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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 다운 삶 / 마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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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다운 삶
마 9: 27-31

  오늘은 마태복음 9장 27절에서 3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 다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부터 일컬어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처음에 좋은 뜻으로 부른 말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다'라는 뜻으로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오늘까지 사용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좋은 별명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께 속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서 믿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별명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소경은 어떤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나 서머나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전혀 교회답지 못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 가운데서도 집사다운 집사가 있는가 하면 니골라라고 하는 집사는 전혀 집사답지 못한 집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진짜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함께하는 삶 (27-)
  벳새다라고 하는 곳에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살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도 나사렛에 사시다가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한번은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등장했을 때 "보라 내가 증거하던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그 때 요한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안드레는 그날 하루 종일 예수님과 지내면서 말씀을 듣는 중에 자기들이 조상적부터 기다리던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이 분이다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믿기를 시작했습니다. 자기 혼자 믿어 구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형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먼저 형 베드로에게 달려가서 예수를 증거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번 가 보자 하여 갔더니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 베드로도 그 때부터 예수를 함께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 19절을 보면 형제는 한 집안에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한 상태에서 안드레와 생활도 함께 했고, 고기 잡는 생업도 함께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함께 하였고, 부름 받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도 함께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순교도 함께 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를 당했고, 안드레는 전도하다가 아가야에서 X자로 못 박혀 죽음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형제만 함께 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했습니다. 함께하는 삶이 이처럼 복된 것입니다. 예수 없이 너와 나 단둘이만 함께 한다면 그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시고 형제가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예수와 함께하고, 형제와 함께하고,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서 살았는지 다른 집에서 살고 아침 먹고 모여 걸인 생활을 함께 했는지 모르겠지만 항상 두 소경은 행동을 같이 했습니다. 두 소경이 있던 곳이 가버나움입니다. 두 소경이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오실 때 예수를 만났습니다. 두 소경이 함께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도 함께 했고, 생활하는 것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는 것도 함께 하였습니다. 둘이 함께 지내면서도 한 사람은 믿고, 한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하면 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은 부르짖는데 한 사람은 '네가 다 부르짖어라 나는 기도하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두 소경은 불행한 입장에서 함께 예수를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함께 기도 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함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그리고 불행한 너와 함께, 너는 나와 함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옆으로는 너와 함께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을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저희의 기도를 들어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내가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남편은 집에서 잠만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따라 나와서 함께 둘이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당신만 나가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잘 못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입니다. 둘이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부부가 왜 함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와 딸이 함께 기도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기도하면 됩니다. 이렇게 함께 합심하여 둘이 기도하게 되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족 전체가 함께 기도하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보면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두 명도 좋고, 세 사람도 좋은데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함께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께서 무조건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두 세사람이 모여서 남의 흉보고 자기 가정에 대한 불평과 교회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는다면 주님이 함께 계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는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또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기만 하면 반드시 그 가운데는 주께서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셋이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와 내가 함께하는 것도 좋지만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반드시 예수와 함께 모여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하고 너와 함께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불행을 당하면 내가 너를 돕기도 하고,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네가 나를 돕기도 하고 예수를 모시고 불행을 서로 도와 가면 함께 하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둘째, 끈질김의 생활 (28-30)
  끈질기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끊어지겠지 했는데 끊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에도 끊어지겠지 했는데 역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끈질긴 것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는 이런 끈질김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을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보면 사람이 매 맞을 짓을 했을 때는 때리라고 말입니다. 몽둥이를 가지고 때리는데 40대를 때리는데 반드시 하나를 감하라는 것입니다. 40대를 맞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리라는 뜻입니다. 즉 40에 하나를 감해서 39대를 맞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지 않을 만큼 때리라는 것입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라고 하였습니다.
  태장이 무엇입니까? 태장은 몽둥이와 다른 것입니다. 태장이라고 하는 것은 막대기 끝에 가죽 줄을 매고, 가죽 줄 끝에 쇠꼬챙이를 박아 놓은 것입니다. 사람을 때리면 가죽 줄이 몸에 감기면서 쇠꼬챙이가 살점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장으로 맞으면 초죽음이 됩니다.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파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다를 건너가다가 배가 깨져버렸다는 것입니다. 파선한 후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는 것입니다. 널 조각을 잡고 겨우 살아난 것입니다.
  바울은 당하지 않은 고난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바울 사도가 전도하는 일을 집어치우리라 생각했음직 하지만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태장으로 맞아 죽을 맛을 보았는데도 또 전도를 했습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도 계속 전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끈질긴지 바울이 이제는 모든 것을 손들고 포기하리라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 생활은 이렇게 끈질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에서 30절을 보면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두 소경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얻어먹다가 야이로의 집 앞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소경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시신경만 살아 있으면 개안 수술을 해서 고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절대 고치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있던 두 소경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마침 이 때다 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부르짖기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부르짖는가 하면 너도 함께 부르짖었습니다. 둘이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못 들은 척하고 그냥 지나가 버리셨습니다. 그래도 두 소경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갔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자기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시천대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알바가 아니라 하고 오직 예수만 따라서 그 집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끝까지 예수를 쫓았습니다. 아주 끈질기게 쫓았습니다. 그 두 소경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병을 고쳐 줄 줄 믿느냐?"라고 물으시자 두 소경이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면서 눈에 안수를 해 주시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것입니다. 소경은 처음에 부르짖기 시작했는데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끝까지 부르짖었습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이런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다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한 사람을 1년, 3년을 전도했음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매 반드시 그 사람은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전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무엇을 하다가 잘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야 됩니다. 우물을 파다가 샘물이 나오지 않으면 집어치우고, 다른 곳을 파고 샘물이 나오지 않으면 또 다시 집어치우는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끝내 샘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끝까지 파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샘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끈질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 변두리에 교인이 5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았습니다. 그 목사가 교회를 부흥시키고 싶지 않아서 부흥시키지 않겠습니까? 그 목사가 한번은 볼일이 있어서 다른 곳을 다녀오던 중에 런던 역에 내렸습니다. 그 당시 부흥사로 유명한 무디 선생 역시 런던역에서 내렸습니다. 무디 선생은 이 목사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무디를 알기에 먼저 인사를 청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 주일도 쉬지 못하고 부흥회만 인도하다 보니 피곤해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쉬면 자꾸 찾아오기에 런던에서 누구도 모르게 쉬다 가려고 왔습니다" "잘 만났습니다. 주일이 되면 어디에 가서 예배를 드려도 주일 낮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닙니까?" "예배를 드려야지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안하겠다고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약속을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가 교인들을 동원해서 무디 선생이 오는 주일 낮 시간에 설교한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50명이 모이던 교회에 100명이 모였습니다. 50명 모이던 교회에 100명이 모였으니 굉장한 것 아닙니까? 무디 선생이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설교를 마치고 축도를 했는데 교인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돌아가십시오. 왜 안가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선생이 오늘밤 예배에 다시 설교를 해 주시겠다 하면 돌아가고 안 해 주겠다고 하시면 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쯤되면 무디 선생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는 낮 예배에 참석했던 100명의 교인들이 나가서 소문을 내고 또 한명씩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날 저녁 예배에 200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저녁 예배를 마쳤는데 교인들이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일 또 무디 선생이 설교를 해 준다고 하면 돌아가고 안 해 준다고 하면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부흥회 아닌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은 50명이었는데 무디 선생의 설교를 듣고 예수 믿겠다고 결신한 사람이 500여명이었습니다. 본 교회 교인보다 10배 이상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부흥회 때 예수를 믿겠다고 등록을 하고도 그 주간에 심방을 가면 교회에 안나가겠다, 심방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영국 사람들은 한 번 믿겠다고 하면 믿는 사람들입니다. 엄청난 부흥이 아닙니까? 무디가 본교회 목사에게 "이것이 참 수수께끼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든지 부흥회를 가겠다고 약속하면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가면 예수 믿기로 작정을 하는데 보통 갑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10배가 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교회를 위해서 한번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저는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본 교회 목사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 여집사 한분이 계십니다. 여전도회 회장까지 지낸 분인데 나이가 좀 들어 반신불수가 되어 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은 죽여 놓았지만 반을 살려 두신 뜻이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앉았다 일어났다 밖에 못하면서도 하나님 우리 작은 교회에서 무디 선생을 한번 초청하여 부흥회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오니 하나님이 번쩍 들어다가 부흥회를 인도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10년을 기도했습니다. 무디 선생 당신이 기도하지 않았어도 이 여집사가 기도한 것입니다"라며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여집사가 끈질기게 10년을 기도했습니다. 50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무디 선생님을 어떻게 모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을 주시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않고 끝장을 보고 마는 끈질김이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두 소경의 끈질김처럼 말입니다.

  셋째, 전파하는 삶 (31-)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을 보면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두 소경은 그 전에도 예수의 소문을 들었는데 오늘 체험하고 보니 예수의 소문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 소경이 눈을 떴다, 문둥병이 나았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각색 병든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내가 오늘 체험해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동네에 다니면서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 나는 예수 믿고 이렇게 되었노라. 너희도 그 예수를 믿어보라"고 전파했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절대로 예수를 증거하지 못합니다. 체험 신앙 없이 절대로 예수 소문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10년을 나오고 20년을 나와도 한 명도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체험한 사람들은 당장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가 좋다. 나는 예수 믿고 이렇게 되었노라. 너도 그 예수 믿어보라"는 증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를 증거하고 전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이번에 부흥회를 갔더니 그 교회 목사님이 언젠가 자기 교회에 침례교 목사님을 강사로 모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면서 그 교회에 가 보았더니 '전도를 못하겠으면 아이라도 낳으라'는 플랜카드를 크게 써 붙였더라고 합니다. 전도를 해서 하나님의 식구를 한 사람 늘리던지 전도를 하지 못하겠으면 애기라도 낳아서 하나님의 식구를 늘리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작년이나 금년이나, 금년이나 내년이나 똑 같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열심히 전도하고 그리스도를 전파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교회, 또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삶은 첫째 함께하는 삶입니다. 예수와 함께 하고, 너와 내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둘째 끈질긴 삶입니다.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끊어지고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고 끝장을 보는 끈질긴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셋째 전파하는 삶입니다.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되었으니 너도 한 번 예수를 믿어보라"고 전파하고 증거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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