해를 하였습니다. 몇 일 안 있으면 주님이 재림하는데 우리가 이렇게 애를 쓰고 노력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성경을 읽고 기도만 합니다. 그러면 밥 먹을 것이 나옵니까? 안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열심히 믿는 광신자들이 주님의 재림만 기다린다고 하면서 놀고 먹고 얻어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교인들이 너무 딱해서 '오늘 우리 집에 오라'고 하여 저녁을 차려 대접하면 얻어먹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은 다른 집에 가서 얻어먹고 다음 날은 또 다른 집에 가서 얻어먹는 것입니다. 그럴 적에 "어떻게 사느냐?"하고 물어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얻어먹는 거지가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고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일 재림한다고 해서 왜 오늘 놀고 먹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떠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네가 할 일은 열심히 하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일하되 힘써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근면의 생활을 명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내일 10시에 재림하신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10시에 재림하는데 왜 집에 가겠는가 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철야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것에 속지 않으십니다. 내가 일상적으로 하던 신앙 생활을 철저히 해 나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김창인 목사에게 물어 보면 제가 뭐라고 대답할지 아십니까? 5부 예배 마치고 좀 쉬었다가 저녁 예배에 참석할 것입니다. 제가 요즘에 특별히 기도할 일이 있어서 철야 기도를 하고 있기 까닭에 저녁 예배를 마치면 철야 기도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것입니다. 푹 자고 나면 아마 아침 10시쯤 되어 깰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재림하시면 "주님 이제 오십니까?"하고 맞이할 것입니다. 내가 생활하던 대로 생활하다가 주님을 맞이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엉터리로 하던 생활을 그대로 하겠다고 고집하지는 마십시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날 그 날의 할 일을 충실히 힘써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앤드류스라고 하는 청년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박물관 임시직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임시직인지라 마루를 닦는 일을 하였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미국에서 할 일이 없어서 박물관에서 마루를 닦겠습니까? 어느 날 박물관 관장이 그 모습을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여보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가 많은데 무엇 때문에 임시직으로 마루 닦는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관장님 박물관의 마루라면 문제가 나에게는 다릅니다"라고 하면서 계속 마루를 닦았습니다. 관장은 참으로 신통한 청년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청년은 다른 사람보다 한시간 먼저 출근하여 마루를 닦았습니다. 그러다가 박제과에 사람이 나가고 자리가 생겼을 때 정식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일을 마치고 난 후에는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는지 고래에 대해서 연구하다 보니 고래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만 있으면 가방을 둘러메고 무엇인가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으러 다니다가 세계 최초로 하나밖에 없는 공룡 알을 발견했습니다. 계속 성실히 일하다 보니 높은 자리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나중에는 미국 자연과학박물관 관장이 되고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동물학자가 되었습니다. 놀고 먹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까? 기도만 해서 된 것입니까? 그렇게 근면의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기도의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도와 노력은 쌍벽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근면이 빠지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근면 중에 기도가 빠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근면의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근면의 생활은 성경이 명하는 바입니다.

  셋째, 단정한 생활 (12-)
  단정이라는 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옷을 입어도 단정하게 하고 우리가 모든 행동이나 태도에도 단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단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라고 하는 '좋은'이라는 단어와 '스케마'라고 하는 '모양'이라고 하는 단어와 합해서 이루어진 합성어로 '좋은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모양새가 좋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모양새가 나쁘다고 하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이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들로서 얼마나 겉모습 즉 모양이 좋습니까? 그런데 마음에는 갈 생각이 손톱 끝만큼도 없어서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속은 전혀 모양이 좋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당회에서 "예"라 하여 결정해 놓고 그 다음날 딴 소리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아들에게 가서 일하라고 하니 작은 아들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모습이 좋지 않습니까? 겉모습이 나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본래 내가 그런 것이 아닌데'라고 생각되어 뉘우치고 갔습니다. 속이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날 당회나 제직회에서 무엇을 하자고 하면 무조건 "아니오"라는 말부터 먼저 해 놓고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같은 값이면 "예"하고 갈 일이지 "아니요"하고 갈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또 맏아들은 "예"라고 했으면 갈 일이지 왜 안 갔습니까? 그랬으면 겉도 속도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겉모양도 생활의 태도도 참으로 모습이 아름다워야 하고 속 중심도 모습이 좋아야 합니다. 즉 모양새가 좋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을 보면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인을 대하여'라는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 대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얻어먹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면 얼마나 모양새가 나쁩니까? 그러므로 네가 열심히 일하고 조용히 일하고 네 일에 충실해서 자립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는 사람으로서 단정히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모양새가 얼마나 좋으냐는 것입니다. 너 자신도 아무 궁핍함이 없으므로 베풀 수 있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으니 네 자신도 얼마나 모양새가 좋으냐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면 남에게 안으로 들어오면 나에게 안 밖이 좋은 모습을 지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단정한 생활이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링컨에게는 정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텐톤입니다. 이 사람은 군사 전문가입니다. 스텐톤이 얼마나 링컨 대통령을 헐뜯고 욕을 하는지 링컨에게 콜레라의 원조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그를 불러서 국방 장관을 시켰습니다. 그쯤 되면 욕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스텐톤은 장관이 되어서도 '당연히 내 실력이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앉게 했고 네가 나를 잘 봐 주어서 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 욕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스텐톤과 링컨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텐톤 장관이 편지를 써서 대통령에게 "내가 너무 속이 상해서 편지를 썼는데 한번 들어봐 주십시오. 그 놈의 장군이 얼마나 나에게 못되게 구는지 내가 편지를 썼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편지에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별 욕을 다 썼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던 링컨이 "그 놈 참 못됐구먼. 그 놈 죽일 놈이구먼. 세상에 그런 못된 놈이 어디에 있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하에 안하무인격으로 노는 놈인데! 그런 사람은 가만히 두면 안 돼 참으로 편지 잘 썼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텐톤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 다음 스텐톤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 편지를 붙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링컨이 "자네 그 편지 진짜로 붙이려고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요" 그러나 링컨이 "됐어, 여기에 있는 화덕에 집어넣어 자네가 하도 속상해서 그랬을텐데 편지 쓰는 동안 마음이 조금은 풀렸을 꺼야. 그리고 나한테 읽어 주면서 더 풀렸을 꺼야. 그리고 내가 그냥 들거니 놓거니 욕이란 욕은 다 해 주었으니까 자네 기분이 좋아졌을 꺼야. 자네 이제는 편지 보낸 이상으로 효과를 보았으니 난로에 집어넣어. 나도 화났을 때 쓴 편지를 반드시 난로에 집어넣는다네"라고 하자 스텐톤이 편지를 난로에 집어넣었습니다. 나중에 링컨이 죽은 다음에 스텐톤이 얼마나 울었는지 아십니까? 스텐톤은 "내가 만난 세계적인 인물 중에 최고의 인물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링컨은 겉모습이 얼마나 좋고 속모습은 얼마나 단정한 사람입니까? 겉도 모양새가 좋고 속도 모양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생활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원하고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우리들에게 명하는 생활은 첫째 사랑의 생활입니다.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을 했는가 예수님이 표준이 되어 베푸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둘째 근면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처럼 엿새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경이 명하는 근면의 생활입니다. 셋째 단정한 생활입니다. 겉모양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모습을 지니고 속마음도 모습을 좋게 지니는 안팎이 단정한 생활이 성경이 명하는 생활인줄 믿고 성경이 명하는 대로 일주일을 살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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