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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며 구하라 (막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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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며 구하라(막 11:25-27)

하나님의 사람은 꿈의 사람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꿈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의 야망이 아닌 꿈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집니까?

① 하나님이 주신 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② 하나님이 주신 꿈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능력이있습니다.
③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지도록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영적세계의 법칙이요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요15;7절에서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오직 내 열심만을 가지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혹시 내가 문제만을 구하는 그런 기도생활을 하여오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구하는 기도를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간과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볼까요? 예수님은 23절과 24절에서 믿음의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가 지금 입을 열어 기도하는 그것이 이룰 줄 믿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을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절)
이렇게 믿음으로 기도하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다음에 주님은 25절에서 아주 중요한 용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5절을 볼까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를 말씀하신 다음에 갑자기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유대인들은 늘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때에 용서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도와 용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그런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 기도와 용서의 관계
왜 우리 주님은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믿음의 기도를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곧 이어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요? 용서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역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한채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하지 못함이 우리의 기도를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가 먼저가 아닙니다. 용서가 먼저입니다. 기도가 먼저가 아닙니다. 용서가 먼저입니다. 화목이 먼저입니다.
용서치 못함은 나의 생명을 훔쳐갑니다. 용서치 못함은 나의 믿음을 훔쳐갑니다. 용서치 못하고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용서치 않고서는 우리가 주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마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8:18-19절에 보면 기도에 대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습니다. 이 구절의 시작은 "진실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을 주실 때 꼭 '진실로'로라는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절)
하나님은 교회에 묶고 푸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가 이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입니다. 하나님은 묶고 푸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묶고 푸는 권세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적전쟁을 잘 할려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가지고 이 묶고 푸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다음 19절을 볼까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19절의 말씀은 합심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마음을 가지고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합심으로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했습니다. 합심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교사들도 합심기도를 해야합니다. 설교 끝난 후에 합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온 가족의 식구들이 함께 손을 잡고 합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순식구들이 합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합심으로 기도하면 하늘에계신 아버지께서 기도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오륜교회 성도들이 합심기도의 위력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위 두 구절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땅에서"라는 말입니다.3번이나 나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라는 말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기도는 이 땅에서 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기도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하는 것이지 죽고 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지금 내가 살아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은 곧 바로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예수님은 이렇게 늘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에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되느냐는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은 일곱번도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용서에는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한대의 용서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는 일곱 번입니다. 일곱 번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몇번 용서해 주시고 끝나는 용서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용서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기에 연약하여 넘어졌을지라도 또 다시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꼭 용서에 관하여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 용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불화하면서 가족과 등지고 살면서 미움의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리 믿사옵고 믿습니다라고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며 기도해야합니다.

□ 용서는 하나님아버지의 성품
용서한다는 것 말로는 쉽지만 따지고 보면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용서할 수 없어서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목사님! 용서해야 한다는 것 알아요. 그런데 입으로는 용서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가 안되는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너무 너무 괴로워요.
왜 이렇게 용서한다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까요?
용서는 타락한 우리 인간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의 성품은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분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시기합니다. 본능적으로 나보다 잘 난 사람을 미워합니다. 한 마디로 못봐줍니다.
그런데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경험해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3: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성경은 주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용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에 기초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를 받은 자만이 용서를 경험해 본 자만이 할 수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용서의 축복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가 많이 불렀던 복음송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던 벌레만도 못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먹보다 더 검고 피보다 더 붉은 나의 죄를 흰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8:12)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다시 기억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무한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해 보셨나요? 지금 당신은 이런 하나님의 용서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오늘 이 용서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자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능력은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간증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용서는 죄성을 가지 우리 인간의 성품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가장 귀한 길은 주는 것과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는 삶을 사십시오. 용서하는 삶을 사십시오.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소록도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 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
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모두 열 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 아이가 열한 살 때였지요."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父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산 속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 버리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 놓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 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 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 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 밑까지 차올라 한 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 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아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아들은 소록도로 떠나고 나는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 주면 드러누워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 생각이 났지만 얼마 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애들은 아무 말이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셋째, 넷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 버린 아이, 다른 아홉 명의 아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 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 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더 늙어 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닭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게 내다 버린 채 한 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개의 화초보다. 쓸모 없다고 내다 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 와서 함께 살아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서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제발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꿈의 사람은 용서의 사람
꿈의 사람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따돌림도 받았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갔던 자신을 깊은 굴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죽이려고 했습니다.이때 어린 소년 요셉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살려 달라고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형들이 돈을 받고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버릴 때 나는 형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소리를 질러댔겠습니까? 그러나 훗날 자신의 꿈이 이루어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기 앞에 나타난 형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가 온갖 고생을 다하였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 되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되어졌음을 믿었기에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사람은 용서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떄문에 내 인생을 망치게 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기도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용서하며 기도합니다. 용서함이 없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혹 어떤 사람에 대해 원망이나 쓴 뿌리를 품고 있지 않는지...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지는 않았는지...<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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