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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길 / 눅 9: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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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길
눅 9:23-29

  오늘은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29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충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신다, 혹은 그리스도가 오신다 라고 예언해주신 그 메시아, 그 그리스도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으나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인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이 오직 구원의 길입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모두 다릅니다. 저는 평생 목사의 길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목사의 길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업가들은 지금까지 사업가로서의 길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사업가의 길을 살아 갈 것입니다. 또 공무원들은 공무원의 길을 살아왔고 공무원의 길을 살아 갈 것입니다.
  이렇듯 살아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지하여 이 길에 대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제자의 길 (23-)
  제자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스승도 제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성인을 꼽을 때 소크라테스를 먼저 꼽습니다. 이 분은 훌륭한 스승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로는 플라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스승을 만났다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또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같은 제자를 만났다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 학문, 생활, 인격에 대해서 글자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지만 플라톤이 모든 것을 다 써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스승으로 스승이 되게 하는 제자였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예수님이십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보다 10배 100배로 좋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제자는 스승 자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스승의 학문, 인격, 생활, 정신을 모두 배우며 스승을 닮아가고 섬기고 높이는 것이 제자가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을 '나의 제자가 되려 하거든'이라고 말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세 가지의 제자의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고 나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 집이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도 하나님의 집이다. 또 내 아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님의 딸이며 내 자녀들 역시 내 아들딸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심지어 내 목숨도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분명히 믿고 고백하게 될 때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살을 하여도 그 것 역시 타인을 죽이는 살인죄와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것이라면, 나의 생명도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것을 분명히 할 때, 나를 부인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자기 십자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결혼해서 시어머니의 학대를 자신의 십자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고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그런 고난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것은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나라는 역사상 그런 일이 없지만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까닭에 로마가 식민지 백성들 중에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처형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을 당하는 사람은 그 십자가를 지고 길거리를 지나 사형이 집행되는 그 장소까지 자기가 죽을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길거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며 구경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진 사람은 조금 후에 형장에서 못 박혀 죽을 사람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진 사람은 반드시 죽으러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죽음을 등에 지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즉 죽을 각오를 하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는 '나를 좇을 것이니라'입니다. 좇다, 따르다는 헬라말은 따라가다 좇아가다의 뜻도 있지만 닮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를 좇으라, 나를 따르라는 말은 나를 닮으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면 그 것은 잘못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씨, 마음씨, 생활, 인격, 정신을 닮아갈 때 진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당이나 천주교의 성당들을 보면 색유리로 만든 창이 있습니다. 그 색유리 제품에 대해서 아주 능숙한 기술자가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그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견습공을 자원하였습니다. 즉 제자가 되었습니다. 1년, 2년, 3년이 지나도 도무지 선생님의 솜씨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가 좋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고 선생님이 없을 때 선생님의 도구를 살짝 갖다가 사용해 보았더니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보다도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연장은 나름대로 자신이 길을 들여 쓰는데 선생님의 것은 자신에게 길들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 나는 왜 이렇게 잘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나의 겉모습을 닮으려 하지말고 나의 정신, 정성을 본받아야 하는 걸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즉 겉모습을 닮으려하지 말고 속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열 두 제자와 함께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는 겉모습을 닮아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 정신, 인격, 생활을 본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 생명의 길 (24-26)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한 쪽의 길은 너무 좁고 험해서 그 길을 가려고 하면 고생이 훤할뿐 아니라 계속 가다보면 문이 있는데 그 문이 너무 좁아서 사람들이 그 길로는 가지를 않았습니다. 고생스럽지만 그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 가보면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 길은 넓고 평탄하고 문도 넓고 큼직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이렇게 고생스러운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을 편하게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너무 고생스럽고 어렵지만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며 살다보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힘든가'라고 생각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가시면 그 길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4절에서 26절을 보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투자를 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망하는 사업에 투자하면 할수록 더 크게 망합니다. 흥할 사업에 투자하면 할수록 더 잘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 이 세상에 투자합니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위해서 돈이 생기는 대로 또는 시간이 나는 대로 투자합니다. 그리고 피와 땀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투자를 합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재물과 시간, 온갖 노력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를 투자합니다. 그리고 나서 죽을 때 판가름이 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늘나라가 없다고 생각하며 세상에 투자했고 믿는 사람들은 세상은 잠깐이요, 하늘나라에서 영생하는 줄 믿고 하늘나라에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죽고 난 후에 하늘나라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없으면 우리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분명히 하늘나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고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어떻게 하면 영생하고 구원을 얻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내가 내 자신에게 투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투자하고 예수님께 투자하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즉 예수께 투자하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죽음으로 끝날 세상을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처럼 투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하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투자하면 할 수록 흥하고 잘 됩니다. 이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아주 인색한 부자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칫 잘못해서 강물에 빠졌습니다. 헤엄칠 줄을 몰랐기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발만 동동 구를 때에 젊은이 한 명이 뛰어들어 죽을힘을 다하여 그 사람을 건져 주었습니다. 죽을 목숨 살려줬으면 "고맙습니다"라는 말만으로 끝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자기를 구원해준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감사를 해야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큰 돈이 잡히자 주머니에 다시 넣고 적은 액수의 돈이 잡히면 꺼내곤 했습니다. 결국 20전을 감사의 표시로 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욕을 하는지, 듣기 민망할 정도로 욕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더니 "그럴 것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자기 인생의 값이 20전이요, 사람의 값이 20전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값이 그렇게 싸구려입니까?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내 목숨을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 모두 투자하고 하늘나라 위해 투자하고 영생을 위해 투자하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값집니다. 흥하는 하늘나라 흥하는 예수님께 투자하고 영생의 길, 생명의 길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체험의 길 (27-29)
  바울사도가 다메섹길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기도생활을 했지만 누가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고향인 길리기야 다소에 가서 세월을 보내며 썩고 있었습니다. 이 것도 다 하나님의 훈련과정입니다. 한번은 기도를 깊이 하는 중에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깨어난 바울이 도저히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을 본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영적인 세계인데 우리가 물질세계에 살면서 그 세계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나라가 너무 좋았기에 나중에는 세계선교사로 다니면서 각 교회 편지를 쓰는 중에 나는 빨리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고후 5:8). 바울은 마지막에 순교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주님을 위해 죽음을 초월한 충성을 바치지 않습니까? 그 것은 신앙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29절을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어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 변화되어 천국의 광경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것은 천국의 모형이지 실제의 천국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형만 보아도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본문에서 천국에 대한 내막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몇 날이 못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두 사람 전부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인데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수의 나라입니다. 천하만민 60억의 인구가 모두 통틀어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하만민 모두가 가는데 나도 그 축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게 간다면 감사할 것도 없고 영광될 것도 없습니다. 소수의 나라, 적은 무리가 가는 나라에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들은 소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께서 데리고 가시는 나라입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천국의 광경이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데려 가시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의 의와 공로로 가는 나라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기도할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천국의 광경이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만드시는 천국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천국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만들고 하나님이 만든 나라이어야 진짜 천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때 베드로가 이 체험을 하고는 평생 목숨을 바쳐가며 순교를 하면서 주님께 충성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베드로가 충성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가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이 일에 대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체험 때문에 목숨을 걸고 충성한 것입니다.
  성경은 배워 익혀 지식으로만 남겨두라는 책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그대로 살아가라는 책입니다. 그 성경이 내 생활 속에서 그대로 체험이 될 때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말씀을 그대로 생활 속에서 날마다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첫째로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배우고 스승을 닮아가고 스승을 섬기고 높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따르지만 그 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 길에 고난이 많아도 생명의 길이기에 꼭 가야 하는 길입니다. 셋째는 체험의 길입니다. 성경은 배워두고 지식으로 끝내라는 책이 아닙니다. 그대로 살아가라는 책입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내 생활 속에 옮기면 그 것이 바로 체험이 되고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말씀이 생활 속에 체험이 되는 체험의 길을 걸어가면서 죽음을 초월하는 충성을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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