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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필수생활 / 롬 1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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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필수생활
롬 12: 18-21

  오늘은 로마서 12장 8절에서부터 2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필수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할 때 배워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약을 만드는 법 또는 복용하는 법입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배워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분의 아들이 지금 마약 때문에 인생이 파멸상태에 이르고 있지 않습니까? 마약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배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배워도 되고 안 배워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배워도 되고 안 배워도 되는 것은 내가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배우고 싶지 않으면 배우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공부를 흔히 선택 과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변호사가 되려면 법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지 않습니까? 소설책을 읽다가 '내가 변호사 되겠오' 하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의사는 병 고치는 법을 배워야하지 않습니까? 목사는 성경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필수 과목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첫째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활이 있습니다. 둘째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생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는 왈가왈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리스도인이기에 반드시 해야하는 생활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필수생활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생활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평화의 생활 (18-)
  이 말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화평케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책은 반드시 감당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은혜와 은사가 많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방언하는 사람들도 많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많고 통변하는 사람들도 많고 병 고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교회라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교회는 분쟁이 아주 심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패거리들이 많아서 얼마나 잘 싸웠는지 모릅니다.
  그 패거리들은 첫째 고린도 교회를 개척해 놓고 떠난 바울 중심으로 모인 바울파가 있었습니다.
  둘째 바울이 떠난 다음에 아볼로라고 하는 목사가 와서 시무를 했습니다. '나는 떠난 사람은 상관없다고 하면서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 아볼로파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셋째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베드로가 으뜸이다'라고 하여 모인 베드로파가 있었습니다.
  넷째 '베드로는 무엇이냐? 예수가 최고지'라고 하는 예수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패거리를 짓고 자기들 패거리끼리만 모였습니다. 자기들 패거리끼리만 몰려가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자기들끼리 둘러앉아서 들거니 놓거니 별별 말을 다 하였습니다. 교회의 꼴이 무엇입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고린도후서 5장 18절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화목케 하는 직책을 줬는데 극상 하는 일이 패거리를 짓고 싸우는 일이나 하느냐? 그렇게 되면 교회가 무슨 꼴이 되겠느냐? 빨리 그런 짓들을 집어치우고 화목케 하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책을 감당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화목의 생활, 평화의 생활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와의 화목, 즉 너와의 화평을 이루려면 너에게 손해를 보라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너에게 참으라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참아야 합니다. 너에게 희생을 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화평케 하는 직책'은 그렇게 희생을 하면서도 감당해야 하는 직책입니다. 그리고 교회 평화를 이루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을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로 말씀을 주실 때 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평화 혹은 화목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교회에는 주인들이 나오는가 하면 종들도 나왔습니다. 부자가 나오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도 나왔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나오는가하면 배우지 못한 사람도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세도가 있는 사람이 나오는가하면 전혀 세도가 없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자유인이 나오는가 하면 노예도 나왔습니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피부 색깔도 각각이었습니다. 흰 사람도 나오고, 노란 사람도 나오고, 검은 사람도 나왔습니다. 그 당시 로마 자체가 인종 전시장이라 할 만큼 각 종족들이 로마에 몰려서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다 보니 교회의 구성요원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그 교회는 화평 즉 화목이 절대로 필요한 곳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교회가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분쟁이 심해져서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이 싸움에 휘말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할 수가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였습니다.
  '할 수가 있거든'이라는 말씀은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들면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우리나라 형편을 보면 남과 북이 싸우다가 그만 싸우자 하여 휴전선을 그어놓고 지금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불안하기만 합니다. 언제든지 누가 총을 한번 먼저 쏘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형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평화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입니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평화는 영원한 평화요, 참된 평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할 수 있거든 즉 최선을 다해서 교회의 평화를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평화만 이루면 됩니까? 직장에서도 평화, 가정에서도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생활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되는 필수생활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에덴 동산이 왜 낙원입니까?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께서 없는 것 없이 전부 갖추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전부 갖추어 놓았으니 낙원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아담을 혼자 만들어 놓으니까 이 나무 아래 가서 열매를 따먹고, 조금 있다가 저 나무 아래 가서 열매를 따먹으면서 이리저리 즐기고 거니는 것은 좋아 보였지만 사실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너무 외로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낙원입니까?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데려다가 아담과 짝지어 주시니 얼마나 좋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낙원이 된 것입니다. 온갖 좋은 것 갖추어도 아담에게 아내 하와가 없을 때 낙원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와가 있기에 낙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와에게는 아담이 있기에 낙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없는 것 없이 집에 다 쌓아 놓고 난 다음에 남편은 떠나가도 괜찮습니까? 이 모든 것은 다 가져가고 남편을 돌려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로 이루어주신 이 가정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기에 낙원인 것입니다. 또한 이 두 분이 오래 오래 살면서 머리가 하얗게 변할 때까지 아들 딸 한 명도 없다고 해 보십시오. 좋기만 하겠습니까? 거기에 아들도 있고 딸도 있으니 얼마나 보기 좋고 살기 좋은 낙원입니까? 그래서 낙원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서로 미워한다면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평화가 없이 아담 하와가 하루에도 열두 번을 싸운다면 그 곳이 어떻게 낙원이겠습니까? 평화가 이루어질 때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정에 미움 대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절망 대신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으나 자주 싸움이 일어나고 평화가 없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평화가 바탕이 되고 평화가 울타리가 되고 평화가 뿌리를 내리고 정착될 때 여러분들의 가정은 낙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위해서 할 수만 있거든 즉 최선을 다해서 가정에서 또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런가하면 직장에서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생활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생활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사랑의 생활 (19-20)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죽은 사람이 아닌 세상에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다고 하여서 마귀의 자식까지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변함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변덕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들 중에 변덕 부리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변덕 부리는 사람을 만나거나 사귀어 보면 죽을 맛입니다. 변덕을 왜 부립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변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 싫증을 내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면 누가 빼앗을까봐 꼭 쥐고 놓지 않습니다. 누가 빼앗는 듯 하면 악을 쓰며 울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가지고 좋다고 노는 것입니다. 다음날 그 장난감을 다시 줘 보십시오. 그 장난감을 어떻게 합니까? 집어던집니다. 집어던진 장난감을 다시 가져다주면 또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새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다시 그 장난감을 가져다주면 또 집어던집니다. 그 장난감에 대해서 싫증을 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람에게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변덕을 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덕을 부리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변덕을 부리는 사람은 "오늘은 너 없이는 못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너는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아직도 살아있는 자기 사람들인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변덕 없이 사랑하십니다.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이렇게 사랑해 주셨기 까닭에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빚은 꼭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빚을 자기에게 갚아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웃에게 갚으라고 하십니다. 네가 거저 받았으니 이웃에게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엄청난 사랑, 주님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고 갚는 사랑의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크신 사랑을 베푸시고는 이웃에게 갚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생활은 필수생활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9절에서 20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있을 때 그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기에 갚을 경우에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원수를 갚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원수를 갚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원수 갚는 것은 내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갚겠다고 하셨습니다. 원수에게 축복을 못 하겠거든 '하나님 저 원수를 하나님께서 알아서 갚아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원수에게 복을 주시든지, 심판하여 멸망을 시키시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라고 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원수 갚는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시우라'고 하셨습니다. 퍼다 주라는 것입니다. 퍼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원수가 내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으라고 가만히 있습니까?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 것은 애굽의 풍속 중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서 애굽에 아주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사기 당하고 망했는데 내가 저러는게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기 당한 사람이 오히려 사기를 친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고 때를 따라 퍼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사기꾼이 비로소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비참해 졌는데 이게 아니지'라고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절실히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핀 숯불을 담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잘 못이요. 나는 저 사람에게 못할 짓을 했으나 저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사랑을 베풀었오. 저 사람은 죽일 사람이라고 그렇게 내가 욕하고 헐뜯고 다녔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잘못이요. 양심이 너무 가책이 되어 못 견디겠소'라는 뜻으로 숯불을 이고 돌아옵니다. 그 풍속을 예로 들어서 오늘 본문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라 그러면 저 사람들도 양심이 있어 숯불을 이고 동네를 도는 것처럼 너의 원수도 양심에 가책을 받고 회개하고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를 갚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자녀가 가만히 있습니까? 그 자녀는 나에게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에게 원수를 갚을 때 내 자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시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는 원수를 낳습니다. 원수를 풀고 해결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원수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라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복되고 지혜롭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 빚을 졌기에  원수에게까지 라도 이 사랑을 베풀어 그 빚을 갚는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승리의 생활 (21-)
  블레셋 나라와 이스라엘 나라의 군대가 서로 대진하여 싸우려고 합니다. 블레셋 대장이 나타났는데 키가 9척이나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보다 절반이나 더 큰 키입니다. 손에든 창은 베틀채 같았습니다. 너희 군대와 우리 군대가 모두 싸울 것 없이 1:1로 싸워 끝내자고 큰 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자기와 상종할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야단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골리앗 대장을 보고 기가 죽었습니다. 그 때 어린 다윗이 물 맷돌 다섯 개만 가지고 달려나갔습니다. 하나님을 저렇게 모욕하는 저 놈을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골리앗이 큰지 그 골리앗의 큰 것만 생각하면 감당을 못하겠다 하여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크긴 큰데 물 맷돌이 비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아무렇게나 던져도 가서 맞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달려 나아가면서 물 맷돌을 던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마에 박혀 쓰러졌습니다.
  여러분 큰 문제가 닥쳐오거든 감당 못하겠다 하면서 주저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내 물 맷돌이 피 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지라도 골리앗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다윗은 칼이 없는지라 골리앗이 차고 나왔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 목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이를 본 여자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천천인데, 다윗은 만만이라는 그 영광을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 때부터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제 칼에 제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죽이려고 칼을 차고 나왔다가 그 칼에 자기가 죽지 않습니까?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을 죽이려고 했던 칼에 내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를 불러 영광을 다윗에게 돌렸습니다. 그 여자들의 노래가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만, 하나님은 천천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영광을 하나님께 전부 돌렸으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요, 다윗이 그 난리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도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하나님이 만만이요, 천천이라고 하여 자기에게 오는 영광을 전부 하나님께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자기가 받고 있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그런 자세를 시정하기까지 40년 가까운 동안 죽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긴 결과 블레셋 군대들이 도망을 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달려 나아갔습니다. 자기들이 나아가 싸워서 이긴 것입니까? 다윗이 싸워 이겨 놓은 싸움을 좇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대장 다윗이 이겨놓은 싸움을 싸운 것뿐입니다. 승리는 맡아놓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한 다윗과 함께 한 것뿐입니다. 우리 대장 예수님이 마귀와 더불어 그리고 죽음의 권세와 더불어 또 악의의 세력과 더불어 싸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보기 좋게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신 그 예수와 함께 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1절을 보면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한 일을 할 때 나는 선을 베풀어주면 내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악의 근본이 누구에게서 나옵니까? 마귀에게서 나옵니다. 선의 근본은 누구에게서 나옵니까? 하나님, 혹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은 예수와 함께 하여 악의 근본이 되는 마귀를 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하였습니다(롬 8:37). 그러므로 우리의 승리생활은 예수와 함께 필수적인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필수생활은 첫째 평화의 생활입니다. 반드시 해야 되는 필수생활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들은 화평케 하는 자라는 별명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랑의 생활입니다. 엄청나게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빚을 이웃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베풀어 갚으면서 사는 사랑의 생활은 필수적인 생활입니다. 셋째 승리의 생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악령과 더불어 싸워 이기셨습니다. 죽음의 권세와 더불어 싸워 이기셨습니다. 세상의 왕 마귀와 더불어 싸워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선하다면 얼마나 선합니까?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할 때 악의 근본이 되는 마귀와 더불어 싸워 이긴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예수와 함께 항상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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