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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심해야 할 일 / 고후 7: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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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해야 할 일
고후7:8-11

교통사고를 석 자로 줄이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붕어빵"입니다. "부-웅","어-어","빵"입니다. 존 F. 케네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진실 된 것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다. 처음 두 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세 번째의 웃음 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해야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지성인일수록 웃을 준비가 잘 되어 있고 유머에 더 많이 감사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유머에 더 민감하고 반응도 빨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찹쌀떡 열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세 개를 먹었거든요. 그러면 몇 개가 남아요?" "그야 일 곱이지." "틀렸어요. 세 개가 남잖아요." "아니, 어째서?" "왜 어른들이 먹는 게 남는 거라 그랬잖아요" 유머에 민감한 지성인이 됩시다.
우리네 부모들에게"당신의 자녀가 장차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소망은 정해져 있습니다. 기술자, 학자, 약사, 의사, 판검사가 되길 원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기대들과는 달리 서양의 부모들은 좀 색다른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웃음을 잃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자녀를 위한 기도문에도 "웃음을 잃지 않게 도와 주시며...."라는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되는데요. 사실"웃음을 잃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 속에 모든 게 다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웃음을 잃어버리고 산지가 오랩니다. 무엇이 웃음을 잃어버리게 했습니까? 웃을 줄 몰라서 안 웃는 게 아닙니다. 잃어버렸어요.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이것을 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과거라 하고,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을 현재라 하며, 앞으로 올 시간을 미래라 합니다. 그리고 좋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믿으며 미래를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입니까? 기대도 소망도 노력도 필요 없이 그야말로 근심과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미래,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다양합니다. 영광된 미래가 있고, 비참한 미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미래가 있는가 하면, 밝고 아름다운 미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중간쯤 되는 미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미래 중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미래를 성취해 나가려고 하는 노력일 것입니다.
인생을 3등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결과나 성과,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고 동기와 자세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3등급부터 시작합니다. 과거에 매여 현재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미 행한 자기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만부득이 살고싶지 않은 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것을 업보(業報)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 안에서 무엇인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진다" 생각하고 살지마는 이 불가(佛家)에서는 아주 전생까지 올라가서 "그때에 한 행위에 의해서 오늘 그 값을 받으며 살아간다" 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업보(業報)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과거에 의해서 삽니다. 과거에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싶지요. 고치고 싶지요. 아예 그저 고무지우개로 빡빡 지우고 싶지요. 그렇다고 지워집니까? 호적을 바꿔도 안 지워지는 게 과거입니다. 이 과거를 어찌하겠습니까? 그대로 이어가며 오늘을 살아야지요. 과거에 쫓기면서, 후회하며 뉘우치며 반성하며 만부득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과 걱정이 떠 날 날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피곤한 생을 삽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마치는 참으로 유감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2등급은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미래만, 앞에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지개와 같은 것입니다. 확실하지도 않지만 거기에다가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현재도 문제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도 문제입니다. "그저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앞날을 위해서 오늘은 고생해야 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합니다. 막연하게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 아주 어려운 고난을 참고참고 견뎌나가는 그러한 것입니다. 근심도 합니다. 걱정도 합니다. 염려에 매여 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미래에 대한 치루어야 할 액땜이라고 여깁니다. 이 또한 참 어지간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2등급에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1등급은 뭐냐. 현재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평생 살아온 가운데 오늘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이 가장 만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오늘을 위하여 나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1등급이요. 거기다 하나 더 합시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특 등급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더 바랄 것도 없고 더 기대할 것도 없어요. 현실안주, 현실 만족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 과거란 오늘을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요, 미래란 나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다만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살고, 살 것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미래가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 미래의 주인이 계시고 그 분이 이끄실 것입니다. 막연한 미래를 바라보고 고진감래(苦盡甘來)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이 속에 근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걱정이 있을 수 있나요? 그런데 이렇게 살지 못해서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고. 염려 속에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1등급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까?
정신과적인 용어 가운데 <불안장애>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장애>라는 말과 <병>이라는 말은 개념이 다릅니다. 병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나빠질 수도 있고 혹 호전 돼서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소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이라는 것이고요. 장애라고 하면 이 병이 멈춘 겁니다. 진행을 멈추어서 이제는 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애자들을 특별히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팔에 장애가 왔다. 없던 팔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시각에 장애가 왔다. 다시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요. 이게 바로 장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안장애라고 말씀드렸습니다."불안" 이라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걱정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이 많은 정신적 고통과 우리는 정면대결하면서 싸워나가는 것이 한평생 사는 생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만 이 상황이 뒤집히면서 불안에 압도되고 맙니다. 그러면 이 불안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소실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병의 단계에서 장애의 단계로 발전해버립니다. 이러면 헤어나지 못해요. 불안의 노예가 되고,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런 존재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불안장애라고 하는 현대인의 증후군입니다.
두 번째 장애가 <공포장애>입니다.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볼 때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억제할 수가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따로따로 노는 거예요. 이성과 감성이 서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누가 묻거나 생각을 하면 "아, 거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불안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생각으로 보면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생각은 생각대로 가슴은 가슴대로 불안에 떨게 됩니다. 이게 공포장애입니다.
또 하나는 <공황장애>라는 게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안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는 지나칩니다. 모든 상황을 불리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오늘 버스 탔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이 음식 잘 못 먹었다가 죽으면 어떡하나"우리는 이것을 기우(杞憂)라고 합니다. 옛 중국의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하며 침식을 잊고 근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기나라 사람의 걱정"그래서 기우(杞憂)라고 합니다. 이렇게 살면 살길이 없습니다. 세상에 제일 미련한 사람이 죽을까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다고 안 죽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어촌에 풍랑이 심하게 일어서 어부들이 죽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모시고 다음날 그 아들이 그 배를 타고 또 바다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이 사람아, 아버지가 그 배를 타고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또 타고 나가나?"하고 말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하는 말이 "한가지 물읍시다. 당신네 아버지는 어디서 죽었소?" "안방에서 죽었지" "그럼 당신은 안방에서 안 자요?"그런 겁니다. 이 불안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끝도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강박 장애>라는 것이 있어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다 가스 불 잠갔나 안 잠갔나?" 여기 앉아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나가서 전화 걸고 왔다갔다합니다. 또 그런가 하면 "열쇠를 잠갔나 안 잠갔나?" 계단 내려왔다가 올라가서 만져보고 왔어요. 또 내려와서는 "가만있자, 잠갔던걸 내가 열고 내려오지 않았나?" 또 올라가요. 오르락내리락 해요. 내가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하루종일 오르락내리락 해보세요 되나. 웃는 사람들 다 전과자예요.
장애, 이건 못 고치는 병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병의 단계>를 지나 <장애>가 되어 버리면 못 고칩니다. 세상의 근심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라도 이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 근심이란 뻔한 것들입니다. 물질의 손해에 대한 걱정입니다.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근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두가 내 욕심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내 명예와 관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남들 앞에서 내 체면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근심이 지나칩니다. 병의 단계가 지나서 치료가 불가능한 장애의 단계가 되도록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정작 해야할 근심은 하지도 못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해야 할 근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 자체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죄 용서 받지 못할 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근심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십자가의 크신 은혜로, 그 피의 공로로 이미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벌이 두렵고 지옥이 무서워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자기는 가지만 그분 앞에 간구할 것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어서 걱정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은 무엇입니까? 벌받을까봐서입니까? 지옥 갈까봐서입니까? 아닙니다. 틀림없이 하나님 앞으로 가기는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질까봐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겠다고 하면서 요리조리 핑계하고 빠진 것,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 피운 것들을 근심해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세상의 근심>이란 자기가 행한 잘못을 정당화시키고 어떻게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보고자 인간적인 노력을 함으로써 발생되는 것들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28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왕>이 블레셋으로부터 위협이 있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서 택한 방법이 엔돌의 접신녀(接神女:신접한 여인)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울은 자기식으로 시작해서 불신앙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의 불순종으로 인한 잘못을 정당화 해보려고 하지만 그의 삶이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맙니다. 사울의 불 신앙과 인본주의적인 사고가 낳은 근심과 그 결과입니다. 또 한사람 신약성경의 <가룟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 그 마음의 근심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잘못된 행위로 인하여 생긴 근심의 해결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자살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낳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결코 후회 할 것이 없으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임을 깨닫고 그에 대해 전심으로 애통해 하며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가운데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날마다 하는 근심입니다. 성경에서 찾아보자면 <다윗>과 같은 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51편에 그의 후회 없는 회개가 나옵니다.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죽게 한 후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난 다음에 자기의 부끄러운 행위를 근심하면서 일국의 왕으로서의 체면과 명예도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지은 회개의 시입니다. 자신의 죄를 철저히 인정하며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함과 동시에 죄 사함 받을 것을 확신하며 감사하는 그런 시입니다.
결국 근심이란 그것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법으로 대처하느냐,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느냐,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근심하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무엇에 근심하느냐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냐,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냐 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는 묻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큰사랑, 내가 입은 많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그분의 자녀 된 바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죄송한 마음, 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주일성수에 애착이 없을까? 내가 직분도 받았는데 예배에 이렇게 관심이 없어도 되는 것인가! 좀 더 믿는 것처럼 믿을 수는 없을까! 주께서 그 귀중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며 날 사랑하셨는데 지금 내가 보이는 믿음의 행위가 너무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이런 고민을 얼마나 하시면서 살아가십니까? 적어도 이 정도의 근심 앞에 날마다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심 없기를 바라지 마시고 차라리 열심히 걱정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그분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열중하십시오. 그러면 쓸데없는 걱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근심에는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근심 속에 사십니까? 정말 근심해야할 것을 근심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구원과 성숙이 있는 근심으로 하나님 앞에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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