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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움으로 변해 버린 고통 / 막 5: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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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으로 변해 버린 고통(막5:24-34) 


마가복음 5장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사실 여러모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당시에 영향력 있는 인물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에 관한 본문 역시 자신의 독립적인 본문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실 때에도 이 여인은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본문을 좀더 넓게 보더라도 우리는 혈루병을 앓고 있는 이 여인에 관한 오늘의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중요한 인물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정말로 인상적인 이야기,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이 본문은 조그맣게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이 본문이 갑자기 끼여들기 전인 앞부분에서는, 회당장이라고 하는 당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끼여든 오늘 본문의 뒷부분 35절 이하에서 회당장 야이로와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면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은 그래서 더 영향력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여들면서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 관한 본문이 이렇게 다른 본문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기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끝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의 인생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과 서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든 우리네 인생에서든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사람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는 더 멋지고 중요한 이야기들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15분짜리 명성, 아니 명성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렇고 그러 15분짜리 즐거움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랍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초라한 여인이 성경 본문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참으로 무기력한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I

이 여인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고 당신의 군중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군중들로부터 밀려나서 저 한 구석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관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첫 번째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바로 이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그녀의 몸에서 쑥쑥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냄새나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람들은 혈루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이 여인은 26절의 말씀처럼 많은 의원들로부터도 괴로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고 여러 의원들로부트 시달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점잖기도 하고 때로는 불친절하기도 한 의원들이나 또는 수련의로부터 이런 저런 짜증난 질문들을 반복해서 받아들여야 했고, 고칠 수 없다는 절망스러운 이야기만을 계속해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러는 중에 계속해서 치료비도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이 여인에게 주어진 결과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허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요즈음과 같은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병 고치는 데 다 허비해 버렸는데도 여전히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은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질병을 몸에 짊어지고서 가산을 모두 날려버리고 이제 아무런 희망도 낙도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오늘 본문에서 이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마지막 딱 한 번의 결사적인 시도를 해 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꺼져 가는 희망을 붙들고 이제 마지막 시도를 해 보아야 하겠다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녀의 결사적인 행동은 분명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곳에 기댈 곳이 없다는 절망과 분명히 여기에 길이 있다는 믿음 속에서 이제 그녀는 마지막 선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권능을 향하여 간절히 손을 뻗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뻗어진 창백한 이 손이 오늘 바로 권능을 움직인 고통(pain touching power)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만일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라도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함이나 좌절과 부끄러움을 뛰어 넘어서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구하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손을 뻗어서 누군가를 만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길거리에서 슬쩍 누군가를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만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간의 벽을 깨부수고 도저히 접촉해서는 안 될 사람에 의하여 일어난 크나큰 사건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사람과 무시받을 만한 사람 사이의 벽을 깨부수고 일어난 접촉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모든 절박함과 무기력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손을 뻗어서 젊은이들 속에 담긴 생명의 기운을 받아보고 싶어서 간절히 손을 뻗어 내미는 노인테들처럼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바로 이 순간에 권능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권응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병고침의 권능만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손을 얹어서 일종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안수식처럼 이 여인에게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 부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권응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달되고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참된 사도적 계승(real apostolic succession)이기도 합니다. 권능이 전달되고 새로운 가능성이 전달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사도적 계승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결과로 그 여인이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그 즉시입니다. 여기에서 바가는 "곧"(euthus)이라는 즉각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고 즉시로 피가 멈추었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통은 권능을 만졌고 그 결과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II
그 여인의 예수님을 만진 직후세 이제서야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지만 예수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규의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권능이 충만하였고 그 주위에 이 권능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로 예수님은 권능이 그로부터 누군가에게로 빠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갑자기 무례하게 끼여든 것에 당황해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 일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염려하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누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짤막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명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찾아보아라." 그러나 제자들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진 것이 대수이겠는가 싶어서 예수님께 별 생각없이 반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권세자 사이에 일어난 이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대꾸한 것입니다. "큰 군중이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밀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이렇게 정신없는 데서 만진 사람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병에서 이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이 여인도 알아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누군가에 의하여 자신의 몸이 노출되었음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출됨으로써 예수님 자신과 그 여인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권능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병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 여인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형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뀌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감동되지 않으시면서 남만을 감동시키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여인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렇게 병자와 예수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감동의 드라마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밭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군중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이연인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서 자신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제 새롭게 고침을 받게 된 데서 생긴 용기와 자유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이 대목에서 본문은 말하기를 "여자가 자기에게 이뤄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서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라고 합니다. 병 고침을 받은 여인과 권능 있는 치유자 사이에 참으로 감동스러운 순간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자신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간절함을 위해서 예수님의 몸을 몰래 만졌다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끼여들 수 없는 곳에서 불쑥 끼여들었습니다. 남들 같으면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순간에 몰래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전에 평생동안 짊어지고 있어야 했던 고통과 이제 자신의 생명을 살린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사실들, 그리고 병 고침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부어진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에 관한 사실들까지 모두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여인은 두려워하며 떨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참 이상하죠?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몸을 불쑥 만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그동안 병자취급을 받으면서 거칠게 대우받았고 또 힘있는 사람들한테 병자로서 항상 위험을 느껴왔기 때문에, 이제 권세있는 자 앞에서 또다시 조롱과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아서 두려운 것입니다.

III

여인의 말이 끝나자 이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사능성을 함께 만들었던 자신의 파트너를 드디어 발견하셨다는 점입니다. 권세있는 자와 병자가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함께 만들었던 권세자와 병자 두 파트너가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군중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여인에 대해서 놀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거나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권세자가 약한 자에게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이 이러한 약간은 의외의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결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나왔다거나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만진 것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을 만짐으로써 자신의 권능이 약화되거나 또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이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일을 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빌 2:4). 예수님은 자신의 명성보다는 이 여인과 그녀의 미래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사실 예전에 이 여인은 자기에게도 어떤 미래가 있을 것인지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여인에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의 참된 자아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고서 존중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딸이라고 부름으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족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예로운 방식으로 이 여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위해서 자신은 무언가를 해 주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이여인이 품고 있었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열망도 사실은 그녀 자신의 열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의원들과 재력가들이 그녀를 미참한 상태에 내버려두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러한 비참한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열망과 각오도 그녀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려는 데 있어서 이 여인 스스로가 자신이 용기와 자유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선택한 길입니다. 그녀는 분명 손을 내 뻗어서 권능을 받고 변화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분명 이제 자신의 미래는 더 이상 절망스러운 과거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확신에 찬 믿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 속에서 이 여인을 보내고 계십니다. 더 이상 피 흘림도 없이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속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도움과 희망을 주지도 못하는 의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건강하고 희망에 찬 하나님의 딸로서 평안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제 이 여인은 자신의 합당한 지위를 되찾았고 이제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다시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제 더 나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더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여인에게 베풀었던 것을 회당장과 그의 딸에게도 동일하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무언가 또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질 수가 없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과 그의 딸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이 이름도 없는 이 여인에게도 새로운 생명과 미래의 가능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는 이 여인도 이제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볼품없고 초라한 이름도 없는 병자였는데 이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된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을 주는 권능의 범위 안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IV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 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여인처럼 계속해서 거칠게 대우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생명을 쏟아버리고 헛되이 가산을 써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권능에 손을 대보고 싶지만 전혀 그러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 모두는 군중들 틈 속에서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제자들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바빠서 당연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도 못하는 제자들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론 예수님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일원으로서 예수님의 권능과 치유하시는 능력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간의 권능이 우리에게서부터 피 흘리는 환자들에게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환자와 권능을 가진 자가 서로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엮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이 절망적인 여인과 예수님에 관한 조금은 이상한 이 본문이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본문이 아니라면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 모여서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창백하게 내뻗었던 그 손이 결국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이 본문이 아니라면 이 초라한 여인이 결국은 삶과 실존에 대한 전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믿는 여러분은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한 예전의 관습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고 하는 예전의 패턴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뭉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 실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새 세상을 향한 지도입니다. 그분을 만짐으로써 우리에게 새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함께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우리를 위한 말씀, 그리고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우리 동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너의 믿음으로 온전하여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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