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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현장 / 시 78: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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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현장
시 78: 51-55

오늘은 시편 78편 51절에서 55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의 현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에서 첫째로 손꼽히는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도탄에 빠졌던 난세에 태어났습니다. 석달 만에 나일강에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딸을 통해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궁전에서 40년 동안 온갖 것을 다 배웠을 때 성경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하였습니다(행 7:22). 다 배웠기 까닭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고만장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시키신 것도 아닌데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되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다가 사람을 때려죽이고 살인자라는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미디안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모세가 선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만했으면 자신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첫째로 교만해집니다. 둘째로 나를 주장하고, 나를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일이 잘 안되면 나는 모르겠다 하고 도망을 가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신감을 가지고 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도망을 가서 40년 동안 미디안에서 생활하는 중에 80세가 되어 불붙는 가시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때가 진짜입니다. 이 때는 모세가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기에 그 어려운 난관과 고난을 극복하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라는 데까지 선민을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모세가 자신감을 가지고 할 때는 은혜의 현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을 때에는 은혜의 현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호렙산에서 비로소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 은혜의 현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현장을 다 가져야 하지만 현장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 자체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따라 선민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자유의 은혜 (51-52상)
선민이 자유의 은혜를 체험한 그 현장이 애굽 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처음에 자기 형제 중에 요셉이 세도를 부릴 때 즉 나이 30에 총리가 되고 110살에 죽을 때까지 그 세도에 얼마나 재미를 붙이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80년이 지나고 난 다음부터는 '굴러 들어온 족속들이 왜 우리 위에 군림하는가?'하고 애굽의 토박이들이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이 죽고 난 다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들어섰습니다. 그 날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온갖 어려운 일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루아침에 군림하던 처지에서 노예로 몰락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종살이를 이스라엘 족속들은 300년을 넘게 했습니다. 이렇게 종살이를 하던 애굽 땅이 종살이와 고난의 현장만은 아니었습니다. 기적 같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방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유의 은혜를 체험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초강대국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삼아 억압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은 그 곳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었습니다. 조직력이 있는 것도 아니요, 군사력을 갖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00년 넘게 종살이했기 까닭에 원망 불평이 습성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종들은 아무리 일해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눈치껏 요령을 부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만 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얼마나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하는지 모릅니다. 불평이 습성이 되어 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광야 생활에서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합니까? 그러면서도 그 때 마다 원망 불평이 입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그런 습성 때문입니다. 원망 불평하는 일이 습관이 되면 큰 변이 납니다. 그러나 원망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제는 해방을 시켜야 되겠다 할 때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1절에서 52절 상반절을 보면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노아의 세 자녀 즉 셈, 함, 야벳 중에 함의 자손입니다. '함의 장막에서'라고 하는 말은 노아의 둘째 아들의 함의 자손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시키고 못살게 구는 애굽을 대하여 진노하실 때 10가지 재앙을 가지고 치십니다. 마지막에는 집집마다 장자를 죽여 버리십니다. 그 재앙 앞에서 초강대국 애굽도 어찌하지 못하고 손을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주어서 내 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유히 애굽을 떠나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기까지 그 사람들이 한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고 해방이 된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해방의 은혜, 자유의 은혜, 그 은혜를 체험하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로 바꾸어 말하면 질병이라고 하는 병마에 시달리며 고난을 당하고 병마의 종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병마에 꼼짝 못하고 얽매여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38년된 병자가 그렇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예수님이 찾아 가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가보니 많은 병자들 중에 38년된 병자가 누워있었습니다. 병들어 누워지내기를 38년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고자 합니다" 베데스다는 간헐천으로 "물이 용솟음 치면서 솟아오를 때 먼저 뛰어들려고 할 것 없이 네 상을 가지고 일어나 가라"고 하셨습니다.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마자 손발과 온몸에 힘이 오릅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병마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성전에서 단 둘이 만났습니다. "당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죄를 짓는 날에는 이 보다 더 큰 병에 걸릴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38년 동안 병들어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 죄 사함을 받았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의해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죄 때문에 남 모르게 그렇게 고민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병마에 얽매어 지금까지 죽을 고생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시 죄 때문에 나 혼자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으로 인하여 병마에서, 죄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데스다에 등장하는 병자는 가족들에 의하여 베데스다 못가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가족들도 이제는 돌보지 않습니다. 물이 동할 때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누가 먹을 것을 주면 먹고, 주지 않으면 굶어야 합니다. 이쯤 되면 가난이라는 말도 못 붙이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에 의하여 건강함을 얻고 펄펄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얻어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극한 가난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사업 실패로 또는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가난에서 해방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질병에서 해방, 죄에서 해방, 가난에서 해방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애굽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자유를 얻었을 때 자유의 귀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원망하는 습성 때문에 말끝마다 원망하였고 감사는 할 줄 몰랐습니다. 자유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미국이 초창기에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미국이 식민지였을 때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낸 페트릭 헬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경기도가 해방 후에 경기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해방 전에 왜정 하에서도 경기도가 있었고 도지사가 있었습니다. 식민지 하에서 도지사라는 것과 같은 말인 줄 아시면 됩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실컷 벌어서 다 빼앗기고 식민지 백성으로 온갖 착취를 당하고 멸시천대를 받고 이러고도 살아야 하느냐? 독립하자고 하면서 독립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페트릭 헬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자유는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귀하다는 뜻입니다. 미국이 싸워 독립을 했고 오늘날 자유국가로 세계에서 초강대국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어느 나라의 식민지인가? 또 우리가 남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억눌려 사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병마 그리고 마음을 짓누르는 죄악 또 죽지 못해 사는 극심한 가난 이 모든 것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을 얻고 자유함을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노예 생활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인도의 은혜 (52하-54)
본문으로 돌아가서 52절 하반절에서 54절을 보면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인도했다는 말이 3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광양에서 양같이 인도(지도)하셨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가도 가도 사막이기 까닭에 동서남북 구분을 할 수 없습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가면 보이는 것은 물뿐이고, 바다뿐이기 때문에 동서남북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침반이 없으면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앞뒤를 분간 할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목자가 양을 지도하고 인도하듯이 인도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자는 양을 어떻게 인도하고 지도합니까? 아침이면 우리의 문을 열고 다 불러내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면 양은 초장에서 실컷 풀을 뜯어먹습니다. 실컷 풀을 뜯어먹은 후에는 물을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자는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서 물을 실컷 마시게 합니다. 실컷 먹고 마시게 한 다음에는 서늘한 그늘로 인도하여 쉬게 합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우리 안으로 인도하고 밖에서 목자가 양들을 지켜 줍니다. 양들은 목자만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배고프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목이 마르면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쉬고 싶을 때에는 그늘로 인도해줍니다. 잠을 자야하는 밤에는 우리를 인도합니다. 목자가 양의 필요를 알아서 필요한 곳으로 제 때에 인도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부족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모르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부족함을 느껴도 이 때에 주는 것 보다 저 때에 주는 것이 더 좋기 까닭에 그 때 즉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여러분들을 인도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인도하셨다고 할 때 인도의 은혜의 그 현장은 광야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생활한 광야입니다. 이 은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실컷 자고 눈을 뜨면 구름기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구름이 내려앉고 불기둥이 솟아나와 광야의 추운 기온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심지어 밤에 행진할 때도 불기둥이 인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낮으로 주무시지 않고 졸지 않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밤에도 낮에도 우리의 일평생을 인도해 주시고 지켜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입니다. 골목에서 놀고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네 골목 또 친구의 집을 뒤져서 찾아 데리고 와야만 안심이 됩니다. 이런 일이 하두 반복이 되는지라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입니다. 지금은 어리니까 동네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좀 더 크면 3,000리 강산이 좁다 하고 돌아다닐 테니 그 때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면 하나님께 맡겼더니 그렇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10월 중순에 몽골을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울란바타르 시의회 의장의 초청을 받아 갔었습니다. 몽골에 도착하자 시의회 의장이 비행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의장의 비서가 모든 수속을 밟아 주고 저는 귀빈실에 들어가서 앉아 있다가 '갑시다'할 때 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의장의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승용차에 올라타니까 경찰 백차가 번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탄 승용차가 출발을 하자 그 백차가 앞으로 오더니 안내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좀 쉬어야 되겠다 싶으면 호텔로 인도해 주고, 시장할 때에는 좋은 식당으로 인도해 주고, 누구를 만나야 경우에는 만날 장소로 인도해 주고, 구경할 곳이 있으면 구경할 장소로 인도해 주고, 항상 앞장서서 인도해 주었습니다. 마지막 돌아오는 날에는 다시 공항까지 인도해 주고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을 소위 escort한다고 합니다. 경찰 백차만 있으면 다른 차는 다 물러갑니다. 그 차가 제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인도를 했습니다. 그런 호위를 받으면서 그 때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인도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가정 그리고 직장이 인도의 은혜의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정착의 은혜 (55-)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의 은혜를 체험한 현장은 가나안 땅입니다. 자유의 은혜의 현장이 애굽이요, 인도의 은혜의 현장은 광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5절을 보면 '또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 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7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7족속을 다 내 쫓아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땅을 전부 지파대로 나누어주고, 지파는 각 가족대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땅을 나누어 받은 백성들은 말뚝을 박고 이 땅은 우리 땅이라 하여 장막을 치고 또는 집을 짓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기업을 나누어 주셔서 정착하도록 하셨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것이 무슨 큰 은혜인가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을 보이신 다음에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평생에 땅 한평을 주셨습니까?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들 이삭 때에 주셨습니까?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손자 야곱 때에 주셨습니까? 역시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 사람의 시대를 족장 시대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목축업을 하면서 오늘은 이 들판, 내일은 저 들판으로 다니며 항상 초장을 따라 유랑을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보따리를 풀어놓고 살지를 못합니다.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애굽에 가서 고센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땅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거기에 자리 잡고 살던 가나안 일곱 족속을 내 쫓아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말뚝박고 집을 짓고 정착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이사 다닐 필요가 업습니다. 이것이 정착의 은혜입니다.
요즘은 셋방살이를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에 광성교회에 부임해 왔을 때 셋방살이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셋방살이가 얼마나 서러웠습니까? 애들이 떠들면 주인이 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두 말 하지 못하고 나가야 됩니다. 자녀들도 마음대로 키우지 못할 만큼 셋방살이가 서러웠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불교신자인데 우리 신이 너희들 신한테 견디지 못하니까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나가야 했습니다. 6개월이 멀다 하고 집 값을 올려달라고 합니다. 집 없는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 서러움을 삼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파트 25평짜리를 샀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장 달려와서 "목사님 우리가 집을 샀으니 입주 예배를 드려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가 좋습니까? 안좋겠습니까? 진짜로 좋습니다. 자기가 집 산 것도 아닌데 뭐가 좋을까? 하실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집을 사서 입주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목사가 되어 보지 않고는 그 심정을 모릅니다. 집을 산 사람은 시장에 갔다 와서 방바닥을 걸레로 닦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닦습니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방바닥을 쓸어 봅니다. '이제는 여기에 말뚝 박고 살게 되었다, 보따리 풀어놓고 살게 되었다'하여 너무 대견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정착이 아닙니까? 정착의 은혜가 이런 것입니다. 정착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셋방에서 쫓겨 날까봐 얼마나 근심 걱정을 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정착이 되고, 생업이 정착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도 정착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교회도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도 정착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정착의 은혜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민이 은혜의 현장에서 받은 은혜는 첫째 자유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억누르는 일들이 이모 저모로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누리는 기쁨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인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밤과 낮으로 인도하듯이 여러분들의 평생을 밤과 낮으로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또 금년도 내년도 하나님께서 늘 은혜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정착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정착이 되고, 생업이 정착이 되고, 삶의 터전이 정착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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