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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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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본문 : 눅 15:1-7

어린 시절에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때로 빈 의자에 올라서서 설교를 하며 목사 흉내를 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서 전혀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합창단 단원이 되었으며 젊은 청년이 된 그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한때는 앉은자리에서 바그너의 작품 로엔그린을 계속해서 열 번이나 들을 정도로 그는 음악감상에 대한 열의도 대단했다고 합니다. 또 오페라의 음악을 듣고 콧노래로 이를 재생시켜 다른 친구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 정도의 음악성을 가졌습니다. 그는 철학 예술 등 각 방면의 책을 즐겨 읽었으며 재능 또한 대단하였습니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참호를 파고 은폐하여 있는 곳으로 작은 강아지가 한 마리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 강아지를 붙잡아 먹이를 주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그 강아지를 훔쳐가 버리자 그는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여리고 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배고픈 쥐 떼를 보고 자기의 빵 부스러기로 그 쥐들을 먹여 살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전혀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짐승에게도 해를 끼칠 줄 모르는 여성 같은 기질의 남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집안이 가난하거나 다른 여러 가지의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풍요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한번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달걀 두 개를 받아 쥐고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 적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작은 아이가 의자에 머리를 부딪쳐서 울자 그는 그 아이처럼 의자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슬픔을 같이 하고자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는 서른 네 살 때에 자기 어머니에 대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서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사랑하라고 권면 할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마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크게 놀라실 것입니다. 바로 그는<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토록 여리고 정이 많은 성장배경을 가진 사람이 후일에는 지구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악마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내가 통제 할 수 없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 둘 중에 어떤 것에 나를 빼앗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만큼 불행 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창조 이래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생근본에 대한 질문에 인류는 끊임없이 대답하며 살아왔지만 또 다시 끝없는 질문으로 남는 것이 이 문제입니다. 본래의 나, 그 본질적인 나를 아는 것을 우리는<자기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고 말했듯이 사람에게는 <지식욕>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질적으로 필요한 지식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인간에 관한 지식>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가? 아니 나 자신은 누구인가?"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 물음을 던져 온다는 것은 아직도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인간이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도 그 스스로 대답을 내릴 수 없다는 이 모순 자체가 이미 인간의 신비 속에 담겨진 인간의 무지를,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의 가련함을 입증하는 논제입니다. 파스칼은 이 점을 자신의 불후의 명작<팡세>에서 짧은 경구로써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얼마나 진귀한가? 얼마나 괴물 같고, 얼마나 혼돈 스러우며, 얼마나 모순되고, 얼마나 신통한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 확실과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영광이자 수치"

인간에 관한 지식 중에서도 더욱 미발달된 지식은 "자기에 대한 지식"입니다. 델피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써 유식하다는 당대의 온갖 지식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그들을 창피하게 만들었던 <소크라테스>처럼,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을 알라"는 자신의 요구 앞에 무지와 당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특히 나 자신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만약에 이런 우리에게 누군가가 끊임없이 따라 다니면서"너는 너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한다. 너는 먼저 너 자신을 알아야한다"고 폭로한다면, 스스로 죽고 싶거나 아니면 아마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놓고 생각해 봅니다마는 아마도 소크라테스도 정적(政敵)에 의해 죽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독배형에 처해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혹시 인간의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그 해답을 갈구한 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에 속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누구이며,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럭저럭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이런 골치 아픈 문제로 고민하느니 당장 살아가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절박한 항의를 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왜 사느냐고 물으시면 웃지요!"라는 희미한 그림자로 인생의 참 가치를 누리며 사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안다는 것, 이토록 중요하며 끝없는 우리의 인생 주제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이라고 하는 이 정체성만큼은 분명해야합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생에 대한 이해입니다.

어디 인생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동전의 종류가 몇 가지입니까?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1원짜리 동전과 5원 짜리 동전부터 10원, 50원, 100원, 500원 모두 여섯 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 동전의 앞뒷면이 모두 다릅니다. 500원짜리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학이 새겨져 있습니다. 100원짜리 동전에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50원 동전에는 벼이삭이, 10원짜리 동전에는 다보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 5원짜리 동전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거북선입니다. 1원 짜리는요? 우리나라 꽃인 피고 지고 또 피는 무궁화입니다. 이렇게 그림도 다르고 크기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물론 다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그 정체성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화폐의 기능으로 통용된다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반지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동전이란 오직 본래의 기능인 화폐의 기능으로 통용되는 그 정체성만큼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렇듯 모든 만물이 그렇겠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분명히 정립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사와 은혜와 권세 아래 있는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한 차원 높은 <신앙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비유에서 우리는 영적인 자기정체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정체성이란 너무나 명확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든지, 들판에 있든지, 심지어는 오늘 비유에서처럼 잃어버렸든지 양은 양이어야 합니다. 양이 양의 무리를 이탈해서 이리가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또한 될 수도 없고요. 만약에 양이 이리로 변해 버리면 주인이 찾도록 찾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잘 새겨보십시다. 잃어버린 양이, 양이 아니라 다른 짐승이 되어 버렸다면 그 고생하면서 찾을 보람이나 있었겠습니까? 양이었기에 자기의 몸에 상처가 나도록 험한 산과 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양이 자기의 양됨을 잊어버리고 이리처럼 행동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양이 자기의 양됨을 잃어버리는 것, 이게 뭡니까? 자기정체성의 상실입니다. 여러분!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양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아는 지혜입니다. 자,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양은 천성적으로 순진합니다. 도대체가 사납거나 악의가 없는 동물이 양입니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까지 한 동물이 양입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과도 통합니다만 정말이지 양에게는 약은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으면 더울 때는 포개서 자고, 추우면 서로 떨어져서 잠을 잘 정도로 바보 스러운 잔머리를 쓸 줄 모르는 순수한 짐승이 양이란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순수함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이중성입니다. 간사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런 이중성은 없어야 합니다. 표리가 부동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로 양 같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집을 찾지 못하는 대표적인 동물이 양입니다. 주인이 데려가지 않으면 어디도 가지 않는 양입니다. 그런데 양 같아야 할 우리는 주인의 인도 없이도 너무나 잘 갑니다. 못 가는 데가 없어요. 아니 오히려 이끌려 가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싫어요, 이게 혹시 우리의 본심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맘대로 우리를 뛰쳐나가 볼까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혼자 어디서 물을 찾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자생 능력이 없는 동물, 무능한 동물인 양이 우리의 존재인 줄 안다면 이러지는 못할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합시다. 신앙이 눈꼽만큼이라도 있다면 교회를 벗어나서 이리저리 헤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은 철저하게 순종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양은 코를 꿰지 않습니다. 목을 매지도 않습니다. 멍에도 없습니다. 들판에 그냥 풀어놓았을 뿐입니다. 도망가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맘대로 도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조금도 흩어짐이 없이 목자만을 바라보고 따라갑니다. 어디 좋은 길만 가겠습니까? 산을 넘기도 하고, 내를 건너기도 하고 가시밭길을 넘어가기도 하지만 양들은 묵묵히 따라만 갑니다. 반항이나 독자행동을 할 줄 모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도 어떤 방식도 없습니다. 여기는 싫고 저기는 좋다는 식의 자기 주장도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처럼 목을 매거나 코를 꿰는 법이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목자에겐 그래서 채찍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소는 뿔이 있고, 말은 강한 뒷발과 빨리 달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는 강한 이빨과 발톱이 있어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무기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릅니다. 비수 같이 찌릅니다. 너무 깊이 숨겨둬서 도무지 보이지 않는 무기들입니다. 그러나 한 번 꺼내들면 상처는 큽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둘러대는 무시무시한 살생무기입니다. 이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정말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양은 다른 일 때문에 그 행렬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양이 그렇습니다. 곁눈질하다가 길도 잃고 목자의 음성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을 만한 일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어요. 내 성격이 문제요, 내 인격이 문젭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너희는 양 같아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곤두박질하든 썩어지든 간에 반드시 양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자를 만나도 양이요, 이리를 만나도 양입니다. 양은 항상 양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이리 같이 교묘히 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숱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양이어야 합니다. 이 존재는 절대로 둔갑해서도, 변모해서도 안됩니다. 끝까지 양된 존재를 지켜야 합니다. 자, 양이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양을 만났을 때는 양이요, 이리를 만났을 때는 이리요,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호랑이요, 사자를 만났을 때는 사자가 된다고 한다면 이미 그는 양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말이지만 흔히 여자 분들을 두고 하는 말이 "여자란 결혼하기 전에는 비둘기요, 결혼 초에는 양이요, 10년이 지나면 여우요, 그 다음에는 호랑이요, 늙으면 사자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둔갑을 잘하는 성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를 두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을 양의 무리에서 빼어내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은 양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도 양이요 마지막도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어도 양이요, 설사 나의 잘못으로 잠시 신앙의 우리 밖에 있다 할 지라도 언제나 양이어야 합니다. 처음엔 양이다가 마지막은 사자로 끝을 맺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양이 양 울음소리를 내고 죽어야지 양이 호랑이 소리를 내고 죽거나 개의 소리를 내고 죽는다면 끔찍한 일 아닙니까?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끝까지 양의 울음소리로 울었을 때에 그 주인이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끔씩 이런 저런 이유로 신앙을 등지는 사람들을 보면 이 양의 울음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웬 사자 소리며, 호랑이 소리며, 때로는 분간 할 수 없는 소리로 교회를 향하여 소리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날 교회가 안고 있는 크나 큰 하나의 아픔입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양에는 제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대속물 되는 것이 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이 바로 양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스스로를 바르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양이 아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죄인 됨이 바로 양의 존재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양이 되신 것 아닙니까? 그 분은 이리가운데서도 양으로 살다가 양으로 죽으신 분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리 앞에서도 양이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이어온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도 양으로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죽을 때까지 주님의 말씀대로 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으로서의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비록 길을 잃고 헤맬 때라도 찾으시는 주님의 큰사랑을 경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이기를 포기하면 그 순간 사랑도, 은사도, 은혜도 멀어 질 것입니다. 부탁하건대 언제든지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양, 찾아서 잔치를 벌일 만한 가치가 있는 양으로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삶 위에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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