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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의미 / 엡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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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의미
에베소서 3:1-13

영국 교회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종교 의식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문조사 항목 가운데 한 질문이 "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지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조사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대답을 해서 아주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마음 속으로 대답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빨간 벽돌교회를 원합니다"
이것은 교인이나 비교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성경의 이해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교회는 결코 빌딩이 아닙니다. 건물은 필요하지만, 교회의 본질이 건물은 아니지요
교회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로마의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세상, 그러니까 주후 62년 전 후의 이 시기는 한창 로마의 영광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옥중에서 쓰면서 로마의 영광이 아닌 교회의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를 가졌던, 매우 영향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기 생애에서 한 곳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오랫동안 보낸 시간, 적어도 3년여의 시간을 보냈어요.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기억하며, 이 교회가 로마의 지배와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무릎 끓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기대 속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3장에는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몇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1. 깨달음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첫째는 "깨달았다"라는 단어입니다. 3장 3절에 보시면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하신 것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이 비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가리켜서 깨달음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깨달았다"는 단어를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요.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으면 같이 읽어야 할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예요.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가리켜서 "쌍둥이 서신"(Twin epistle) 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되어서 골로새서를 읽으면 "아!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고, 골로새서를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에베소서를 읽어보시면 돼요. 그러면 서로 보완되어서, 그 뜻이 스스로 자명하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비밀얘기를 많이 하지만, 골로새서에서도 비밀이야기를 아주 많이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6절은 만세로부터 감취었던 비밀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골로새서 1장 2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 비밀의 영광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골로새서 서는 일차적으로 이 비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다"
그러니까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첫번째로 이 비밀의 의미를 강조할 때, 이 비밀은 여러분과 제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가 구세주와 주님으로 우리 안에 영접하여 우리 안에 지금 계신 그리스도, 바로 그리스도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 주님이 내 안에 살게 된 것, 그래서 내가 구원을 체험한 사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실이 바로 비밀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라는 뜻의 히랍어 단어가 "무스테리온"입니다. 영어의 미스테리(mystery)가 바로 무스테리온에서부터 나왔어요.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는 그냥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계속 숨겨져야 할 그런 비밀이 아니라, 이것은 자랑하고 싶은 비밀입니다. 여러분, 비밀가운데 어떤 비밀을 내가 알게 되면 말하고 싶잖아요? 그 비밀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밀이야!"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 있죠?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 무스테리온 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영어로 "Open secret" 이라고 했어요.
나타난 비밀, 공공연한 비밀, 이제는 당연히 나타나야 되고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신 것, 내가 구원을 받은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이것이 놀라운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다시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바울사도는 바로 이 비밀, 복음의 비밀을 듣고 골로새 교인들이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골로새 1장 5절을 보시면 너희에게 복음 진리의 말씀이 찾아왔고 이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골로새서 1장 6절을 보시면 이 복음이 이르매, 복음이 너희에게 도달하매 너희가 이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온 천하 가운데서 너희 믿음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정말 들었다는 그 증거가 뭘까요? 내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달았다는 증거가 뭘까요? 골로새서 1장 6절에 의하면 "너희가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복음을 들었다는 증거로 그 다음에 강조하고 있는 말이 이 말입니다.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러니까 복음을 들었다는 말은 그냥 설교 한번 들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말 복음을 듣고 보니까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셨구나, 나 같은 죄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내 인생을 변화 시켜 주셨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 놀랍구나!"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는 것, 이것이 복음을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예수 안 믿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 친구에게 전도를 하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무신론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너하고 나하고 다른 게 뭐가 있냐? 본질적으로 내가 믿어서 달라질 것이 도대체 뭐가 있냐? 비슷한데 도대체 왜 믿느냐? 너하고 나하고 다를 것도 없는데..."
그때 그 친구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게 있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있고, 너는 모른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무신론 친구가 "야! 있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한 번 나한테 증거를 보여라!"
그래서 믿는 사람이 "어떤 증거를 보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야! 너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 욕할테이까,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한번 내려와 보래, 나를 한번 죽이든가 어떻게 해 보래"
그러더니 갑자기 한 5분 동안 거침없이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막 쏟아 놓더랍니다. 그러고 가만히 있는 거에요. 그러더니 "야 봐! 아무렇지도 않찮아,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이때 믿는 사람이 친구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야! 지금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증명되었구나! 내가 하나님이라면 너를 벌써 작살을 낼 텐데 하나님은 너를 향해 참았던 거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거야, 그 은혜가 지금도 증명된 거야, 그런데 너는 그 은혜를 모를 뿐이고 나는 알고 있고, 그게 차이란 말이야!"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교우들이 교회에 나오고 출석을 하는데도 삶의 변화가 없어요. 또 신앙이 자라나지 않아요. 그러면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복음을 깨달았는가?"라는 질문이예요.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기쁜 소식(Good news), 이 복음의 비밀을 나는 정말 깨달아 알았을까? 깨달아 알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는가?"는 말이예요.
우리 교회 오신다고 해서 다 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는 "새생명반", "새 가족반" 과 같은 기초적인 성경 공부반 과정들이 준비되어있는데, 적어도 새생명, 새가족 반을 통과한 사람들만을 우리교회에서 정교인으로 인정한다는 것 아세요?
그런데 "그런 절차를 밟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다른 데서 다 공부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무리 확인해도 모자라지 않을 중요한 확인, 첫번째 성경공부 반인 새생명반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돕는 거에요. 물론 그 과정을 통과한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인 중에 제 마음을 감동시킨 한 교인이 있는데, 그분은 새생명반 성경공부를 세번이나 하셨답니다. 왜 그러셨냐고 물었더니, 처음에 하니까 잘 모르겠대요, 그래서 두번 하니까 조금 알고, 그래서 세번째하고 나서 저한테 와서 "목사님 제가 드디어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을 정말 깨달았습니다!"라고 고백하셨어요. 이분이 정말 변하더라구요. 그래서 한번해서 안되면, 두번 세번이라도 하세요.
정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비밀을 깨닫는 것,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에요. 그래야 진짜 교인이 돼요.

교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우리를 차별화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와 무엇이 다를까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 무리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함께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자, 교회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 또 하나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하는" 이라는 단어입니다. 교회는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6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어떤 단어가 강조되고 있죠? "함께"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상속으로 주시려고 준비한 것이 많아요. 그런데 복음을 듣고 깨달으면 함께 하나님의 상속한 바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후사가 됩니다. 또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공동체의 지체가 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그 놀랍고 위대한 약속들에 대해서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사실 유태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이 함께 복음을 듣고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선민 의식에 세뇌를 당해 왔습니다. 좋은 선민의식은 필요해요. 그러나 그릇된 선민 의식은 뭐냐하면 "나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니까 너희들은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 금을 만드는 거에요. 담을 쌓는 거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의 이방인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실제로 이방인들을 "개" 라고 불렀고요.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원수시(視)했습니다. 이것이 그릇된 선민의식의 결과에요. 원수 삼았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거에요.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의 견고한 벽이 무너지고 그들이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지체가 되는 놀라운 사실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에요.
사실은 에베소서 2장의 하반부 전체에서 바울은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세요. 14절을 보시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다(He is our peace)!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라는 선언입니다. 그 다음에 "둘로 하나를 만드사" 이 둘은 뭐냐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이에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이게 무슨 말일까요?
"둘이 한 새 사람이 된다"에서 이 새사람은 어떤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에요. 유대인과 이방인이 마치 한 사람이 되듯, 한 공동체가 되어 화평하게 하셨다는 말이에요. 16절을 보세요.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하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해 버리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들에게 이방인들에게도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복음을 통한 진정한 화평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다음에 19절을 보세요. 너무 중요한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믿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Stranger)이 아니다, 낯선 사람이 아니다, 손님도 아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함께 천국의 시민권을 받은 동일한 시민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권속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뭡니까? 하나님의 가족(Family), 식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식구된 것을 느끼세요? 가족 된 것을 느끼세요?

왜 우리가 가족 된 것을 못 느낄까요?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편견이 뿌리박고 있어요. 누구나 다 할 것 없이, 비단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상한 적대감과 편견이 뿌리박고 있고, 이것이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하나되지 못하는 일이 많찮아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어떤 목사 한분이 백인과 흑인이 정말 하나가 되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상을 가진 교회를 세웠어요. 그래서 일부러 정말 흑인과 백인들이 잘 어울릴 수 있는 문화, 그런 교회 환경을 창조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어른들은 어느정도 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안섞여요. 교회 버스가 주일날 올 때마다 버스를 타면 백인아이, 흑인아이, 쫙 갈라서 앉는 거에요.
주일학교 교사였던 존 리드라는 분이 마음이 속상해서 한번은 버스에 탄 아이들을 보고, 쪽 갈라져서 앉은 아이들을 보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 너희들 백인아이들 너희들 피부색깔이 뭐냐?" 그러니까 "하얀 색깔이요(White)!" 그러자 이렇게 애기했대요. "뭘 하예? 자세히 보라고, 너희들도 까만 것이 많아! 자세히 보라고, 더 자세히!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얀 것이 아니라 회색이야 회색! 알았나? 다시 묻는다 너희들 색깔이 뭐냐?" 그러니까 "회색이요"라고 대답하더래요.
선생님은 또 흑인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피부색깔이 뭐냐?" "검은색이요(Black)!" 그래요. "가만히 봐, 너희들 실제로 그렇게 까만 것만은 아니야, 자세히 봐! 너희들도 회색이야 회색! 자, 너희들 색깔 뭐냐?" "회색이요"
"자, 그러면 우리 색깔 이제부터 하나다, 너희들 다 무슨 색깔이야?" 그러니까 다같이 "회색이요!" 라고 애들이 대답했어요.
그 다음 기회에 교회 버스를 타게 되었을 때 보니까, 백인 두목쯤 되는 아이 하나가 갑자기 들어오더니 교통정리를 하더래요. 뭐라고 말하는고 하니 "야! 밝은 회색 이쪽으로!, 어두운 회색 이쪽으로!" 인간의 편견을 극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않다는, 어렵다는 말이죠.

어떻게 우리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어요? 정말 함께하는 공동체, 어떻게 우리가 가족됨을 체험할 수가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우리 같은 메가 사이즈(mega size), 좀 큰 교회 사이즈가 되면 "그건 불가능하다", 이렇게 포기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소위 예루살렘 교회의 숫자가 적지 않았어요. 학자에 따라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한 3만명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교회 보다도 큰 교회에요.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 의식이 있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적지 않은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말 공동체의식, 가족의식을 갖고 정말 서로 사랑하면서 그 시대를 뒤집어 엎을 수 있었던 그런 놀라운 비밀은, 생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행전 2장 46절과 같은 말씀이 계속 나와요. 초대 교인들이 성전에서도 모이고, 그 다음에 집에서도 모여,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했더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비밀이 뭐냐하면, 그들이 성전에서만 모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성전에서 큰 모임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면 좀처럼 가족의식을 느끼지 못하죠. 그런데 그들은 집에서 모였어요. 사도행전 읽어보세요. 얼마나 많이 집에서 모였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그룹으로, 적은 단위로 집에서 모이고 있었던 거에요.
여러분, 숫자가 적은 소그룹으로 집에서 모여서 우리의 마음을 정말 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고통, 아픔, 답답함, 눈물, 다 얘기 할 수 있잖아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 보면 그게 가족이 되는 거에요.

요즘 세계 교회의 흐름 속에서 건강한 교회를 향한 의지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 소위 셀 교회(Cell Church)운동이에요. 가정교회 운동, 집에서 하는 교회입니다. Cell Church 전략가들은 초대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가 그토록 정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비밀을 이런 단어로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두 날개로 날고 있었던 교회다" 두 날개가 뭐냐하면, 한 날개는 성전에서 모이는 큰 모임의 축제(Celebration)예요. 크게, 우리 전체로 모여서 같이 찬양하고 크게 은혜를 받는 것은 필요해요.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안되지요. 또 하나의 날개는 집에서 모이는 소 그룹, 소 그룹을 통한 가정교회, 가정교회 운동이예요.
내년부터 우리교회는 3년여에 걸쳐서 Cell Church로 모든 교회 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러니까 내년부터 여러분이 소그룹에 안 들어가면 우리교회에서, 전에도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사람 취급을 못 받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교회를 만드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정말 그런 일들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까? 제가 두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우선 첫번째로 교회 등록을 하셔야 돼요. 요즘은 아예 사람들이 등록도 않해요 그냥, 편하게 믿으려고 해요.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 복음성가 부르면서 이 교회 저교회로 전전하며 다니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가족 의식을 가지려면 분명한 소속이 있어야 해요.
그 다음에 우리 교회의 작은 모임을 찾으셔야해요. 저희 교회에서는 이런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모임이 있기 때문에 동네 아파트 모임에 가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요. 몇 군데를 다녀 봐요.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잘 적응할 수 있는 소그룹을 여러분이 찾으셔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목장모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내년부터 목장교회라고 부를 거예요. 이 소그룹 안에서 진정한 나눔을 찾아야 돼요.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성공을 나누고 실패를 나누고, 내 좌절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를 거기서 경험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시카고의 교회 목사님이 목회스타일을 전환을 시키는데, 아이들도 자꾸만 하나가 안되니까, 흑인과 백인이 제일 많이 한 것이 계속 캠프를 갔던 것이었어요. 같이 살아보니까 다 죄인이거든요. 같이 살아보니까 참 예수님 같이 사랑하거든요. 그러면서 흑백의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극복되기 시작한 거에요. 살아야 돼요. 공동체로 돌아가야 돼요. 교회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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