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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려야 할 은혜 / 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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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야 할 은혜 (롬5장1-11) 


새로운 희망의 역사 그 감격의 현장

요즘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일 월드컵 축구경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니 축구를 즐긴다고 하기보다는 축구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되는 기쁨과 뿌듯함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 축구가 마침내 장한 일을 해냈습니다. 월드컵 16강 진출의 꿈이 실현된 순간 경기장과 거리엔 온통 붉은 옷의 물결과 감격이 넘쳐흘렀습니다. 마음껏 성원하고 환희의 눈물도 흘렸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 도전한 지 48년 만에 이룩한 쾌거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선수들이 이룩한 쾌거는 IMF 사태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국민에게도 자신감을 안겨주고 사기를 드높이는 데 많이 기여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응원 열기 속에 폭발하는 국민적 에너지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한 현상입니다. 한국 축구를 응원하기 위해 몰려든 붉은 옷차림의 물결은 이미 세계를 놀라게 했고 열광하는 분위기에서도 질서와 시민의식을 잃지 않는 우리의 모습에서 세계는 다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열기와 일체감을 국가 재도약의 발판으로 다지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지혜를 모아 반드시 달성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선수들이 국민의 염원인 16강 진출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발휘한 팀워크를 본받아 우리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국민 통합을 바탕으로 국력과 국가 이미지를 높여 세계로 뻗어나가는 진취적인 기상이야말로 축구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교훈입니다.

가장 큰 즐거움

현대인들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즐기기를 원하고 있으며.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가볍게 느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향락산업만 번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람마다 삶을 즐기는 방법도 다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 연극. 운동경기 같은 것을 구경함으로서 삶의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표. 열쇠고리. 수석. 골동품 등을 수집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버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동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르고.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연구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여기 저기 여행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심지어 쾌락이나 악을 행하는데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저마다 무언가를 통하여 즐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즐기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즐거움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즐거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진정한 즐거움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고있던 세상 즐거움이란 한낮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거짓되고 헛된 즐거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인생의 즐거움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55:1-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목마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린 자들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만족을 얻을까,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얻을까 .하여 헛된 곳을 찾아다니며 돈을 물 쓰듯  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면서 진정한 만족과 즐거움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께 나아와야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겨진 상태에서는 진정한 만족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과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기도 하며, 행복한 것처럼 꾸미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 그대로 살기보다는 행복을 가장해서 삽니다. 과연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톨스토이의 명작 중 하나인 "이반 일리히의 생애와 죽음"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인 '이반'이 "억울하다!" 하고 중얼거리며 화를 내면서 죽는 것입니다.‘이반 일리히’는 정직한 남편이며, 정직한 아버지로서 정직하게 살고 평생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다가온 시간에 지나온 생애를 생각해 보니, 정말 행복다운 행복도 못 느꼈고 보람 있는 시간들을 가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화가 난 채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다운 만족도 기쁨도 행복도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많이 제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 것을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평안에서 온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편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평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편안함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평안함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평안과 편안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즉 마른 떡 한 조각만이라도 그리스도인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알고 누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요 평안입니다. 우리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평안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본문 1절을 살펴보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누리자의 원 뜻은 "즐기자"라는 말씀입니다. 평안을 즐겨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세상이 주는 편안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소멸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소멸되지 않고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평안이 소멸되고 있을까요? 진실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7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연민과 한탄에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으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은총 속에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감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보좌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죄인으로서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으며 죄와 사망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하여 선을 행하여보기도 하고 고행을 하여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여보기도 합니다만 이것 역시 구원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사망과 고통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깊은 죄와 번민의 수렁으로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구원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 마땅히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예수님이 대신 흘리심으로 죄에서 용서를 하여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값없이 내려주신 선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공로는 하나도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구약의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느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약속하신 말씀을 능히 이루실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똑똑하고 믿음이 훌륭하여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순전하게 믿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만 아니라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5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이 은혜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삶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하였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과거에는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과 이런 평화의 관계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구원받은 백성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국가나 가정이나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평화를 원하고 있고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실상은 평화로운 모습보다는 갈등과 긴장과 대립 속에서 아옹다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평화를 구하지만 그 속에 참된 평화가 없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실 텐데 먼저 세상적인 편안함과 세상적인 정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참된 평화를 잃어버리고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전쟁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간들이 실제로는 만족이 없고 평화는커녕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늘 한쪽 가슴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욕구에 굶주리고 날마다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무엇하나 제대로 이룩하여 놓은 것이 없고 남들에게 떳떳하게 자랑할 만한 것들이 없고 건강마저도 자신할 수 없는 형편에 있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만족이 있고 참된 평화가 넘쳐날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가 내 마음에 있기 때문 입니다.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감격에 넘쳐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평안이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평화는 무엇을 성취하고 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평화는 나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이나 행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평화야말로 놀라우신 은혜요 두고두고 누려야 할 은혜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취소될 수 없는 이 평화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4:6,7절의 말씀에 나오는 이 평화는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평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죄와 죽음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준비하여 주신 평화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화평의 선물을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였음에도 부어 주시는 평화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서는 내 생명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속에서 매를 그렇게 얻어맞고도 새벽에 일어나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평화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능력이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히12:14). 마지못하여서가 아니라 당당하게 즐기면서 믿음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부요함을 인하여 즐기며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엄청난 능력을 부어주시면서 이것을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은혜를 우리 지체들끼리 나누면서 살아가십시다.

구원받은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천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껏 사용하며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나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놀라운 은혜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는 삶을 누리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녀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 바로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깨지고, 낙심하고 원망하며 위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환난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환난가운데서도 오히려 즐거워하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정체를 바로 알고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가 깨어지지를 않습니다(욥의 경우, 욥23:10).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난의 삶을 이기기 위하여 쾌락적인 삶을 추구한다든지 고난이 올 때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하여 명쾌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들이 환난을 당할 때 즐거워하여야 합니까? 그 이유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담겨 있는데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말씀이 "앎이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잘 받아들여 고난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루게 합니다. 인내는 오래 참는 것을 말하는데 인내라는 말의 뜻은 "무엇 아래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성도들이 어떠한 환난을 당할 때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만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 아래서 잘 견디며 적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고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인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빨리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 일수록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마다 잘 견디는 훈련을 받을 때에 앞으로 그 어떠한 시련 가운데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단이라는 말은 증명하여 보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방수 시계는 실제 물 속에 넣어 보아야만 방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쌀도 보면 인증미라는 마크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쌀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자녀들에게는 환난이라는 시련의 도광장에 넣어 보면 신앙의 질을 판명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알곡 신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여보면 그때 진짜와 가짜가 판명되고 알곡신자와 가라지 신자가 구별됩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하면 자기의 신앙의 진위를 나타내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환난을 주셔서 그 신앙인격을 연단시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6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라고 말하였고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말하였고 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만한 능력이 전혀 없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경건한 우리들을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그 사랑을 기억하면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만 의지합시다.

유명한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대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학대하고 책망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너무 추어주어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나 스스로 독립하려하니 불행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고상한 사람들입니다. 고상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저분한 생각을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의 황금 같은 시간을 허송세월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지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요, 우리는 고명한 일을 생각하고, 고명한 일만 감당하는데 항상 고명한 일에 서야만 합니다. 우리는 방바닥에 누워 쓸데없는 공상이나 일삼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선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그런 위대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그럼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환난에서 인내를 인내에서 연단을 연단에서 소망을 나아가는 진보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라는 교부는 고백하기를 "내가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는 참 평안이란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안이시고, 화평이십니다. 우리 안에는 참된 평화,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작은 평화와 비교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이것은 재물이 많고 건강하고 지위가 향상이 되어서 가질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겪는 일은 미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일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서 있지만, 저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출발점에 서 있으면서도 골인과 함께 주어지는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어전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받은 은혜입니다. 은혜에 들어가야 합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영혼이 메마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는 믿으면서도 마음의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은혜의 자리에 들어오신 분들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떠나 천국을 소유하신 은혜에 들어오신 분들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소유한 산 소망을 소유하신 것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의인은 우리 주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은혜 받아 은혜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소망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가정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고 국가와 민족과 인류의 장래를 바꾸어 놓습니다. 신앙은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완전한 의뢰를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확신인 것입니다. 신앙은 두려움을 보지 않고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낙심하지 않고 가능성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힘만 의지하지 않고 나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것, 큰 것, 높은 것, 빠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합니다. 남보다 좋은 것을 가져서, 남들이 알아주어서, 사업이 잘 되어서, 자녀가 성공해서, 그것에서 기쁨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의 세 가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에 보면,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세 군데에 쓰여졌습니다. 2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즐거움, 3절- 환난 중에서도 누리는 즐거움, 11절-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줘야 할 수준 높은 즐거움입니다.

믿음의 길은 행복하게 사는 것

사랑과 행복은 누가 만들어 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입니다. 원래의 상태라고 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래 형상은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평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의 길은 원래 바라는 것인, 바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사랑하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믿음은 갖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존재의 변화인 것입니다. 내가 거듭 났다고 하는 것은 내가 영적인 존재이구나, 내가 하늘에서 왔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의 실체의 본 면목을 알게 됩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중에 독실한 크리스쳔이 있는데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기도제목 가운데, 경기에 기용되지 못하는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하고 있으니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선수로 선발되었으면서도 실제 경기에는 기용되지 못하는 선수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거나 즐기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평으로 즐기고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도 아름다운 화목의 관계로 즐기며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쁨은 근육과도 같습니다. 훈련하면 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함으로서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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