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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의 별명 / 행 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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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별명
행 13: 4-12

  오늘은 사도행전 13장 4절에서 1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는 자의 별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고, 별명이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별명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별명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이고 좋지 않은 별명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국으로 흩어 보내시면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돌아온 다음에 "너희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접촉했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능력을 많이 행하던 엘리야가 다시 살아왔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에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라고 한 것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붙여 준 하나의 별명입니다. 그래도 좋은 별명입니다.
  그러나 아주 나쁜 별명을 붙여 준 경우도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좇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즉 귀신의 왕초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세례요한처럼 금식도 잘 하지 않았기에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향락주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주위의 친구를 보면 전부 세리요,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을 보면 알지 않느냐? 예수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좋지 않은 별명입니다. 좋지 않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우리는 어떤 별명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보냄 받은 자 (4-5)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내가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나겠습니다. 저는 그 때가 아니면 죽어도 태어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날짜를 놓고 하나님과 의논하고 태어나신 분들이 있으시면 손들어 보십시오. 없지 않습니까? "나는 누구의 아들이 되고 누구의 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과 의논하셨습니까? "나는 남자로 태어나겠습니다. 혹은 여자로 태어나겠습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꼼짝없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주권적행사로 여러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시면 여러분들은 세상에 태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아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때는 가서 먹고 놀다가 오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에 사명이 주어져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사명을 위해서 또 일할 곳으로 보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요나는 니느웨로 보내졌습니다. 요나의 사명은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뜻입니다. 그가 가지 않겠다고 도망하여 잘 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죽어 죽어하다가 겨우 살아나 회개하고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한 후에야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진작 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후에 요나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요나는 그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 교회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곳에 그냥 남아 있었으면 일신에는 편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지시하기를 가사로 가는 광야 길로 빨리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광야 길로 가면 고생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빌립 집사는 광야 길로 단숨에 달려 갔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병거 속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그 뜻을 전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답답한 중이었을 때 성령이 빌립 집사에게 지시하여 찾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내시는 "빨리 병거로 올라 오라"하여 빌립 집사를 모셨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성경을 가운데 놓고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면 이 장면을 하나쯤 그려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그림을 찾아보았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 빌립 집사가 그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를 증거했더니 "그 예수님을 내가 믿겠오"하고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세례를 받고 떠나 갈 때는 흔연히 즉 기쁨으로 돌아갔습니다.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이유를 찾아보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솔로몬 왕 때 그 에디오피아의 여왕이 예루살렘에 솔로몬을 찾아 왔다가 유대교를 가지고 돌아가서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 내시는 유대교인으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 내시가 예수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모시고 돌아간 것입니다. 에디오피아의 유대교도들을 전부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루어 놓은 것이 coptic church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국가가 에디오피아입니다. 그 결과 전부 coptic church에 속한 교인들이 수십 만명입니다. 복음은 수십만배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빌립 집사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빌립은 이 사건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어 보내셨을 때 순종하니까 되고 순종하니까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다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긍지를 가질 일입니까? 빌립 집사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왔고 우리도 그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도 보내고 계십니다. 그 사명은 첫째로 전도요, 둘째도 전도요, 셋째도 전도입니다. 빌립 집사가 그랬고 요나가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랬습니다. 관광을 하라는 것도 사업하라고 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5절을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가 부흥할 때 성령이 말씀하기를 "두 사람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웠고 세계선교사로 파송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보냄을 받았을 때 먼저 어디로 갔습니까? 얼마든지 육지로 가서 소아시아 지방 그 넓디넓은 지역에서 전도할 수 있는데 구태여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갑니까? 그 섬이 구브로입니다. 왜 구브로에 갔습니까?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을 보내셨는데 바나바의 고향이 바로 구브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향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교회가 없으니 우리 고향에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뜻으로 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이방인에게 전도하러 분명히 보냈는데도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을 상대로 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에게 전도해서 구원하기 전에 내 동족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을 먼저 구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두 사람은 첫째도 전도요, 둘째도 전도요, 셋째도 전도였습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린다면 요한을 수종자로 둔 것은 인물을 키운다는 뜻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이상의 사명을 위해서 분명히 보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먹고 놀다 죽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고 은혜를 주시고 훈련을 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직장으로 보내고 동네로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업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직장을 가지고도 열심히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런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하면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삽니다. 우리의 별명이 보냄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혜 있는 자 (6-8, 12)
  사람은 공부를 할 때 무엇을 공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자연 과학을 공부하면 과학자가 됩니다. 거기에 깊이 들어가서 학문을 연구하고 남이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고, 만들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 내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편함을 줍니다. 자동차와 전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연 과학을 공부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귀한 학문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 공부입니다. 자연 과학만 공부하게 되면 내가 연구해서 학문을 닦고 또 물건을 만들어내고 돈을 버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결코 너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사람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사람 공부를 할 때 너를 이해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도 아는 것입니다. 또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 공부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귀한 공부는 하나님 공부입니다. 사람 공부만 하고 하나님 공부는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알 바가 아니요, 또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자체를 모르게 되고 또 그 사람 자체도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깊이 할수록 좋습니다. 만물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지어서 이 땅에 보내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떼돈을 많이 버는 사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부모를 몰라본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부모를 모르는 사람이 떼돈을 벌면 무엇하겠습니까? 부모는 내 알 바가 아니라는 사람이 장관이 되면 그 사람이 무슨 귀한 인물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박사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선 사업을 많이 하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알아서 모시고 섬기고 받들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다 받치는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서 8절을 보면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고 하였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사도가 구브로라고 하는 곳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로마 황제가 임명해서 파송한 총독이 있는데 그 총독의 이름이 서기오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총독을 찾아서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총독 측근에는 엘루마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첫째로 바예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라고 하는 단어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바요나 시몬아"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뜻입니다.  이 '바'가 아들이라는 뜻이기에 바예수는 즉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말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호수아'라는 말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그 말이 줄어서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분명히 유대 사람입니다.
  둘째로 '바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본문은 "박수"라고 하였습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일컫는 말입니다. '박수'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의 원문을 찾아보니까 '마고스'라고 하였습니다. '마고스'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는 '마술사'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남자 무당이기도 하지만 마술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예언을 해 달라고 하면 예언을 해 주는데 전부가 거짓말입니다. 총독은 그런 사람을 옆에 놓고 때로는 점도 쳐보고 때로는 마술 하는 것을 구경도 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과 바나바가 그 총독에게 전도하면 바예수는 자기 위치가 위태로워지고 쫓겨나는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 쯤 되면 총독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그 엘루마 즉 바예수의 말을 들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는 비켜라'고 하고는 바나바와 바울을 데려다가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총독을 가리켜 지혜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가르치고 어떻게 그렇게 떠 먹이듯이 또는 재미있게 가르치는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들었습니다. 마지막 12절을 보면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그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배웠고 만났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을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이 제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므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긴 후에 성경 공부를 하면 믿음이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공부를 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트레이시 베일리(Tracy Baily)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인디아나 주 고센이라고 하는 곳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레슬링부에 가입을 했는데 체격이 좋았고 성적도 좋아서 팀장이 되었습니다. 레슬링 전국대회에 나가서 일등을 하고 늘 상을 휩쓸어 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타났다하면 누구도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쯤 되고 보니 오만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좋지 못한 깡패들이 그냥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잘한다고 박수를 치고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돌아오면서 축하한다고 데리고 가서 술을 대접합니다. 계속 박수를 치고 칭찬을 하고 얼리고 치켜주니까 기고만장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깡패들이 저 사람을 치라고 하면 저 사람을 치고, 이 사람을 치라고 하면 이 사람을 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깡패들이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면 더욱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좋지 못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려 다니면서 나쁜 짓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학교에 들어가서 기물을 모두 파괴하고 뒤엎어 버리고 난장판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붙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이 심리해 본 결과 고등학생이지만 아주 질이 나쁜지라 5년 징역형을 언도했습니다. 감옥에 간 베일리가 '내가 감옥에서 나가면 아무개도 죽이고 아무개도 죽이고 다 죽인다'라고 하면서 이를 갈았습니다.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고 살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계속 이를 부득 부득 갈았습니다.
  한번은 교도소 안에 있는 거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거울을 보고 자기도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얼굴이 어쩌면 마귀 얼굴 같았기 때문입니다. 눈에서는 독기가 철철 넘치고 독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이 사나워 보였습니다. 밤낮 이를 갈면서 누구를 죽인다고 하니까 그만 그 표정과 인상이 꼭 악마의 얼굴 같았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놀라면서 '이게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거꾸러지고 얼마나 울면서 회개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교도소 안에 있는 교회를 찾아서 나갔습니다. 교회에는 성경 공부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하는데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다음 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변화가 일어났고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일년만에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는데 수학에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문제 있는 학생은 다 베일 리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문제 있는 학생을 붙여 주기만 하면 전부다 바로 잡아 놓았습니다. 자기의 경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미국 전역에서 단 한 사람을 뽑는 모범 교사로 뽑혔습니다. 그것이 1993년도의 일입니다. 백악관에 부름을 받아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고 살았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그 인생은 망하는 길 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깨우치고 성경을 공부하고 깊이 연구하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가 일어나서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가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 속에서 은혜 받고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말씀을 들은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지혜있는 자였습니다. 우리의 별명이 지혜있는 자이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령 충만한 자 (9-11)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에서 11절을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남자 무당 노릇을 하던 엘루마라고 하는 바예수가 전도를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호통을 쳤는지 모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의를 굽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즉 복음 전하는데 언제까지 훼방을 놓겠느냐는 뜻입니다. 주의 손이 네 위에서 너를 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장 소경이 되어 더듬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은 총독 측근에서 권세 부리는 마귀의 자식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갓 결혼한 여자가 애기를 잉태했습니다. 그 애기는 자기의 공로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부모의 공로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열달 동안 어머니 태에서 자라는 동안 자기가 돈을 벌어다 밥을 해 먹습니까? 100% 어머니 공로로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태어날 때에 애기가 자기 힘으로 기어 나옵니까? 어머니가 자기가 젖먹을 때의 힘까지 힘쓰면 밀려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애기가 태어나기까지 한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부모가 낳아 주어서 아들 삼고 딸 삼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될 때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다"라고 선택하고 부르시고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기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났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분의 변화 또는 관계 변화라고도 합니다. 갓난아이는 사람 축에는 들어도 일꾼 축에는 들지 못합니다. '너희는 몇 식구냐?'라고 물으면 남편이 있고 내가 있고 기저귀 차는 애기까지 축에 넣어 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꾼 축에는 들지 못합니다. '너의 가정에 일꾼이 몇이냐'고 물으면 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이가 일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애기는 아직 인격이 불완전합니다. 그러기에 일꾼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결과 실력이 충만해지고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맡겨도 일할 수 있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상태가 완전히 변화되어서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상태변화입니다. 우리는 중생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중생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부림도 했고 계집종앞에서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에는 목숨을 내 놓는 충성을 하였습니다. 누가 그 베드로를 당합니까? 이처럼 성령 충만할 때 어디를 가든지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마귀의 자식과 싸워서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별명은 성령 충만한 자 이어야 합니다.
 
  믿는 자의 별명은 첫째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라는 별명을 분명히 가지고 보냄 받은 자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 지혜 있는 자입니다. 세상 것도 배우고 사람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공부하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습니다. 총독 서기로 바울처럼말입니다. 셋째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있고 영적으로 실력이 있고 영적으로 인격이 성숙해 진 사람의 상태를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나가서 일당 백을 하고 일당 천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나가서 마귀의 자식과 싸워 승리를 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별명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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