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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변화와 변신 /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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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변화와 변신(행3장1-10)


국민 통합,축구가 해냈다 

전 세계가 열광하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한일 월드컵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출전 48년 만에 첫 승을 올리며 선전을 하므로 전 국민은 물론 해외동포들에게까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찬 한 주간이었습니다. 감격의 순간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축제였습니다. 저질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정쟁과 얽히고 설킨 부정·비리 커넥션에 지친 국민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습니다. 4500만 전 국민이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엑스터시에 빠져들었습니다. 월드컵 본선 첫 승리. 두 말 할 것 없이 우리의 자랑스런 선수들과 코치진이 피와 땀과 눈물로 일궈낸 영광입니다. 48년을 기다려온 국민의 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한국과 폴란드 전을 지켜보았으며 앞으로도 성원을 아낌없이 보낼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우리나라가 승리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장애인이든 소외된 자든 그 어떤 편견이나 대립이 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더불어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16강, 8강에 진출하는 것입니다. 축구경기를 통해서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치를 경험했습니다. 더불어 하나가 되면 이깁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의 응원으로 태극전사들이 힘차게 뛰어 승리했듯이 말입니다.

그동안 한국축구가 문전처리 미숙, 골 결정력 부족, 후반전에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개선되지 않았었는데 히딩크 감독 영입 이후에 체력이 매우 강해졌고 선수 선발과 기용에 있어서도 학연이나 명성 등 유명세를 타파하고 실력 위주로 과감하게 추진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를 가져왔고 변신했다는 것을 온 국민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에 있어서 많은 변화와 변신을 위해 새로운 다짐을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첫 승을 거둠으로써 최소 2조여원, 최대 14조여원의 직·간접 경제효과가 예상된다는 분석이 제기되는 등 월드컵의 경제 효과에 따른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규모 월드컵 경품 잔치가 최근 주춤해지고 있는 소비를 다시 자극해 내수를 활성화하고, 우리 기업과 상품들의 대외 광고 효과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높여 수출 회복세를 가속화시킬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민 통합과 자신감 제고 등 계량하기 힘든 무형의 효과들까지 합하면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업주의로 흐르는 세태를 보면서도 우리 국민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하나됨의 가치를 더 크게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의 차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보면 일생 동안 받기만 하는 거지 인생으로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생 동안 베푸는 삶으로 사는 부유한 인생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부자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비록 가난하지만 베풀 수 있는 인생이 부유한 자입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많이 소유했어도 그 마음이 거지로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비록 가진 소유가 적어도 베풀면서 사는 넉넉한 자, 일생동안 가난하게 살면서도 많이 주고 간 부자의 삶이 있습니다. 거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얻어먹으려는 거지가 있으며, 마음 속에 항상 만족이 없어서 남의 것을 가지려는 마음의 거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고칩니다. 오늘날 거지는 가정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받으려는 마음은 거지의 심리인 것입니다. 사람이 받고 주면 신사요, 받은 것이 없는데 주려고 한다면 성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받고 또 받고만 있다면 거지인 것입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한 젊은이가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취직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당연히 경영 부서에 보직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친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내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크게 실망하고 백화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생각을 달리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안내하면 고객들과 쉽게 만날 수 있어 그들의 구매심리를 파악하기로 하였습니다. 돈 안들고 많은 사람들의 구매 심리를 현장에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날마다 즐겁게 그 일을 했습니다. 젊은이는 얼마 안 있어서 부서 책임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최고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백화점 왕 페니의 이야기입니다.

똑같이 학교를 나왔고 똑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세계적인 백화점 왕이 되었고 한 사람은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환경 조건입니까? 능력의 차이입니까? 결국 생각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 것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 한 사람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였지만 한 사람은 그것을 기회로 삼았습니다. 출발할 때 생각은 조그마한 차이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생각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차이에 따라 인생은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장애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몇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첫 째는 육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입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또한 경제적 장애인입니다. 재산 물려받지 못한 사람이며, 구걸하였으며 경제적 약자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그는 정신적 장애인입니다. 그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 미문입니다.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받는 곳이고 생명이 변화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낫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온통 구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먹고사는 것에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잘먹고 잘사는 것도 아닙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고 비관적입니다. 희망과 계획이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격 장애가 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너무 공격적이거나 의존적이며 우정을 형성할 수 없거나 미성숙하며 기괴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행하는 아주 이탈된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마음을 가졌을까요? 40년 동안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제도의 벽」「물리의 벽」이 문제가 아닙니다.「마음의 벽」입니다. 마음을 열면 장애는 사라집니다.

오늘날 신앙인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 지 여러 해 또는 수십 년이 되면서 구원받은 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도 한번도 제 발로 걸어보지 못한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참된 구원의 소식에는 관계없이 성전 밖에 서 있듯이 세상을 향해서 동전같이 던져지는 지식이나 듣고 교양의 폭이나 넓히고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약동하고 감격과 희열이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대신에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대로가 좋다" "그냥 대강 대강 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서 못 뜁니다. 교회를 "누구누구" 위해 나와 줍니다.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부모를 위해, 목사 위해 나와 줍니다. 그런가 하면 관심이 다른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도움을 줄까? 가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각한 정신적인 장애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있었으며, 평생 그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다행히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날마다 그를 성전 문 앞에 메어다 놓아주곤 하였고,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겨우겨우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런 그의 숙명적인 삶을 바꾸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가 짊어진 숙명의 굴레를 그대로 가지고 죽을 때까지 가도록 조금씩 도와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벌떡 일으켜 주자, 이제까지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숙명의 굴레가 깨어지면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숙명적인 굴레

먼저 우리는 앉은뱅이와 그를 성전 문 앞에 메어다 주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에게 푼돈을 던져 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주어진 숙명 앞에서 어쩔 수 없다며 그 숙명의 굴레를 그대로 받아드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앉은뱅이는 선천성 장애자로 자기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고, 그는 한 번도 스스로 일어서 걷겠다는 생각을 갖지 못한 채 주어진 삶을 마지못해 연명해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바램이 있다면 굶지 않고 그 날 그 날의 끼니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눈에는 사람들이 모두 몇 푼의 돈을 던져주는 사람으로 보일 뿐 진정한 인간관계는 모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요즈음도 장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배려가 많이 부족한데, 하물며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장애자는 오히려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어 사람들에게 동정의 대상이 될 뿐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편견과 멸시를 뚫고 한 인간으로 선다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넘기 어려운 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그 모든 사회적 굴레를 숙명으로 받아드리면서 오로지 자기 연명을 위하여 돈을 구하는데 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구걸하는 앉은뱅이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거기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고, 그 숙명적 굴레를 쓴 채 힘겹게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이런 앉은뱅이를 매일 성전 문 앞에 메어다 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모르겠으나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려는 이웃이거나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들도 앉은뱅이의 숙명적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드리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정을 그에게 베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를 메어다 주는 일을 하므로 그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그 숙명의 굴레에 적응하도록 하여 기존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고 조용히 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제사하러 올라가는 사람들도 그 앉은뱅이에게 동전 몇 푼 던져주는 것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계명을 지키는 충실한 교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성전을 드나들면서도 하나님께서 저 앉은뱅이를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저들이 믿는 신앙에는 현실을 뒤덮고 있는 숙명의 굴레를 벗길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현실과 믿음의 세계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였습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 둘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하나님이 저 앉은뱅이를 고쳐주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거기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은 채 몇 백년을 살아왔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교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숙명의 굴레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어떤 능력도 없었고, 그저 율법주의에 매어 형식적인 제사만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아무 구원의 능력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에 불과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는 바로 그 성전종교의 실상을 그대로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굴레들

이런 앉은뱅이의 현실은 바로 숙명론으로 요약되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고 적응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마귀가 뿌린 독소로 사람들을 마비시켜서, 현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숙명적인 것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실을 진리로 받아드리면서 이 진리를 벗어나는 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현실을 이념화하여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 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이 이념으로 묶어 놓습니다. 종교인들은 이런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거나 혹은 죄 값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그 굴레 속에서 더욱 꽁꽁 묶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현실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체념하면서 그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렇게 무거운 숙명적 굴레를 벗지 못한 앉은뱅이 앞에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베드로와 요한이 그냥 지나치거나 동전 몇 푼 던져주고 가지 않고, 멈추어 서서 그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처음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은과 금 말고 그 앉은뱅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은 이제까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없는 베드로와 요한은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마귀의 굴레 아래 놓인 모든 세계가 추구하는 것은 은과 금이 제일의 가치입니다. 그것만 있다면 그 굴레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좀 짓밟히더라도 개의치 않고 견뎌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기존 체제를 뛰어넘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한 놀라운 이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바라기는 했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이제 베드로와 요한이 이 기적을 현실 속에 이루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베드로는 이제 이 놀라운 기적을 선포하였습니다.

기적은 현실로 나타나, 나면서 나이 들기까지 한번도 일어나 걷지 못한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숙명적 굴레라고 생각되었던 모든 죄와 죽음이 벗겨지고 참 생명의 자유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생명의 진리를 깨달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 있게 이 앉은뱅이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죄 아래 갇힌 모든 자를 해방하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사 61:1-2)

이제까지 누구도 이루지 못한 해방과 자유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취하셨고, 이를 제자들로 온 땅에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은 없다고 외친 과학자들과 통치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그 체제에 순응하여 살았지만, 성령 충만함을 통하여 확신을 얻은 제자들이 나타나서 이런 체제를 완전히 뒤엎는 놀라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자 예루살렘은 온통 요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존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저들을 짓누르던 죄와 죽음을 숙명으로 알고 거기에 순응하였는데, 이제 그것은 극복될 수 있고, 참 생명의 새로운 세계가 그 앞에 열린다는 사실을 받아드리면서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초대교회는 날마다 왕성하게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기성체제는 더 이상 이 새로운 복음의 불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어리석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이웃도 살리는 그런 것 말입니다. 베드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살고 앉은뱅이도 살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이젠 나도 살면서 주위사람도 살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은과 금"이 그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일시적인 필요는 채워줄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봅니다. 예수의 이름을 줄 수 있는 것도 참 행복이고 받을 수 있는 것도 행복입니다. 앉은뱅이가 줘도 받지 못하면 못 일어났을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있는 그 상태가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감사하는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 두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앉은뱅이였던 나로부터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께 찬양하기도 하고, 예배드리기도 하는 이런 기회를 나에게 주신 것이 감사한데 또 한편으로는 또 다른 내 모습에서 안타까운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다시 앉아버리려고 하고 아름다운 문 앞에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려는 마음, 그리고 계속 구걸하는 상태에서 머물면 편할 것 같은 마음이 우리 자신 안에 일어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매일 매일 일어나 걷고 뛰고 찬양하며 성전에 들어가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렵게 느껴집니다.

영적 교감, 서로 관계가 조율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생각 속에 누구나 모든 것을 고정시키면서, 없는 생각들, 기억 속에 묻혀있는 생각들, 나도 모르게 감추어져 있는 기운들, 이런 것들이 잘 조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고 찬양했다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을 좋게 보고 좋은 기운을 가지고 좋은 삶을 살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감각들, 기운들, 생각 속에 묻혀서 기억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부활되어 조율되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에, 진리 앞에 부딪히는 순간에는 머뭇거리는 것 없이 즉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즉시 일어나게 되겠지요.

아름다운 문으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들어가서 살다가 또 나와서 구걸하니까 그러면 안되지 하면서 또 문으로 들어 갔다가도 누가 나를 잡아당길 때는 또 구걸하는 모습이 "나는 아직 안 돼!"  세상과 현실에서 부닥치는 삶에서 예수님께 순종하면서 못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구절 "아름다운 문 곁에서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모두 그에게 일어난 일로 크게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라는 말씀이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닌 것에 대하여 구경하고 관심이 많고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야" 라는 쓸 데 없는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 부류에 나도 끼어서 "그 사람 거지였었지" 하며 크게 놀라 이상히 여기면서, 이런 곳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앉은뱅이였던 거지가 일어났다는 사실과 베드로가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놀라고 이상히 여기고 하는 이런 곳에 너무 에너지를 소비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이상하게 놀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저 사람 왜 그렇게 변했지"라는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바깥 장단에 춤추는데 연연하고 싶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바깥에서 누군가 잘한다면 그때부터 잘하고 있구나 안심하고, 누군가 잘못한다 하면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고 불안해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의 의식세계가 들어오는 시간

베드로와 요한은 작정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바쁜 하루의 일과 가운데서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기 위해서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작정된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기도나 예배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요,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정말 예배를 바로 드리고, 기도를 바로 드리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결심을 가지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기도가 끝나고 말씀공부가 끝나고 교회를 떠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서는 순간 내가 예배드렸기 때문에, 내가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공부했기 때문에 달라져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내게 있는 것 그것으로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용하며 살아 갈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 앉은뱅이를 바라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어떤 것으로도 그를 위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능력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감히 자신에게 있는 그 한가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크게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한가지 그들의 소유를 이용하여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고 한 영혼의 삶을 180도로 바꾸어놓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뜻

물고기는 잠 잘 때도 눈을 뜨고 잡니다. 항상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느 화백이 강원도 산골에서 흙벽돌을 찍어서 집을 짓는데 자기가 벽돌을 찍어서 벽돌마다 물고기를 그려 놓았습니다. 벽돌 300개를 찍었으면 물고기가 300개 그려져 있겠지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자기가 항상 깨어 있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랍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주변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착하고 있어서 그것을 못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고 꿈이 있는데 집착해 있으니까 지금 여기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 느낌들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인도합니다. 자기의 목표, 꿈, 의지 때문에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삶은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부분이고 삶은 전체라서 부분이 전체를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만약 이해 상관으로 맞아떨어진다면 이 땅에 정의 사회가 벌써 실현되었을 것이고 빈부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분 앞에 생각과 느낌을 다 내려놓고 그분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비추어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시간이고 이것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에 바로 우리가 삶의 지성소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정하는 공간 안에 갇힐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가 지정한 공간 안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옛날에 원시시대 때도 깨어난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안에 가두어 두질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 자기 교파, 자기 구역, 자기 가정, 자기 소유에 매여 있어서 되겠습니까?

지금 내게 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자

오늘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과연 내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신 소유는 얼마나 됩니까? 나의 소유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하나님께 돌려드리기에 부족합니까? 혹 아직도 나눌 만큼 풍족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절대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동전을 어떤 예물보다도 크게 받으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지금가지고 있는 부족함 그대로를 가지고 당신을 위해 사용하는 그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작은 것을 있는 것 그대로 드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그 믿음이, 또한 큰 것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작은 것들을 사용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그런 분입니다.

모든 여건이 마련된 가운데 이루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자라는 대로 드리는 그 믿음을 사용하여 오히려 놀라운 일을 이루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합시다. 시간은 많은데 물질이 없습니까? 그러면 시간을 드리십시오. 물질은 많은데 시간이 별로 없습니까? 그렇다면 물질을 드리십시오. 이것저것 다 없습니까? 그러면 그 없는 시간을 쪼개서 하나님께 기도의 다리를 쌓아 가십시오. 단 10분의 기도시간도 할애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쁩니까? 그러면 일하는 도중 틈틈이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와 믿음에 관한 말을 건네십시오. 그만한 용기도 없습니까? 그러면 일을 하며 남의 귀에 들리도록 찬송을 하십시오. 음치라서 찬송을 부르는 것조차도 오히려 선교에 방해가 될 것 같습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인답게 성실하고 진실 되게 사는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한가지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성전 아름다운 문 앞에서 구걸하던 그의 영혼을 붙드시고 일으키시고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듯이 오늘 내 주변에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무엇이 참된 기쁨인지를 못 깨닫고 살아가는 많은 영혼들을 붙드시고, 일으키시고, 그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문제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배하러 가면서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자기 곁에 있는 참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도 주님이 계실 때 우리 또한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 고 담대히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는 베드로와 요한의 손을 잡는 순간, 자기를 일으키기 위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네게 있는 것으로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부족하고, 약하지만 주님 앞에 바치는 순간 우리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되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의 삶을 구원하리라 믿습니다. 어린 소년의 손에 떡 다섯 덩이, 생선 두 마리는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고도 열 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내게 있는 것으로' 주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으시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게 있는 것을 내어줌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체험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 성전은 높은데 있어 항상 올라갑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계단을 좋아하지요. 어린 아이들은 올라가면 내려오지 못하지요. 무섭다고 하지요. 지붕 위의 사다리를 어린 아이들이 올라가면 못 내려옵니다. 어린이의 특징 중에 하나는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올라갑니다. 오후3시에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간다. 습관이지만 습관에 얽매이지 않는 삶, 때맞추어서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일날 하루 비우고서 일상의 삶에서 떼어놓고 교우들을 만나고 또 말씀 앞에 비추어 놓는 삶, 서로 나눔으로써 잃어버린 내 모습을 도로 찾으므로 성숙되어져 가는 내 모습을 확인해 가는 작업,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교회는 사업공동체가 아닌 거듭남의 공동체

교회의 본질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매일 구걸하면서 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에 대한 투사를 너무 잘 해 주고 있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되어 있는데 문 앞에서 매일 매일 구걸만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있음 그대로를 보는 것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고 나서 그에게 "우리를 보시오."하로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은과 금은 많은데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없다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앉은뱅이의 구걸은 잘 채워 주는데 일어나 걷게는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문 앞에서 구걸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고 당신 자체가 아름답소. 당신은 자신이 성전이요. 이렇게 전하는 기별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아름다운 문 앞에서 구걸해야 합니까? 당신 자체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죄지으면 죄지은 그대로, 그 아름다움 있음 그대로 볼 줄 아는 것이 정말 구원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생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그것보다 더 신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신비 아닙니까? 매일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한이라고 하다가 어느 날 내가 여자로구나 하고 깨달을 때 그 신비는 굉장합니다.

내게 있는 것 다 있지요. 그런데 왜, 그런 다 있음의 세계, 지존의 행복의 세계에서 그것을 못 누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있는 것을 못 알아차리고 없는 것에 힘이 다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불평하고 불만할 때 자신을 보십시오. 있는 것은 다 놓치고 없 는것에 집착해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불행의 모든 원인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음 그대로를 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있음 그대로만 보면 온통 모두가 사랑이지요. 아름다운 문이 아니라 이미 아름다움의 세계에 와 있습니다. 있음 그대로를 못보고 내 욕심대로 원함대로 보려고 하니까 못마땅하지요.

베드로는 말하기를 "금과 은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6,7,8절)-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걷고 뛰고 달려서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성전 문 앞에 구걸하면서 있었는데 성전 안에 들어가 뛰고 찬양을 합니다.

삶이라는 문 앞에서 늘 구걸하고 삶의 지성소의 진수를 한 번도 못 느끼던 사람이 "아, 이것이 삶이구나!" 하는 삶의 중심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연극하는 사람들이 변신하듯이 내가 지금까지 살던 모습을 변신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직업을 바꾸어서 성공한 사람들, 어느 날 정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강호동이 아닙니까? 씨름계에서 천하장사, 코미디계에서도 신인상을 받을 만큼..... 직업을 바꾸면 큰 일 나는 것 같은 그런 관념으로부터  성공한 이야기입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움추릴 만한 위기와 환경은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위기와 환경 가운데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 가 중요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의 장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음만큼은 불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테마는 변화와 변신

자, 우리는 모두 변신할 수 있습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인간 변화라고 말합니다. 아, 쨍하고 변하면 눈빛이 달라지고 걸음걸이가 변합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의지나 노력이 아닌 깨달음으로 깨어남으로 그 분의 은총으로 정말 변할 수 있습니다.

미문에 주저앉아 매일 얻어먹고 손만 보던 사람이 그 때까지도 앉은뱅이는 뭐 얻어먹을 것이 없나 하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게, 베드로와 요한은 거지가 바라는 것은 주지 않고 엉뚱한 것을 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아직도 뭘 얻으려고 앉아있는 그들은 그동안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는 근본 변화의 말을 들어 본적이 없지요. 30년 동안 그를 "불쌍하구나"하며 어떡하지, 안됐구나 라는 동정이 말만 들었지요.

그러나 예수 복음은 상담이 아니라 '일어나 걸으시오.'하는 깨어남입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것이 영성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는 일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인생에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하던 구걸하던 삶에서 벌떡 일어나 내 발로 걷고 뛰고 찬양하는 삶. 신앙의 변화, 변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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