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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격려의 사람을 찾습니다 / 행 4:36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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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의 사람을 찾습니다
사도행전 4:36 ~ 37

얼마전 한 어린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담벼락에서 울고 있었어요. 얼마나 처량하게 우는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대답을 안 하려고 해서 구슬렸어요. 그랬더니 그 아이가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침에 학용품을 사기 위해 5천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학용품을못 사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화를 내며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돈을 잃어버려!" 그러면서 아이의 뒤통수를 때렸어요. 아이는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 아버지에게 꾸중들은 것이 너무나 낙심이 되어 울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아이의 머리를 만져보니 혹이 나 있었어요. 마음이아팠어요. 도대체 어떤 부모이기에 돈 5천원 때문에 아이를 야단치고 머리에 혹까지 내야 하는가!
그 아이가 얼마나 불쌍하고 안 돼 보였던지...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 밑에서 자랐습니까? 최근에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직장 동료, 그 누구든 간에 정말로 용기를 심어주는 따뜻한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바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굉장히 멋진 한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그의 별명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이름보다 별명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36절을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의 이름은 요셉이었어요. 바나바는 사도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그것이 너무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요셉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라 알고 있는 겁니다. '바나바'는 권위자라고 번역해 놓았어요. 그렇다면 권위자(勸慰子)는 무슨 뜻일까요? 勸(권할 권), 慰(위로할 위), 子(자식 자)를 썼어요.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격려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는가? 본문을 보면, 요셉은구브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인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유대인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어요. 레위족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요, 보통 레위인, 즉 우리와 같은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평범한 이 사람을 위대한 바나바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바나바를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사도행전은 그가 행하였던 격려의 삶으로 인해, 그가 이러한 위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살았던 격려의 삶이 너무나도 놀라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원래 이름보다는 '격려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바나바의 별명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부부간에, 이 교회와 사회에 그런 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이런 격려자가 될 수 있을까요? 격려자의 별명을 가지고 한 교회를 세울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 시대를 세웠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바나바의 삶을 추적하면서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한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7절)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34-35절)


아마 예루살렘에 있던 수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헌금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구제헌금이겠지요. 그런데 왜 유독 바나바만 기록되었을까요? 아마도 다른 모든 성도들이 구제헌금에 동참했지만, 바나바가 가장 대표적으로, 가장 성실하게, 가장 모본(模本)이 될 만큼 깊게 구제 사역에 봉사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굉장한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교인이 몰려들었어요. 교회가 성장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다 보니 많은 필요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 역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는 참으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아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의 속박에서 수많은 세월을 눌려 지내왔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당장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어떻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가 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구제에 대한 문제가 교회 안에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 교회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의 밭을 팔기 시작했어요. 그 밭을 판 돈을 전부 교회 앞에 내놓았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내놓은 이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공명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가 없어서 넉넉한 가운데 바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가 자기의 소유를 판 단 하나의 이유는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격려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주 어려울 때 정말 사랑의 돈 얼마를 받아보셨습니까? 혹은 줘 보셨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유학생활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저의 메일 박스를 열었어요. 저희 학교는 약 2천명의 학생 개인의 메일 박스가 다 있었어요. 지금도 저는 그 메일 박스 번호를 외웁니다. 1156번! 비밀번호는 저만 압니다. 크리스마스 전 날 그 메일 박스를 열었더니, 아내와 좋은 식사를 하라는 짧은 글귀와 함께 50불이 들어있었어요. 누가 보냈는지 이름은 남겨져 있지 않았어요. 50불이 큰 돈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5만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돈의 액수에 상관없이 얼마나 큰 격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 저도 많은 학생들에게 삶의 모본(模本)을 따라 했습니다. 제 눈에 어려워 보이는 학생들 가운데, 제가 조금이라도 용돈이 남으면, 카드를 써서 이름을 적지 않고 넣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을 관찰해 봅니다. 얼굴이 확 피어납니다. 돈 몇 십 불이 그의 삶을 펴지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격려가 된 것이지요.

바나바는 바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밭을 팔아 내어놓는다고 수많은 교인들에게 무슨 큰 경제적인 보탬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기의 밭을 과감하게 팔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바나바라고 해서 왜 돈이 필요 없고, 쓸 곳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어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고, 저축도 해야 되고, 쓸 곳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늘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겁니다. 이렇듯 격려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늘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음식도 자기가 좋은 것을 먹어야 되고, 잠자리도 자기가 좋은 곳에 늘 자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건 자기가 좋은 것을 하고, 그 다음 남은 것을 가지고 타인에게 줍니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늘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합니다.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없어서 자기의 것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다 채우고 나서 남은 것으로 남을 도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격려의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쓸 곳이 많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내 것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격려가 될 줄 믿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격려의 삶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 어떤 태도를 가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사랑의 헌금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노란 봉투를 사용해 보셨나요? 그 노란 봉투의 헌금은 100%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여집니다. 약 20여명의 사람들이 구호를 받고 있습니다. 모두 사랑의 헌금으로 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사랑의 헌금을 하는가? 여러분 생각에 돈이 많은 사람이 할 것 같지요? 아닙니다. 제가 그 명단을 봅니다. 좀더 해야 할 사람은 안 합니다. 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자기도 넉넉지 않은 사람입니다. 결혼반지를 팔고, 적금을 깨고... 어려운 가운데서 남을 위해 내어놓는 겁니다.
그 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것이 받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느냐 입니다.

오늘 성경은 격려의 사람을 찾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지난 수개월 동안 누구를 돌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구를 진심으로 격려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할 때 놀라운 기적이 우리 가운데 생길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주리라!"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주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줄 믿습니다.

이 세계에서 남을 가장 많이 도운 나라는 미국입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축복하셨어요. 이기적인 나라를 보세요. 이기적인 개인을 보세요.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격려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의 필요보다는 남의 필요를 돌아보는, 다른 사람의 부족을 돌아보는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2. 사람을 믿습니다

"목사님, 사람을 믿으라니요? 차라리 우리 집 개를 믿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개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개는 배신을 안 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복날에 개를 배신하지요. 사람은 우리를 배신합니다. 제가 달라스에 있을 때, 인근 교회에서 여전도회 회장님이 계를 했어요. 여전도회 회원을 다 모아서 계를 했는데, 회장이 우두머리를 하다가 계돈을 다 모아서 떠나 버렸어요. 그 교회 계판이 개판이 되고 말았지요. 난리가 났어요. 눈만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들을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바나바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격려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이라는 젊은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서 그들을 잡아다가 족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어요. 그 날도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이후, 사도 바울은 변했습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가서 성도들과 교제하고, 복음을 나누며 전하고 싶은데, 누구 하나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겁니다. 워낙 사울이 악하게 굴었기 때문에 다들 믿지 않았어요. "아마 저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믿는 사람 누구누구를 끌고 가려나 보다! 스파이가 아닐까!" 하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때 놀라운 사람이 한 사람 등장하는데, 그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 26,27절을 보세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바나바가 어떻게 주님 본 것을 압니까? 그는 그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울 대신에 바나바가, 사울이 예수님 만난 것과 영접한 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얘기해 주는 겁니다. 바나바가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왜 이렇게 알 수 있었을까요? 바나바는 사울을 믿은 줄 믿습니다. 사울을 믿어준 겁니다. 그가 자기에게 와서 간증을 하는데 믿어주고 싶었던 겁니다. 도와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사울이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얘기를 해도 믿지 않으니까 자기가 대신 나가서 얘기를 해 준 겁니다. 바나바의 인격을 아니까 그제야 성도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아내가 저에게 무엇을 할 때 가장 고마운가? 요리, 안마, 이런 것보다 몇 백 배 더 고마운 것은 저를 믿어주는 겁니다. 제가 참 믿지 못할 사람인데 너무나 믿어줍니다. "당신은 목회 잘 할 수 있어. 당신은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어!" 라고 믿어줍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랍니까? 믿어주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라납니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지식이 많은 부모,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많으면 의심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의 부모님들은 농촌에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아들을 유학 보냅니다. 아들이 가끔 거짓말을 합니다.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책을 사야 합니다. 쌀을 팔아 부치세요." 그 돈을 받아 아들은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시골의 부모는 전혀 모르니까 공부하는데 이렇게 돈이 드는 줄 알고 쌀 팔고, 밭 팔아서 도와줍니다.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어머니의 지성으로 계속 오는 쌀을 어떻게 견딜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회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와요. 언제나 자식을 CIA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학교에서 어떻게 하는지 스파이까지 보내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얼마만큼 믿어주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루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잘못하고 일곱 번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사람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번 붙은 딱지를 떼려고 하면 10년이 걸린답니다. 10년 동안 못 참아서 "이왕에 나를 의심하는데 니 소원대로 한번 살아주마!" 그러면서 남편과 자녀가 뛰쳐나갑니다.

저는 때로 알고도 속아줍니다. 그것을 배웠어요. 제가 영리하고 눈치가 빠릅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관계하면서는 알고도 속아줍니다. 알고 속아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 줄 아십니까? 모르고 속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알고 속아 주면 기쁩니다. 다른 사람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래야 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망나니 같이 생활하다가 오늘 올바로 생활하겠다고 하면 믿어주십시오. 격려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3.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바라본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목회를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교회가 크게 부흥해서 커졌어요. 그때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초청합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에게는 아무도 사역을 맡기지 않았어요. 3년 동안 지도를 그렇게 보고, 성경을 보며 준비했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다소에서 혼자 외로이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때 바나바가 그를 불러 올립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부목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안디옥 교회를 보면 지도자,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사도 바울 없이도 충분히 교회가 커 갈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왜 사도 바울을 불렀는가? 사도 바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바나바는 그의 소명을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은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도와 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겁니다. 격려의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내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차갑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너무도 매정합니다. 쓰고 나서 쓸모 없으면 가차없이 버립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발견한 것 중의 하나가 우리 사회는 사람을 쓰고 나서 버리는 사회라는 겁니다. 사람을 길러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대기업만 봐도 명문대를 고생해서 나온 아이들을 뽑아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려먹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새벽 6시에 출근 버스를 태워서 밤 9시에 떨어뜨립니다. 가족, 취미, 모든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회사만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가족, 신앙, 모든 것을 뒤로하고 회사를 위해 희생한 그 사람들을 3,40대 초반에 잘라버립니다. 명퇴를 시키지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풍토입니다.

저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내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위험한 세상입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수단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사람에게 투자해서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격려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보는 사람을 이 세상은 찾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격려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격려의 사람은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합니다. 격려의 사람은 사람을 믿어줍니다. 격려의 사람은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목적으로 바라봅니다.



4.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운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나바의 삶을 통해서 격려의 사람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웁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그 당시에 신문 1면을 장식하는 큰 기사가 났습니다. 제목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박치기하며 싸우다!' 입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그렇게 훌륭한 인격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싸웠어요. 어느 정도 싸웠느냐 하면, 전도여행을 하다가 너는 동(東), 나는 서(西)로 갈라져서 따로 보따리를 싸서 헤어져 버렸어요. 원인은 '마가'라는 청년 때문이었어요.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 라고 하고, 바나바는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어요. 왜 사도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까? 1차 전도여행 때 그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전도여행이 힘들다고 중간에 보따리를 싸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어요. 사도 바울은 냉철한 사람이었기에, 2차 전도여행에 또 마가를 데리고 간다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하는 거였어요. 1차 여행 때 그렇게 불성실하게 우리를 떠나갔던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바나바는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데리고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싸웠어요. 결국 갈라졌어요.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누가 옳은가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옳았다, 바나바가 옳았다. 둘 다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누가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바나바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바나바가 그때 쓰러진 마가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성경책 중에는 그토록 중요한 '마가복음'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실패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격려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세움을 입어서, 결국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놀라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쓰며 디모데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 오라! 저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니라!" 마가와 화해하려고 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저는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잘 봅니다. 사자는 사냥을 할 때 반드시 팀을 이루어 사냥을 합니다. 아프리카에 소와 당나귀의 중간쯤 되는 소가 있어요. 그 소 떼들을 사자가 사냥하기 시작합니다. 소 떼들이 도망을 가는데 개울을 건너갑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넘어집니다. 넘어진 소와 같이 달리던 소가 저만큼 달려가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 넘어진 소를 돌면서 "푸르르~ 푸르르~"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넘어진 소가 얼마 있다가 일어납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더니 결국 같이 도망을 가는 겁니다.
그 동물을 관찰하는 과학자들이 '동물의 격려'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과학자들이 관찰한 결과, 넘어진 소는 누군가 다른 소가 격려할 때 반드시 일어나서 다시 도망가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한 소라도 실수나 지쳐서 넘어졌을 때 격려하는 소가 없으면, 그 소는 사자의 밥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누구라서 격려가 필요 없겠습니까?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성도와 성도간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격려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어 달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겁니다.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격려의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성 프랜시스는 평생동안 이런 기도문을 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늘의 세상은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바나바를 소리쳐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바나바가 되어 낙심하여 멸망해 가며, 격려가 필요해서 아우성치는 저 사람들의 소원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당신이 이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믿어 주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며, 넘어진 자를 과감하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 불신과 낙담으로 인해 넘어져 가는 이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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