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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 마 5: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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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마5:43-45) 마틴 루터 킹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3-45)"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여러 가지 교훈들 중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명령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처럼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우리를 비난하고 당신을 파괴할 흉계를 꾸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철학자 니이체(Nietzsche)와 같은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기독교 윤리가 강하고 힘 있는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겁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니이체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의문들과 다른 견해들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 명령은 우리를 새로운 도전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계속되는 사건들은 우리들이 미움이라는 길을 끝없이 여행하는 사람이며 어쩌면 이 여행 도중 우리들이 파괴와 파멸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하나의 신실한 명령으로 제쳐 두고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생존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목입니다.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는 힘은 현존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는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예수는 현실적인 사실주의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고려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 행동인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는 모든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 말이 지닌 깊은 의미를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 명령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 명령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드러나도록 힘 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 실제적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첫째,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계속 개발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의 힘도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먼저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악을 행하고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합니다. 용서하는 행동은 언제나 나쁜 일을 당하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 고통스러운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 끔찍한 압박을 당하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은 탕자 아들과 같이 제 정신이 들어 용서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먼지가 나는 길을 걷습니다. 피해를 입은 이웃(사랑하는 아버지)은 용서의 따뜻한 물을 부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나 악한 행동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악한 행동이 더 이상 인간관계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신선한 출발과 새로운 시작에 필요한 환경을 구성하는 촉매가 됩니다. 그것은 짐을 가볍게 해 주고 빚을 탕감해 줍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의 진정한 본질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의 의미는 용서할 사건을 그의 마음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결코 그 사건을 잊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사람이 했던 나쁜 행동이 새로운 관계에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게 용서할 사건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는 화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정도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냅니다.

둘째로, 원수(혹은 이웃)의 악한 행동, 우리에게 상처를 준 행동이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악한 원수에게서 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정신분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자신을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 라틴 시인 오비디우스(Ovid) 처럼 탄식하게 합니다. "나는 더 나은 선을 보고 안다네. 그러나 나는 악을 따르네."

오비디우스의 생각과 비슷하게 플라톤(Plate)도 "사람의 인품은 두 마리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쌍두마차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가장 나쁜 것 속에 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우리의 가장 좋은 것 속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발견할 때 원수를 덜 미워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 충동적으로 저지른 악한 행동을 무시할 때 우리는 이웃 원수 속에 있는 선을 발견하므로 우리는 그가 저지른 행동의 무지막지함과 악함이 그를 나타내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그의 미움은 공포와 교만과 무지와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악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원수를 이기거나 비참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우정과 이해로 승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나쁜 일을 한 원수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가 쓰러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를 한 구석으로 몰아 그를 찌를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말과 행동은 원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미움'의 벽에 갇힌 넓은 '사랑'의 저수지에서 '사랑'의 물을 방류해야 합니다. 사랑의 의미는 감정의 분출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감정놀음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위대한 것입니다. 어쩌면 헬라어로 이 단어를 살펴보는 것이 이 단어가 지닌 의미를 보다 더 명확하게 해 줄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의 단어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eros)입니다. '에로스'라는 단어는 심미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에로스는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의 소망이라고 표현됩니다.

두 번째 단어인 필리아(philia)는 쌍방간의 사랑, 친밀한 애정, 친구 사이의 우정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세 번째 단어인 아가페(agape)는 모든 사람에게 이해와 창의적이고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흘러 넘치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가페 사랑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차원에 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방식이 우리에게 호감을 주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차원에 있을 때 그들이 행한 행위는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을 행한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우리가 다니는 길에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가져다 놓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하고 우리 집을 폭파시키려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했을 때 에로스나 필리아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는 바로 이해심 많고 창의적인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직 이 사랑으로 사랑하고 이런 형태의 사랑으로 반응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라는 실제적인 문제에서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미 별들이 사라진 밤이 더 깊은 어둠을 주는 것처럼 미움을 미움으로 되돌려 갚는 것은 미움을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어둠이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가중시킬 뿐이며 폭력은 폭력을, 무법은 무법을 가중시켜 더 심한 파괴에 이르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가 명했을 때, 예수는 더 심오하고 궁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명령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까? 미움은 미움으로, 전쟁은 더 심한 전쟁으로 대처하는 '악'이라는 반응으로 연결된 사슬은 부서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미움은 영혼에 상처를 내고 사람의 인격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움이 악이며 무서운 폭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미움받는 사람에게 무슨 영향이 미칠지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미움이 피해자에게는 치료할 수 없는 치명적 상처가 됩니다. '히틀러'라고 불리는 한 사나이에게 있었던 '미움' 때문에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일, 피에 굶주린 폭도들에 의해서 흑인들에게 가해진 말할 수 없는 폭력, 전쟁의 어두운 공포, 비양심적인 독재자에 의해서 수백만의 하나님의 아이들에게 행해진 참으로 끔찍하고 무례한 행동들과 불의들, 우리는 '미움'이 가져온 그 추악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움의 사건들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신에게도 치명적으로 해롭다는 사실입니다. 정복되지 않는 암처럼 미움은 사람의 인격을 좀먹고 인격이 가진 생명력을 먹어서 없애 버립니다. 미움은 사람이 가진 가치와 객관성을 파괴합니다. 미움은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진리를 비진리로 비진리를 진리로 묘사해 버립니다.

프랭크린 프래지어(E. Franklin Frazier) 박사는 '인종 편견 시험'이라는 재미있는 수상집에서 인종 편견을 다루었습니다. 실험대상이 된 사람은 일상의 삶에서 다른 백인들과 친밀하면서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백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인종차별과 흑인을 꼭 같은 존재로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믿을 수 없는 비논리성과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움이 마음에 끈질기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은 우리가 가진 많은 피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속에 뿌리 깊히 박혀있는 미움에서 발생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말합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미움은 인격을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놀랍고 재빠르게 사람의 인격성을 회복시켜 준다"고 예수가 이미 수 세기 전에 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사랑은 우리의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면 우리는 결코 원수가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적의를 제거할 때에 우리의 원수가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본질 상 미움은 파괴하며 파멸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질 상 사랑은 창조하고 만들어 나갑니다. 사랑은 속죄의 힘으로 변화시킵니다.

미국 전 역사를 통틀어 링컨 대통령은 사랑으로 화합의 드라마를 이루어 낸, 놀라운 인물로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의 숙적은 스탠톤(Stanton)이었습니다. 스탠톤은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대중 앞에서 링컨을 깍아 내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스탠톤에게는 링컨에 대한 뿌리 깊은 미움이 있었기 때문에 링컨의 면전에 대고 퉁명스런 말투로 쏘아 붙였으며 기회만 주어지면 링컨에게 통렬한 비난을 쏟아 부어 링컨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링컨의 정책을 수행해갈, 가장 가까이에서 링컨을 보좌해야 할 각료들을 뽑아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링컨은 요소 요소에 가장 적합한 장관들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링컨이 중요한 국무장관에 사람을 임명해야 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링컨이 이 자리에 누구를 임명했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이름이 '스탠톤'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링컨을 도왔던 내부 그룹에서 즉각적인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충고에 충고가 이어졌습니다. "각하, 지금 큰 실수를 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이 '스탠톤'인 것을 아십니까? 스탠톤이 각하에 대해서 했던 온갖 추악한 말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각하의 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탠톤은 각하께서 수행하는 정책을 방해하는 데 힘쓸 것입니다. 각하, 이 사람을 임명하는 일을 심사숙고하신 것입니까?"

링컨의 대답은 분명하고 정확했습니다. "예, 나도 스탠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가 나에 대해서 말했던 끔직한 말들을 전부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를 생각한다면 그가 가장 적임자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스탠톤은 아브라함 링컨의 국무장관이 되었고 국가와 대통령에게 엄청난 봉사를 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링컨은 암살되었습니다. 링컨에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가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웰스(H. G. Wells)는 링컨을 미국 역사 상 위대한 6인의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에 관련된 수 없이 많은 일화가 있지만 스탠톤과 관련된 일화는 가장 위대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스탠톤은 그가 한때 무척 미워했던 사람의 시신 앞에 서서 링컨은 지금까지 살아 간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우리 가슴 속에 오래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링컨이 스탠톤을 꼭 같이 미워했다면 그들은 무덤에서도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이 가진 사랑의 힘은 적을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링컨이 남부에서 했던 부드러운 말은 링컨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태도 때문에 남북전쟁 중 감정이 최고로 악화되었을 때 남부에서 링컨은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링컨의 이러한 태도에 충격을 받은 구경꾼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냐? 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부인, 나의 적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나의 적들을 파멸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속죄의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궁극적인,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아야 하는 더 기본적인 이유는 예수의 말씀에 더 세밀하게 나타납니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는 하나님과의 이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어려운 사명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잠재적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랑을 행할 때 이 잠재성이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종 차별에 대해서 앞에 말했던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입니다. 핍박을 받는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능력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인종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종차별의 어두운 그림자는 용서하는 사랑의 빛으로만 사라질 수 있습니다. 3세기 이상에 걸쳐 미국의 흑인들은 압제의 쇠사슬에 온 몸을 맞아왔습니다. 낮에는 혹사당하고 밤에는 참을 수 없는 불의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이들은 인종차별의 부당한 짐을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 살기를 강요당한다면 우리는 더 모진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며 꼭 같은 증오로 보복할 마음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질서는 점점 사라지고 기존의 질서만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움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힘과 겸손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생은 꼭 같이 주고 받고 그대로 되돌려 갚아 주는, 개가 개를 삼키는 것과 비슷한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설교자들이 말하는 내용처럼 들립니까? 당신은 이상이 실현된 유토피아와 조금 동떨어진 세계, 지나치게 힘든 세상은 아니지만 냉정한 세계에 살아간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친구들과 우리들은 오랜 시간 동안 현실에 따라 살아 왔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방법이 지금 우리에게 더 깊은 혼동과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미움과 폭력에 무릎을 꿇은 공동체의 붕괴로 이 시대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속죄와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힘과 정열을 다하여 인종차별의 이 악몽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정책은 소름끼치게 싫어하지만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당신에게 이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하는 육체적 폭력을 영혼의 힘으로 이겨낼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이것을 계속 행한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제시하는 불의한 법을 따를 만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은 선과 결탁하는 것만큼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감옥에 넣는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분노에 가득 찬 당신의 하수인 관리를 우리 공동체에 한밤 중에 보내서 마구 우리를 때리고 우리가 거의 죽은 것 처럼 남아 있다 해도, 그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끈질지게 고통을 참아내는 것에 당신이 지쳐버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어느날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자유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해서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릴 것입니다. 우리가 거둔 승리의 기쁨이 두 배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번식한 이 창조적인 힘은 인류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요구를 가장 잘 들어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위대한 장군이었던 나폴레옹(Napolen Bonaparte)은 자신이 치른 전쟁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Alexander), 시저(Caesar),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와 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에 의존하였는가? 그들은 힘에 의존했다. 그러나 수세기 전 예수는 사랑 위에 제국을 세웠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누가 이 말의 진실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이름을 떨쳤던 위대한 장군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제국은 무너졌고 불타서 한 줌의 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견고하고 웅장하게 세워졌고 이 나라는 지금도 커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주님의 영감으로 헌신된 사람들로 구성된 아주 작은 무리로 출발하였으나 이들은 로마 제국을 흔들고, 결과적으로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일까지 해냈습니다. 오늘날 가장 광대한 나라인 예수의 나라는 9천 만을 넘어가고 모든 대륙과 종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 승리의 약속을 듣습니다.

예수는 태양이 떠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다스리신다
예수의 성공적인 여행은 계속된다
달이 차고 기울어 지는 곳까지
그의 나라는 나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미친다

또 다른 찬양소리로 화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동과 서가 없네
그리스도 안에는 남과 북이 없네
온 세계를 뒤덮는 위대한 사랑만 있네

예수가 전적으로 옳습니다. 역사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을 거절당했던 한 사람의 하얀 유골로 대체되었습니다.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 말씀을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까지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틴루터 킹 / 흑인인권운동가,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68년 암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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