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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이야기 / 행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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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이야기
행 17: 1-9

  오늘은 사도행전 17장 1절에서 9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전 주일에는 하늘 나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고 지난 주일에는 새 사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믿음 이야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었다'라고 합니다. 재산은 내게 들어왔다가 나가기도 하고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에 재산을 잃는 것은 적은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었다'라고 합니다. 시간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에 허송세월 하는 것은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었다'라고 합니다. 건강을 잃고 죽으면 끝나기 때문에 전부 다 잃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 놓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목숨보다, 건강보다 더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는 사람에게서 믿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배움단계의 믿음 (1-3)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의 믿음은 듣는데서 시작이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으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들음은 전도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 얻으세요"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믿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면 설교를 통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들음"은 성경공부를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배우는 중에 "진리가 여기에 있다. 생명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면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는 들음 즉 성경공부에서부터 출발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3절을 보면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를 떠나 이리 저리 다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헬라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는 유대 사람이 절반이요, 헬라인 토박이들 절반이 살고 있는 큰 도시입니다. 바울이 그 곳에 이르러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아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런데도 어느 도시에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이 있으면 그 회당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같은 값이면 내 동족에게 먼저 전도하여 구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 안식일 동안 바울이 자기의 규례 혹은 습관을 쫓아 성경을 읽고 아주 쉽게 풀어 가르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조상적부터 기다리는 그리스도요, 메시아라고 하는 그 분이 오셔서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전부 뒤집어쓰시고,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은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가지고 증명을 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큰 권세를 가지고 로마 군병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나라를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는 반드시 죽고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가 예수요, 그리스도가 예수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쉽게 풀어 가르치더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진리가 있다. 여기에 생명이 있다'라는 것을 믿고 돌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이처럼 성경공부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하고, 그 성경 공부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할 만큼 말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인 성경공부에서 재미있게 믿음이 출발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초보적인 단계요, 출발은 성경을 배우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을 배움에 있어서는 즐거움과 재미가 있어야 하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오세정이라고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경기 고등학교가 전국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고등학교였습니다. 이 학생이 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일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요즘과 달라서 누구나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이 너무 많은 관계로 입학 원서를 낼 때 제한을 해야 하므로 대학입학 자격 고사를 치렀습니다. 나라에서 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똑같은 문제를 놓고 전국적으로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전국적으로 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대학을 지원했는지는 여러분들이 벌써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 대학은 수재만 모인다고 하는 대학인데 입학 시험에서 또 1등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고 있었는데 4년 후에 또 크게 신문에 났습니다. 그 학교를 졸업할 때 일등으로 졸업을 해서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이 학생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문 기자가 가서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학교에 가기 전에 오늘 공부할 것을 집에서 미리 예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표를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서 배울 때 모르는 것은 '아 이것이로구나'하고 깨우치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예습하면서 모르겠다고 한 것,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들어 깨우친 것을 다시 복습을 하여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배우는 대로 자기의 실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공부에 재미가 있었고 그 학생에게는 공부가 곧 생활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실력 즉 1등을 했다는 것이 나쁠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나쁘다고 하실 분들이 계십니까? 그러면 꼴등이 좋습니까?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듣든지, 성경공부를 체계 있게 하든지 재미있게 하고 그 성경공부가 우리 믿음 생활에 분명히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적에 믿음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출발되고 믿음에 싹이 튼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배움 단계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이렇게 출발하고 점점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나 기초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생활단계의 믿음 (4-)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고 머리에 많이 기억해 두고 지식으로만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서 입을 열었다하면 성경이 줄줄 나온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생활화되지 않으면 지식적인 믿음이요, 이론적인 믿음이요, 사색적인 믿음이요, 관념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절대 그 믿음은 써먹지를 못합니다. 어디에 가서 믿음 노릇을 못합니다. 반드시 그 믿음은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생활화 된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을 보면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전도를 했는데 왜 헬라인의 큰 무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그리고 왜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돌아옵니까? 경건한 헬라인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면서 회당을 세웠습니다. 헬라인들이 유대인들의 믿음 생활을 살펴보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하나님이 참신인지라 지금까지 자기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우상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경건한 헬라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수가 큰 무리라는 것입니다. 결코 적은 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귀부인은 그 분들의 아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참석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해석을 통해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믿어도 예수는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도 예수도 함께 믿지 않습니까?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로 그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생명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쫓았다는 말씀은 바울과 실라라는 사람 자체를 쫓았던 것이 아니라 그 교훈 즉 성경의 가르침을 쫓았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우상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가서 하나님을 믿더니 복음이 전파된 후에는 기독교로 개종을 해서 하나님도 믿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종이라는 것이 말로만 끝나는 것입니까?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까? 행동이요, 실천인 것입니다. 헬라의 많은 사람들과 귀부인들의 믿음은 행동이요, 실천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생활화된 믿음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보일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여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서 영혼이 떠나면 그 몸은 죽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 무엇을 합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믿음은 행함 즉 생활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인 헬라인들과 그 귀부인들의 믿음이 바로 생활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단계로 믿음이 향상 발전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예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내가 내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되느냐? 또는 내가 내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처신이 난감할 때 내 입장에 서신 예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셨을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을 행동과 처신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화 된 믿음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생활화되었고 생활 속에 믿음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생활과 믿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교회에 가두어 놓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예배하고 믿음은 교회에 놓아두고 가정으로 직장으로 가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믿음을 여기에 놓아두고 즉 교회 안에 가두어 놓기 까닭에 직장에 가서 욕을 먹는 것입니다. 믿음을 직장으로 가정으로 가지고 가서 내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 곧 믿음이 되는 것이 생활화 단계의 믿음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의 믿음이 성장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셋째, 순교단계의 믿음 (5-9)
  순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라고 할 때에 순교적인 자세를 가지지 못하면 죽을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죽을 죄로 잘 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게 빌다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왔다 갔다 했을지라도 그런 믿음을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언제나 죽인다고 하면 끝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순교적인 믿음은 '예수 믿으면 죽는다'라고 할 때 '죽일 테면 죽여봐'라고 하면서 목을 내 놓는 것입니다. '죽일 테면 죽여봐'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목숨을 내 놓고 죽기를 한사코 믿는 믿음은 천하가 당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면 죽인다'라고 할 때 죽을 죄로 잘 못했다고 하면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100명, 1000명이 모이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믿음을 위해서 목을 내 놓고 순교자적인 자세로 대드는 한 사람을 당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나가서 일당 100을 하고 일당 1000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세상이 뒤집어 진 것입니다. 순교적인 믿음의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절에서 9절을 보면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길지만 설명은 간단합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안식일에는 반드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성경을 풀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야손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예수를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전부 야손의 집으로 모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는지라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의 그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다시 개종하는 까닭에 시기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자에 나가서 괴악한 사람들 즉 깡패를 동원시키고 야손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을 붙잡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바울만 죽이면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손의 집으로 달려갔더니 숨겨 놓기는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 놓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한 그들이 야손과 형제들을 끌어내었습니다. 여기서 형제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믿음의 형제를 가리킵니다. 군중심리로 소요를 일으킬 때 끌고 가다가 죽인다면 아니라고 나설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 괴악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하나씩만 들고 가면 살림이 끝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돌로 치기 시작하면 목숨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 그 때 그가 살길은 '바울을 여기에 숨겨놓았소'라고 하면서 바울이 숨은 곳을 알려 주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소'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손과 그 형제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끝까지 끌려갔습니다. 재산은 가지고 갈테면 가지고 가고, 가다가 죽일 테면 죽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끌려가다 보니 읍장들 앞에 갔습니다. 읍장들이 냉정하게 살펴보니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기에 보를 받고 놓아주었습니다.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보석으로 풀어주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순교적인 사람을 누구가 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믿음이 자라고 자라서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같은 귀한 일꾼이 그 교회에서 난 것입니다. 일꾼도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교적인 믿음을 가진 가정에서 귀한 일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자적인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믿음은 천하가 당하지 못합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렇게 잘 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적인 믿음 단계까지 우리는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들의 믿음은 첫째 배움 단계의 믿음입니다. 철저하게 성경공부를 하고 그 말씀 위에서 믿음을 시작했습니다. 둘째 생활단계의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사색적이고 지식적이고 이론적으로 끝나면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은 생활화되어질 때 믿음 속에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때 그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순교단계의 믿음입니다. 목숨을 내 놓고 충성하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일당 100, 일당 1000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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