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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갈증이 해소되는 자리 / 요 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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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7-14
"삶의 갈증이 해소되는 자리"

태풍 '루사'로 인해 전에 없던 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구미 지역은 직접적인 피해가 별로 없습니다만은 가까운 이웃 김천 지방이 큰 피해를 입어 우리 교우들의 가족들, 지인들 그리고 노회에 속한 여러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에 가을노회를 앞두고 공천위원회가 노회 회관에서 모여 김천을 갔었는데 아직도 수해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김천시민들을 격려하는 여러 격문들이 곳곳에 붙었고 다시 복구를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지난 주일부터 강릉, 김천 등의 수해 복구 현장에 군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인력들이 동원되어 복구작업을 펼쳤는데 그 중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물이었다고 합니다. 밥해 먹을 물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어 애를 먹는 모습을 TV화면을 통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수백 mm의 비가 하룻 동안에 퍼부어 지천이 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 속에서 기갈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망망대해 바다에서 물이 없어 죽어가는 난파선의 사람들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물은 많지만 그 물은 살리는 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강릉지역에 장티푸스가 발진했다고 합니다. 장티푸스는 물에 문제가 있기에 생기는 수인성 질병입니다. 물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물 속에서 겪는 물기근 현상,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만화가 이현세 씨의 출세작인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 만화의 남녀 주인공은 각각 까치와 엄지인데 저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저들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까치와 엄지가 옛날 어린 시절에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몇날 몇월 몇일에 여기에서 다시 만나자'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장소에 까치는 와서 엄지를 기다립니다.
엄지도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그 시간 그 자리로 까치를 그리워하며 나옵니다. 그러나 엄지는 까치 앞이 나서지 못하고 까치가 보이는 저만치 나무 뒤에 숨어서 까치를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엄지는 까치의 라이벌격인 선수와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까치는 그 언덕에 앉아 엄지를 기다리고 엄지는 숨을 죽인 채 눈물을 흘리면서 나무 뒤에 숨어 까치를 바라봅니다. 바로 이 때 까치가 손가락을 들어 땅에다가 글을 씁니다. 그가 그 퍼붓는 빗속에서 땅에다 쓴 글씨는 '갈증'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갈증...'
까치는 지금 엄청난 갈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까치의 속은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마름을 경험합니다. 까치는 그 갈증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침을 삼키면서 '갈증'이라는 단어를 땅바닥에다 씁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그가 쓴 '갈증'이라는 단어는 흐르는 빗물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립니다.
까치가 왜 그렇게 갈증을 느끼는 걸까요? 과연 무엇이 까치의 그 갈증을 해갈시킬 수 있을까요? 그 억수같이 퍼붓는 엄청난 양의 빗물이 까치의 갈증을 해갈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까치의 갈증을 해갈시킬 수 있는 것은 엄지밖에 없습니다. 엄지만이 까치의 갈증을 해갈시킬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입니다. 까치와 엄지는 그 빗속에서 사랑의 갈증에 애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갈증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도 있는가 봅니다. 이 삶의 갈증을 어떻게 풀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삶의 갈증에 시달렸던 여자입니다. 그녀가 태양이 가장 맹렬하게 내리쬐이는 한낮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다는 것은 그녀의 삶의 갈증이 얼마나 갈급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녀에게도 갈증을 해소시켜줄 물, 물이 필요한 겁니다.
사람은 다른 것은 안 먹고 살 수 있어도 물은 꼭 먹어야 삽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갈증을 해소하려고 그 땅에서 제일 좋은 우물을 찾습니다. 이 우물은 야곱의 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사마리아땅에서 제일로 쳐주는 생수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요..." 여인이 해갈을 목적삼고 온 그 물을 먹으면 그것은 한 순간의 육체적 해갈일 뿐 여전히 그녀의 삶은 목마를 것이고 삶의 갈증 또한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여인이 찾는 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여인이 찾아다닌 물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가 찾아다닌 물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은 무언가로 자기 삶의 갈증을 풀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쾌락과 자기만족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자기의 욕구가 채워지면 삶의 갈증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이런 저런 취미와 레져와 스포츠가 발달해 갑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삶의 갈증을 해소시켜가는 고전적 방법입니다.
이것을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고, 힘이 필요한 것이고, 이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여인에게 뭐라고 묻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입니까? 해갈을 위한 물을 말하면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진정한 해갈을 달라고 여인이 청하는데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이 뜬금없는 요구에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해갈과 이 여인의 남편의 숫자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경제적 방편인 동시에 힘의 방편이요 또 성의 방편이기도 하니까요.
가부장제 사회인 이스라엘은 여자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없는 여인은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같았습니다. 그러니 남자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그런 여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인생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돈과 힘과 쾌락을 얻기 위해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결혼했다가 헤어졌던 여인이었습니다. 다섯 남자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 남자들에게 다 진정한 사랑을 느껴서였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 또 이런 저런 삶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런 삶의 전철을 밟아왔을 겁니다.
지금도 어떤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무척 외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속적이지 못하고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여인은 자기를 아는 주님에게 새로운 자세를 갖습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선지자시군요...' 그리고 묻습니다. '어디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까요?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인가요 아니면 저희 조상들이 말하는 이 그리심산에서 인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녀는 지금 진정한 삶의 해갈을 맛볼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를 다섯씩이나 만나봤습니다. 돈있는 남자, 잘 생긴 남자, 힘있는 남자 등등 여러 남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그 어떤 삶의 해갈도 없었습니다. 돈도 별 것 아니었고, 힘도 별 것 아니었고, 용모도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이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공허함을 메꾸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권태와 싫증뿐이었습니다.

이즈음에서 그녀는 자신이 만난 이가 선지자라는 예감이 들자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삶의 진정한 해갈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도하기 두려워하고 꺼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에 너무 낮설어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저가 '이 무슨 귀신 씨알 까먹는 소리냐'할까봐, '이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할까봐 그래서 무안이라도 당하고 부끄러움이라도 맛보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에서 선뜻 복음에 대한 말을 꺼내질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그 문란하고 어지럽고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인생의 진정한 삶의 해갈을 위한 염원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이 삶의 갈증을 진정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좀 제게 가르쳐주세요' 이것이 그녀가 주님께 던진 물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녀에게 삶의 갈증을 풀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십니다. 우물을 길으러온 그녀에게 "이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를 것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그녀의 말을 받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인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이산도 아니고 저산도 아니라 즉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한데, 중심이 중요한데 신령과 진정으로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니라...'
그럼 그 예배를 통해서 맛보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녀에게 채워지는 것, 그래서 삶의 갈증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게 하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그것을 살아있는 물, 곧 생수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십니다.
먼저 말씀이 생수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25:13절에 보면 잠언 기자가 이 기분을 참 잘 묘사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더운 날 생수 한잔 마시면 시원해집니다. 그보다 더한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시원함을 못느낀다면 그건 아직 우리가 신앙의 중심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주 '만남의 길'에 멕시코에 간 이영섭 집사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집사의 간증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겁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제가 신앙의 가장자리를 맴돌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멕시코에서는 신앙의 중심자리를 서성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곳에서는 말씀이 지루했는데 지금 그곳에서도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내면에 말씀의 강이 흘러넘치는 겁니다. 스스로가 샘의 근원을 갖고 있으니 갈증에 허덕일 일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양적 표현으로 한다면 기가 막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으로 태어나 불우한 삶을 살았고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고 재물 복도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마음에 답답함과 한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타는 삶의 갈증으로 그녀의 속은 새까많게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을 향해서 주님은 '그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그 한서린 안타까움을 잠재워줄 것입니다. 그 타는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예배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원한 생수로서 자신의 삶의 갈증을 해소하고 타는 속을 시원하게 씻어내고 희망차게 새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체험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갈증날 때 시원한 생수 한잔 들이켜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답답한 심령을 시원케 하는 생수와도 같은 겁니다. 그러므로 이 시원함을 맛보기 위해서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떤 이온음료 선전을 보니깐 몸 안에 그 음료가 들어와 온몸을 그 음료가 채워가는 모습이 색깔로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이 우리 속에 가득 차야 하는 겁니다. 생수가 몸에 들어와 우리 몸에 스며들 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우리 심령과 영혼에 스며야 합니다.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뵈옵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묵상하고, 곱씹어서 내 안에 내재화 시켜야 하는 겁니다.
이번 태풍 '루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우리가 생각합니다. 공교롭게도 루사가 방문한 때는 휴가철이 끝나가는 8월 말이었습니다. 8월 31일에 우리나라를 지나갔습니다. 수확의 계절 9월에 막 접어들기 직전에 말입니다.
8월은 여러 가지로 들뜬 한달이었습니다. 다시금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다고 했습니다. IMF 이후 조금은 긴장하며 살았던 우리들이 많이 풀어졌다는 징표입니다. 해외여행의 봇물이 터지고, 소위 명품족이 등장하고, 정치는 어지럽고, 문화는 갈피를 못잡고... 이런 시기에 들이닥친 태풍 루사의 교훈을 우리가 진진하게 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어느 이름모를 시인이 예레미야애가 3:40절에서 외쳤듯이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할 때'입니다.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고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토로하며 주님의 긍휼을 호소해야 할 때'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십니다. 이런 시련을 통해서 뭔가 우리를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겁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배울 때 설교에 대한 정의 가운데 이런 정의가 있었습니다. '설교는 낙심하여 의기소침해진 자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붕떠서 부풀어 있는 자의 바람을 빼서 가라앉히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작업이다...' 결국 말씀은 우리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안내자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는 동안 우리는 항상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아 가고 잊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는 신앙적 행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의 갈증에 허덕이고 있습니까? 그 적절한 해결방법을 찾으셨습니까? 그게 정말 지혜롭고 바른 해결방법입니까? 인간은 삶 속에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그 만족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수가 아닌 건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건수가 아닌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가진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면 더 많은 재물을 갈망하게 되고, 가진 재물이 적어도 만족하면 재물에 대한 갈망을 그리 높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양을 추구하는 존재인 동시에 질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한데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갈증'을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과 쾌락의 굴레로 매어, 바로 이 여인이 찾았던 해갈의 방법을 좇아 말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 물동이를 내던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의 해갈을 얻는 비결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토록 상면하기를 꺼렸던 동네사람들에게 뛰어내려가서는 '그리스도를 만나보라'고 외칩니다. 여러분은 이 여인의 이 가슴벅찬 감격과 감동이 느껴지십니까?... 이런 삶의 감동을 맛보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삶의 갈증은 금력으로도 권력으로도 쾌락으로도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더욱 우리를 목마르게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의 만남 속에서만이 우리는 진정한 삶의 해갈을 얻고 풍성하고 기름지고 여유로운 삶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총이 임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러 마을로 내달리는 이 여인이 맛보았던 이 기쁜 환희와 가슴벅찬 감동이 여러분의 심령에도 그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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