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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시 1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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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시편 136:1-4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잔치 날입니다. 더 많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절입니다. 또 2천년대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감사를 잊어먹고 있습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은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은 것이요, 예수님을 놓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감사는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에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6절 말씀에 그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감사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요 11:41). 깊은 슬픔과 절망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40절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감사하는 조건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을 때,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언제 감사했느냐고 하면서 불평해버리고 맙니다. 원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있으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37편 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돌보심에 우리는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말씀을 주신 것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일까,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예배, 산 제물 되는 것

첫째로, 산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산 예배, 역동적인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말씀 충만한 예배. 예배를 산 예배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산 제사로 드려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요 4:24) 그랬습니다. 그렇게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의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려 "산 제사, 산 예배"로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의 산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의 산 제사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소년의 정성어린 "감사의 헌신"이 그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계산했습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그랬습니다. "장정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본다면, 이백 명이 일한 것을 가져야 떡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광야에서, 또 황혼 저녁에 그런 돈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6:7).
그러나 그 제자 안드레는 먹을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말을 합니다. "소년아, 우리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나에게 주어서 이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단다." 그 소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점심 먹으라고 싸 주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인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면하고 배를 채울 수 있고 힘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집까지, 먼 집까지 갈 수가 있는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의 기적을 그는 똑똑하게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소년이 헌신하는 겁니다. "그래요. 내가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드리는 일이라면, 내가 내놓을게요. 아저씨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어린 소년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내놓는 헌신의 제사,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여야 하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 어떻게 생각하면 "야! 제자 안드레야,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고 적게 가져오려면 가져오지 말지, 나만 왜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여야 할 사람이 수만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그랬습니다. 그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요 6:11의 "축사"란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는 말).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떼어 주었더니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배불리, 원대로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을 믿으시면 "아멘"하겠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둘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

두 번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입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출생하게 합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보존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은 직접 흙을 가지고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어서 사람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 때는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직접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낳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저나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없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이 땅에 낳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생명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 아담, 어머니 하와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불순종과 불공경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사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작은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외침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내란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땅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도 들어오기 전에 한국, 우리 민족은 효 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족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효 정신과 가족제도가 이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이 선한 나라, 외침도 많이 받은 나라,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효 정신이 죽었습니다. 가족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했습니다. 서구문화가 몽땅 다 성경문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효 정신도 버리고, 가족제도도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 감사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감사할 것이 뭐냐? 그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감사하는 행위가 무엇이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은혜, 하나님 주신 사랑, 하나님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감사는 그 이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셔서 영혼구원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불신 이웃이 있다면,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이 있다면, 이는 전도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이 붙이신 것이다.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만약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삶을 연단 시키는 "가시"(고후 12:7)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시편을 많이 기록한 다윗,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 그 많은 시편은 그가 왕이 되어서 호위호식 하면서 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고통 당할 때, 아픔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괴로움을 당할 때 지은 시편이 다 그 은혜로운 시편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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