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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록수와 같은 믿음 / 렘 17:5-8 , 고후 11: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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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상록수와 같은 믿음 성경본문 : 렘 17:5-8 , 고린도후서 11:23-28

예수 믿는 어떤 사람이 유명한 성자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어떻게 믿어야 바로 믿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때 성자가 저기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 이 나쁜놈아! 이 죽일놈아! 천하에 못쓸놈아! ' 하고 싶은대로 욕을 실컨 다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공동 묘지에 가서 발악을 하고 욕을 퍼 붓고 돌아왔습니다. 성자가 물었습니다. 가서 욕을 하니까 뭐라고 대꾸 합디까? 아무말도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감각이 없다는 뜻이고, 끝났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설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사흘동안 여행을 갔다 왔더니 아내가 잔득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보고 말하기를 이 넓은 천지에 여자라고는 당신 한 사람밖에 없으니 내가 외도한 것도 아닌데, 어딜 좀 갔다 왔기로 왜 이렇게 화가 났습니까? 그리고 아담은 여전히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도대체 이것을 이해 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다가 밤에 몰래 아담의 갈빗대를 세어 보드랍니다. 갈빗대 하나 더 뽑아 가지고 어디다 여자를 하나 더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야 저 남자가 왜 저렇게 좋아할까 싶어서였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에덴동산에서부터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 의심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어 집니다.의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믿어야 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상대방을 믿고,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환경이 믿음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을 수 있고 이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는 많은 종류의 나무가 있습니다.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상록수가 있고, 겨울에는 잎이 떨어지는 낙엽수가 있습니다.
믿음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록수와 같은 믿음이 있고, 낙엽수와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 렘 17장에 보면 두 가지 믿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 고 했습니다.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고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없고, 사람이 살지 않는 메마른 땅에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7절과 8절에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며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고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잎이 마르지 아니하고 언제나 푸른 잎이 달려있는 상록수는 보기에도 매우 아름답고 좋습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상태도 상록수와 같이 아름답고 싱싱하고 푸르러야 하겠습니다.

상록수 같은 믿음은 먼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상록수는 비바람이 부는 때나 흰눈이 덮일 때나 늘 푸르름을 잃지 않습니다. 언제나 푸르고 싱싱합니다. 색깔이 변하지 않습니다. 잎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상록수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신약의 말씀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은 매를 수없이 많이 맞고, 옥에도 여러 번 갇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믿음은 언제나 한결 같았습니다. 전도 여행 중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형제들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애쓰고, 잠을 못 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언제나 푸르름을 유지하는 상록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이떠한지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도 믿음이 없고 수시로 색깔을 달리하는 변화무쌍한 믿음이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 욥기를 보면 욥도 상록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습니다. 양이 7,000마리, 약대가 3,000마리 소가 500겨리, 암나귀가 500마리였고, 종도 많이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자녀를 10남매를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할 만큼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이런 욥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양과 약대와 소와 나귀와 종들이 적군에게 약탈되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에 다 타서 죽었고 10남매 자녀는 몰아치는 광풍에 지붕이 무너져서 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존경하고 따르던 이웃사람들은 하나씩 떠나가고 가까운 친구들에게서는 죄 값이라는 오해를 받았고 아내에게서까지 인생실패자라는 구박을 받았을 때,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자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변함 없이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욥은 참으로 상록수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일이 잘 되었을 때도, 일이 안 되다 못해 모든 것이 전부 없어 졌을 때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다니엘도 상록수와 같은 믿음을 가졌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고 따르는 상록수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성도들의 믿음을 보면 너무 속히 변합니다. 뜨거워졌는가 하면 어느새 차디차게 식어 버립니다. 이제 믿음이 성장해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곁길로 들어서 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등록했는가 하면 어느새 어디로 가 버립니다.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변치 않고 끝가지 지켜야 가치가 있습니다. 바울은 죽을 때가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메마른 대지 위에 앙상하게 말라져 가는 나무사이에 푸른 가지를 사방으로 쪽쭉 뻗고 엄동설한에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서 있는 상록수는 참으로 보기에도 좋습니다. 우리도 거칠고 각박한 불신의 대지 위에 항상 푸르고 싱싱한 신앙의 상록수가 되어 변함없이 예수님만 섬깁시다. 엡 6:24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상록수 같은 믿음은 계속 성장합니다.
상록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낙엽수도 잎은 떨어졌으나 뿌리와 가지는 다 살아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죽은 나무와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상록수는 푸른 잎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나무 인 것을 곧 알 수가 있습니다. 상록수와 같은 신앙은 산 믿음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믿음은 산 믿음인지 사데교회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믿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렘 17: 7절에 잎이 푸르고 싱싱한 나무는 물가에 심기워져 있습니다. 아무리 상록수라고 할찌라도 수분이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산 믿음 생명력있는 믿음을 가질려고 하면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있어야 우리 생명이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요 15장에 말씀하신대로 포도나무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삽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지거나 짤리우면 말라죽게 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입니다. 죽을 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움직입니다. 일합니다. 봉사합니다. 전도합니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일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자라납니다. 나무도 자라나고 풀도 자라나고 곡식도 자라나고 어린아이도 자라납니다. 젊은이도 자라납니다. 산 믿음을 가진 성도는 믿음이 성장합니다. 작년 다르고 금년이 다르게 자라납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기 때문에 크게 자라납니다.
벧전 2:2에 보면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이 자라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자라나지 아니하면 병이 들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산 것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벧전 2:2에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젖을 먹어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믿음이 자라나게 됩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말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만일 그 말에게 무슨 이상이 생기면 관리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왕이 사랑하는 말이 먹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시름 시름 하더니 죽었습니다.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 즉시 가서 보고를 해야 하는데 왕에게 말이 죽었다고 보고하면 자기가 당장에 죽게 되기 때문에 보고를 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보고를 안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몇 일동안 연구하다가 왕에게 가서 보고하기를 " 대왕님의 말이 먹지 못한지가 사흘째입니다. " " 그것 큰일났구나. " " 운동을 못한지가 삼일째입니다. " " 그렇다면 대단하구나. " " 숨을 쉬지 못한지가 사흘이 되었습니다. " " 그렇다면 죽었단 말 아니냐? " 그때 죽었다고 하면 자기가 죽게 되기 때문에 대왕님의 말씀이 맞는줄로 압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신령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아니하고, 운동하지 아니하고, 전도하지 아니하고, 숨을 쉬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믿음이 자라지 아니할 뿐 아니라 죽게 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신령한 양식인 성경을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산 믿음을 갖어야 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일제 때 어느 여 성도가 남편의 핍박 가운데서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남편이 예수 믿도록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 남편은, 아무리 핍박을 해도 아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최후수단으로 숯불을 벌겋게 피워놓고 인두 두 개를 꽂아 불에 달군 다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아내에게 이제라도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하면 용서해 주겠으나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인두로 사정없이 지지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한 때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영원한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의 몸을 인두로 지져서 32곳에 화상을 입혔고, 아내는 기절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웃 사람이 지서에 알려서 순경이 와서 남편을 잡아다가 때린 후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얼마 후 아내가 깨어나서 보니 남편이 없어서 이웃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경찰에 잡혀갔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다 죽게 된 몸을 이끌고 지서에 가서 남편을 풀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풀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집에 와서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돌 같은 남편의 마음도 녹아져서 아내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자기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진실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다음에 상록수와 같은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유실수는 대개 잎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열대 지방이나 아열대 지방의 유실수는 렘 17:7절의 말씀대로 잎이 푸르고 싱싱하여 그치지 아니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푸른 나뭇가지에 탐스런 열매가 달린 것은 참으로 보기에 좋은 한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마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열매가 있어야 할 나무에 열매가 없을 때 존재할 가치가 없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 15:1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압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한 것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항상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롬 7:4절에 "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를 맺을려면 나무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죽은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렘 17:7절 말씀대로 잎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며 살아있는 나무가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 1:3절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으실 때 예수님이 기대하셨던 것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 예수님이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요 15: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생각하면 먼저 좋은 나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나무는 되지 아니하고 좋은 열매만 맺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되지 않습니다.
갈 5:22-23절에 성령의 열매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고 성령님께서 주도하시어 내 인격과 내 마음을 다 다스리게 되면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첫번째 열매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24:12절에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딸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한번은 열 살 된 딸이 큰 소리로 울면서 집에 들어 왔습니다. 한 소년에게 막대기로 심히 얻어맞은 딸은 화를 내며 아버지에게 호소했습니다. " 저 심술 꾼 녀석이 막대기로 나를 때렸어요. 저 아이를 좀 혼내 주세요. " 톨스토이는 빙그레 웃으며 딸을 꼭 껴안고 속삭였습니다. " 아빠가 그 아이를 때려 주면 소년은 너와 원수가 될텐데...?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단다. 너의 사랑이 전해지면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 톨스토이는 햄 샌드위치를 만들어 딸에게 들려주면서 말하기를 " 얘야 이것을 그 소년에게 갖다 주어라. " 그 후 딸은 소년과 사이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입니다.
사랑은 바윗돌 같은 마음도 녹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삶 속에서 날마다 행복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요 15: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잇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 15: 2절에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하나님께서 이를 잘라 버린신다고 했습니다. 마 3:10절에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눅 13:7절에 내가 3년을 와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 맺는 믿음이 상록수와 같은 믿음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대체로 보면 성탄 트리는 상록수에다 합니다. 성탄 트리를 볼 때마다 나는 상록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깊이 살펴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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