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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아짐을 통한 높아짐 / 약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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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짐을 통한 높아짐(약1:9-11) 

약 1:9-11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어느 교회에 소설을 쓰는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집념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고 또 자기의 인기를 유지하는 일 외에는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소설은 꾀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잘 팔렸습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소설을 썼습니다. 돈도 꾀나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가만히 놀려두지 않고, 계속해서 부동산에 투자해서 자기의 재산을 증식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이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결국은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서 종합진찰을 받아보았습니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뜻밖에도 간암 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남은 삶이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집까지 일부러 천천히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그는 자기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했던 말씀이 그렇게나 실감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전1:2의 말씀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정말 그 동안 살아온 모든 삶이 헛되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도달했습니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보아도, 그 동안 애써 장만해 놓았던 가구들을 쳐다보아도, 심혈을 기울여 써온 원고뭉치를 쳐다보아도 그저 눈물만 솟구칠 뿐이었습니다.
도무지 참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교회에 홀로 무릎을 꿇고 흐느끼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주님! 저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구차한 요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큼은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3개월 동안에 제가 무엇을 해야 저의 삶이 의미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애타게 기도하는 가운데 그에게 느껴지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동안 글을 쓰고 재산을 불리느라고, 그는 사랑해야 할만큼 충분한 사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자기로 인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으기만 했지 한 번도 자기의 재산을 값있게 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기의 재산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가족들을 위한 유산으로 분배했습니다. 유언장도 완성을 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라든지, 재산을 불려나가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틈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3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의사는 틀림없이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났지만 생명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일부러 다른 병원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웬일입니까? 간암이라는 것은 순전히 오진이었습니다. 너무 과로해서 간에 무리가 갔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휴식을 취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님, 얼마나 억울하세요? 어디 가서 이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 때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제 생애 있어서 지나간 3개월처럼 의미있고 값진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저의 남은 삶이 얼마가 되든지 간에 저는 언제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심정으로 살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세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저 조금 더 길든지 짧든지 그 차이일 뿐입니다. 결국은 다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그 나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살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풀의 꽃처럼 잠시 잠깐 뒤면 지나가 버릴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너무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우리를 낮추셔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깊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만족을 삼지 말고, 영원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건강하고 부유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풀려나갈 때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병들고 가난하고 모든 일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습니까? 우리가 육적으로 낮아졌을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나를 낮추셔서 나의 믿음을 더욱더 강하게 하시고, 나를 영적으로 높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낮아짐을 통해서 높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낮은 형제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여기서 낮다는 말은 "병들다, 가난해 지다, 환난을 당한다" 등 이런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일컫는 말씀입니다. 또 자랑한다는 것은 교만의 마음에서 오는 불법적인 자랑이 아니고, 합법적인 것입니다. 지극히 큰 영적인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독일이 나치정권 하에 있을 때, 독일의 군인이나 공무원들은 서로 만날 때 어떻게 인사를 했습니까?
"하일 히틀러!"
그들은 히틀러의 이름을 찬양하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신처럼 떠받들림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면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가이사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가이사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달랐습니다.
"아니요! 우리의 주님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십니다."
이 신앙 때문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재산을 다 몰수당했습니다. 목숨도 빼앗겼습니다. 더러는 깊은 산 속으로 피난 갔습니다. 토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속에서 유리했습니다. 저들은 주를 위해서 낮아질 때로 낮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낮아짐으로 인해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높여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굶주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목말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집이 없어서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는 영원하고도 영화로운 집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삶을 고후6:9∼1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본시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이 모든 것들을 그는 주를 위해서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주를 위해서 기꺼이 낮아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를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은 그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대사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낮출 때 주께서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란시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앗시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기사 생활을 꿈꾸었습니다.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호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방탕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에 참여해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청빈한 삶,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단벌 옷에 새끼로 허리띠를 매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낮아질 때 주께서 그를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큰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침에 자가용을 타고서 회사에 가면 수위들이 거수경례를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차 문을 열어줍니다. 그런 분이 교회에 오시면 스스로 낮아지십니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팔에는 완장을 두르고서 차가 들어올 때 친절하게 안내를 합니다. 먼저 고개를 숙이면서 교인들에게 반갑게 인사합니다. 주를 위해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회사에서의 수위의 노릇을 그분들이 교회에 오시면 자발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를 위해서 우리 자신들을 낮출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부한 형제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10절 상반부입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우리가 육신적으로 편해지면, 곧 세상적인 것들로 만족을 삼게 되면 아무래도 우리의 신앙적인 열심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낮추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셋째 하늘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천국의 아름다운 광경을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말을 자기의 두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체험입니까? 그런데 바로 그 뒤에 그는 자기의 육체에 있는 가시로 인해서 고생스러워 합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에게 시험을 허락하셨는지,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가 놀라운 체험을 하고 나서 그것으로 인해 그가 자고하지 말고 모든 일에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더 이상 자기의 육체에 있는 가시로 인해서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자기의 약해지고, 자기의 낮아짐을 오히려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을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다.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세 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내게 이 시험을 허락해 주셨는가? 나에게 있는 가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신하들을 데리고 들에 사냥을 갔습니다. 거기서 어떤 목동을 만났습니다. 다윗처럼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왕은 첫눈에도 그가 신실한 사람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목동을 왕궁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과연 그는 왕의 기대에 전혀 어긋나지 않게 모든 일에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왕궁의 재산관리인으로 세웠습니다. 왕궁에 있는 모든 재산을 그가 도맡아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신하들이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웬 촌사람이 하나 들어와서 자기들을 제치고 왕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왕궁의 모든 재산을 자기 혼자서 관리하고 있으니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하들은 그를 책잡기 위해서 가만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모든 일에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그가 이따금씩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탐지되었습니다. 왕궁 꼭대기에는 창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을 비밀창고로 삼고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따금씩 올라갔다가 한참 있다가 내려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의 열쇠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맡기지 않고, 늘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것이구나! 그가 왕의 재물을 빼돌려 그 비밀창고에 보관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고자질을 했습니다. 왕은 그 소리를 듣고서 가서 알아보라고 허락했습니다. 신하들은 왕의 허락을 받고 왕궁 꼭대기에 있는 비밀창고의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차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독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그저 한쪽 구석에 다 낡아빠진 조끼 한 벌과 너덜너덜한 장화 한 켤레가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왕은 보고를 받고서 그 신하를 불렀습니다.
"그대는 어찌해서 그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보물인양 그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는고?"
그 신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제가 폐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폐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제 마음이 높아지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곳에 가서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폐하의 은혜를 생각하고, 제 마음을 스스로 낮추고는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왕은 그 두 가지를 나라의 보물로 영구토록 보존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동안 건강하게 지내오셨습니까? 그 동안 평안하게 살아오셨습니까? 부하게 살아오셨습니까?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 돌릴 줄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 아는 우리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로 만족을 삼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10절 하반부∼11절입니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세상적인 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으로 바라보아야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릴 세상적인 것들로 삶의 목적을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옵니다. 그런데 성지 이스라엘에는 여름철에 비가 오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겨울철에만 비가 옵니다. 겨울철에 비가 오면 풀이 자랍니다. 꽃이 핍니다. 그러나 여름철이 되면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뜨거운 햇빛만 내려 쪼입니다. 이따금씩 동남풍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입니다. 그 열풍이 불어닥치면 풀들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꽃들도 말라서 떨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세상적인 것들은 풀의 꽃과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가거나 죽음이 지나가면 다 쇠잔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것들로 우리가 삶의 목적을 삼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란서의 수도 파리에 가면 수도원이 하나 있습니다. 수도원 입구에는 큰 돌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 비석에는 이러한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불어로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입니다. 우리말로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뜻입니다. 이 비문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한 청년이 법과대학을 다니면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고학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놓고서 도무지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한 학기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제발 한 번만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잘되었네요. 방금 한 교인이 뜻있는 일에 써달라고 제게 돈을 맡기고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형제를 위해서 이 돈이 제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봉투에 든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청년에게 주었습니다. 청년은 뜻밖에도 그 돈을 받고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기는 했지만 어쩔 줄 모르고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이 많은 돈을 제가 다 가져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하나님이 형제에게 주신 것인데 가지고 가세요."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인사를 한 뒤 돈을 받아 쥐고 나오는데 목사님이 그를 잠시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한 가지 물어볼게 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고 했지요?"
"예, 제가 마지막 남은 한 학기를 등록할 것이라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아, 그랬군요. apres cela(그 다음은 요)?"
"그 다음엔 열심히 공부해서 제가 졸업을 해야지요."
"apres cela(그 다음은 요)?"
"예, 제가 변호사가 되어서 억울한 사람을 의롭게 변호하겠습니다."
"그래요. 꼭 그래 주세요. 그래 주셔야지요. apres cela(그 다음은 요)?"
"돈 좀 벌어서 장가도 가고, 가족들도 먹여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apres cela(그 다음은 요)?"
심상치 않은 목사님의 질문에 그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청년을 향해서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대답은 제가 하겠습니다. 청년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요. 그것을 잊지 마세요. 그 한 가지를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목사님의 질문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면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 돈을 목사님에게 다시금 돌려주고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길로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서 자신의 남은 여생을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다가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죽고 난 뒤에 그가 평소에 좌우명처럼 늘 외우던 세 마디,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를 그의 묘비에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아프레 쓸라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결국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젠가는 우리도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해 주신 그 나라에 우리는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8:1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해 주신 영화로운 하늘 나라로 우리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릴 세상적인 것들로 삶의 만족을 삼지 마십시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시간, 물질, 건강, 지식, 명예, 권세, 좋은 가족 등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물론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인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니까, 우리는 종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들을 우리의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값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에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쓰지 말고,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쓸 때 우리는 결코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낮아짐을 통해서 영적으로 우리를 높여 주시고자 함입니다.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낮아짐을 통해서 우리를 높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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