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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넓은 길 현상과 좁은 문 / 단 3: 8-18 ,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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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길 현상과 좁은 문
다니엘서  3: 8-18,  마태복음  7:13-14


  나쁜 쏠림 현상

한 여름 피서 휴가의 절정인 7월 말에서 8월 초가 되면 사람들이 동해안을 비롯한 여러 곳의 해수욕장을 찾아가느라 고속도로가 미어집니다. 짧은 휴가 일정 중 고속도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오히려 심신이 지쳐서 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7~8월 쏠림 휴가가 빚는 손실이 3조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기간에 휴가를 잡고 가족을 이끌고 고생길에 오릅니다. 조금만 날짜를 늦추거나 하면 조금 더 여유 있는 피서여행을 할 수 있을텐데, 막무가내로 그 기간에 피서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종의 쏠림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남들이 할 때 나도 하겠다는 심리적 현상이 그 원인인 것 같습니다. 남들이 몰려가는 때 나만 가만히 있으면 왠지 소외된 것 같아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쏠림 현상이 좋은 쪽으로 유도되면 건전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나쁜 쪽으로 유도되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기업들이 이런 쏠림 현상 즉 유행을 잘 이용하면 크게 돈을 벌게 됩니다. 가령 휴대전화의 경우는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보급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33%인 2,800만 명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급속하게 퍼졌는데, 이 역시 쏠림 현상에 의한 것입니다. 너도나도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가 내게 없으면 왠지 이 시대의 낙오자가 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별 필요가 없어도 결국 휴대전화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래도 이런 현상은 어쩌면 사회가 크게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별로 나쁘지 않은 쪽으로 쏠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나쁜 쪽으로 쏠림 현상이 일어나서 사회의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가령 청소년들 사이에 담배가 급속하게 퍼진 것 같은 경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남자 청소년들의 경우 담배 피는 것이 남자다움으로 보여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또 또래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도 쉽게 담배를 배우게 됩니다. 지금 남녀를 불문하고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급속하게 담배 피는 풍조가 퍼져나가면서 사회의 근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쏠림 현상을 주도하는 것이 신문이나 TV입니다. TV에 나오는 탤런트의 머리 모양, 그들이 만들어 내는 말과 행동은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갑니다. 그런가 하면 영향력이 강한 거대 신문들이 주도하는 대로 여론이 형성되면서 그 사회를 반공사회로 만들기도 하고 아주 보수적인 정치가 되게 하기도 합니다. 비판 의식을 갖고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쉽게 세뇌되어 그 주장과 그 견해를 그대로 받아드려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여론은 형성되고 그러면 그 신문은 그 여론에 힘입어 더 많은 판매 부수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과거 독재자들은 그래서 언론을 장악하고 그 언론을 통해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정권의 언론 장악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언론 쪽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지원하면서 언론의 권력 장악과 세확장(勢擴張)을 꾀하고 있는 쪽으로 세태가 바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거대 언론들에 대해서 신뢰를 가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언론 매체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일방적인 쏠림 현상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물론 이런 제동(制動) 매체들이 아직 그 세력이 크지 못하여 제대로 효과가 나지 않지만, 차츰 의식이 깨어나는 민중들이 많아지면서 사태는 역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쏠림 현상

한국 교회 내에도 이런 쏠림 현상이 있습니다. 70년대에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교회성장론이 모든 교회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성장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의 본래적인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실현보다는 교회성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데 문제가 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면서 시작된 군사독재정권의 장기화의 기틀이 마련되어 나라 전체가 독재정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때 한국교회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억압된 민중들을 교회로 끌어 모아 교회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운동은 좀처럼 활성화되지 않은 데 반해 교회성장론은  급물살을 타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그 흐름에 동승했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투쟁한 교회는 별로 성장하지 못하여, 그런 교회, 그런 목회자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해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회자들은 존경의 대상이며 그 교단의 실세로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커진 교회들이 그 시대의 여론을 바른 쪽으로 형성하고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하였어야 할텐데, 오히려 사회의 바르지 못한 여론을 따르면서 예언자적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그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힘은 생기지만, 그 힘으로 개혁을 이루는 대신에 가진 자의 물결에 동승하면서 그 힘을 계속 유지하려 하다보니 그 교회가 바른 신학을 따라 바르게 역할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나쁜 쏠림 현상을 예수님은 넓은 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끝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넓고 편안한 길로 자연히 쏠리고 그 길을 택하게 되고 그런 현상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심 없이 넓은 길을 택하게 만들어 결국 넓은 길 쏠림 현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런데 반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도 좁고 길도 험하여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 끝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가기로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잘못된 여론 형성에 의해 나쁜 쪽으로 쏠리고 있는 이 사회에 제동을 걸어 그 흐름을 바꾸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먼저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과 분별력을 가져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넓은 길과 좁은 길의 차이점을 보면, 우선 넓은 길은 멸망에 이르게 하고 좁은 길은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넓은 길에 많고 좁은 길에는 별로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그 길이 넓다는데 있습니다. 길이 넓다는 말은 가기 편하다는 뜻입니다. 그 길을 갈 때 어려움도 없고 핍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좁은 길이 꼬불꼬불하고 험한 산길이라면 넓은 길은 고속도로처럼 환히 뚫린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쪽을 택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성향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넓은 길 어구에는 "이 길은 멸망으로 이끕니다"라는 경고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당장 보기에 넓고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좁은 길 입구에도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합니다"라고 안내판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안내판보다 보기에 좁고 험한 길이기에 그 길을 포기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을 통하여 얻는 정보는 사물을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물의 가치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실제로는 별 가치가 없는 물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세계적인 상표를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가짜 물건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상표를 보고 물건을 산다는 약점을 이용한 상술입니다. 눈으로 본 정보만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인생의 길을 선택할 때 오로지 눈으로 보아 좋다고 판단된 길을 선택하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과학의 세계요, 합리적인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이런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넓은 세계가 있습니다. 영의 세계라고 보통 이름하지만, 가치의 세계요, 과학이 실증할 수 없는 세계이며, 보다 근원적인 세계입니다. 우리의 삶은 말할 것도 없이 보이는 세계에만 속하여 있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영의 세계에도 속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범죄하면서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약화되었기에 그 세계의 존재를 잃어버렸고, 따라서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두 세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결국 보이는 세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눈에 보이는 대로 가치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장 높은 가치로 인정하게 되어 그것만을 추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넓은 길은 부귀영화가 있는 길이며, 안락함과 향락이 있는 길을 뜻합니다. 거기에서는 영적 가치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의나 평화나 사랑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일차적인 가치인 돈과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돈과 권력이 곧 정의로 통하는 세계입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가 베푸는 동정심에 불과합니다. 이런 세계에서 종교는 다만 가진 자들이 교양을 더하기 위하여 택하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합니다. 도덕교과서도 만들어서 교육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득권층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신 그리스도

이렇게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화와 문명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영의 세계에 눈을 뜬 사람이 들어와서 보이지 않는 더 큰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서는 지금 여기에 이룩한 모든 가치가 전도된 새로운 가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외치면, 그는 곧 미치광이나 이상주의자로 낙인 찍혀 그 세계에서 추방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는 오셔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나라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교훈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거꾸로 된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이로 갚고 눈은 눈으로 되돌려 주는 세계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오른 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땅에다 보물을 많이 쌓는 자가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는 자들에게 그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흩어 구제하여 하늘에다가 쌓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가르침은 어리석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충동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받아드려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계의 기존 질서와 가치를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세계의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세계의 문화와 관습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사는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소수(小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한 넓은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때로는 불안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이 길을 고집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지금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며, 특히 그 길의 끝인 생명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절망하기 쉽지만, 성령의 보증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므로 그 고난과 절망을 극복하여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선택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좁은 길을 택하였으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정치는 대체로 하느님 나라와는 별개의 분야라고 생각하고 정치적인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하느님의 말씀 대신에 현실적인 효율성이나 언론을 택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믿음이 초보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 신앙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삶의 기준과 목표가 되지 못하고 겉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현실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판단을 거대 언론 매체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보고 또 신문을 보지만, 성경은 현실적 문제를 판단하는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하고 오직 신문만이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그 속에 깃들인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낱 고전적인 경전에 머물고 현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저들이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용감하게 따르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일 뿐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세속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이제 믿는 사람들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기독교 서적도 좀 읽고 성경에 의하여 현실을 판단할 줄 아는 비판력을 키워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이란 거대한 문명 사회에 포로 되어 갔지만, 그들은 그 거대한 문명의 흐름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모든 백성들이 다 엎드려 절하는 왕의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몰려가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가 택한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확신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회 여론이 한 곳으로 쏠려가도 우리가 거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따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좀더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이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어 그 뜻을 따라 좁은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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