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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에서 엘림으로 /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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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에서 엘림으로(출15:22-27) 

출 15:22-27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두 사람이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발걸음을 하나님께 맡기고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산 속을 헤매는 가운데 굶주릴 때도 있었습니다. 또 때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핍박을 당할 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사막을 가로질러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끝이 없는 모래벌판만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사막 한 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날을 사막 속에서 방황하는 가운데, 식량도 다 떨어져 버리고 마실 물조차도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타고 가던 낙타조차도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막 한 가운데서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어떻게 저로 하여금 사막 한 가운데서 목말라 죽게 만드십니까?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곳에서 저의 모든 복음사역을 마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해 주시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원망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끝내고 났을 때 뜻밖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종려나무 몇 그루가 보였던 것입니다.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였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를 바라보면서 기를 쓰고서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종려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은 거의 다 말라버리고 겨우 한 두 모금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또 첫번째 사람은 원망섞인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왕 물을 주시려면 많이 주시지, 이 적은 물을 가지고 어떻게 저의 갈한 목을 축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두번째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비록 적은 물이지만 이 물을 가지고 저의 갈한 목을 조금이라도 축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 생명이 조금 더 연장되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첫번째 사람은 매사에 불평이었습니다. 원망섞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합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배짱이 필요한 줄 압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이러한 뚝심과 배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신다고 할지라도 안가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기꺼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배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온 천지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계신 천국과 괴로움 많은 이 세상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신앙의 배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흘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눈앞에는 낮이면 구름기둥이, 밤이면 불기둥이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척박하고 메마른 사막지대인 수르 광야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땡볕에 행군을 했으니까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목이 갈할 때로 갈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라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반가워 달려가서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무지 물맛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물에 염분이 너무 많아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모세에게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모세가 그 물을 쓰게 만든 것도 아닌데, 마치 그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괴롭혔습니다. 그 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맞붙어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부르짖음은 결코 헛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나무를 물위에 던졌습니다. 쓴 물이 곧 단 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한 목을 축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도 성급하게 원망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일정한 법도와 규례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좀 더 훈련해야 되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증거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시원한 생수가 샘솟듯 솟아오르는 물샘이 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두 지파이니까 매 지파마다 한 물샘을 차지해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충분히 축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거기에는 종려나무가 칠십주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그늘 밑에서 여행으로 인해서 고단한 몸을 편안히 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마라에서 엘림으로 나아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라의 고통이 다 사라지고, 엘림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들은 물이 없다고 모세를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속에서 그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불과 사흘만에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뒤에 물이 없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는 너무 커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조금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있습니까? 그럴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새롭게 소생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현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하고 원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우리의 영혼만 병들어질 뿐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성급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결코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시험 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능히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쓴 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쓴 물을 달게 만드는 나뭇가지를 하나님은 미리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마라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엘림의 오아시스를 미리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원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마라와 같이 고통스럽습니까?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쓴 물이 변해서 단 물이 될 것입니다. 마라의 고통이 사라지고 엘림의 축복이 곧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의식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까? 왜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가게 하셨습니까? 수르 광야에서 목말라 죽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마라의 쓴 물이나 마시고 배탈이 나서 죽으라고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목마르며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끝내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이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소망 가운데 바라보아야 할 축복의 땅에 대한 기대감마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겨울철이었습니다. 세 어린 아이가 눈 위에 발자국을 만들면서 재미있게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동네 어른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 눈 위에서 한 번 달리기 시합을 해보아라."
그러면서 그 어른은 100m정도 떨어진 곳에 말뚝 세 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빨리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 위에 발자국이 똑바로 나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드디어 출발신호가 내려졌습니다. 첫번째 아이는 뛰면서 계속해서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의 발자국이 똑바로 나있나 안나있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번째 아이는 뛰면서 계속해서 곁눈질을 하며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다른 두 친구는 어떻게 뛰는지, 자기보다 빠른가 느린가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좌우로 곁눈질하지도 않고, 앞에 있는 말뚝만 바라보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경기가 끝났을 때, 누구의 발자국이 똑바로 나있겠습니까? 첫번째 아이와 두번째 아이의 발자국은 비뚤비뚤했습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말뚝만 바라보면서 뛰었던 세번째 아이의 발자국은 똑바르게 나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뒤돌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굽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재미를 그리워하지 마세요. 또한 우리 주변의 현실을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인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면서 줄달음질치는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너무나도 성급했습니다. 목적의식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모세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모세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의 원망을 자기 가슴속에 묻어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화병이 생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됩니다.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구약성경을 막론하고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외면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환난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함 받았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주홍빛보다도 더 붉은 그의 죄를 흰 눈보다도 더 희게 씻어주셨습니다. 그 어떠한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든 자가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못 고칠 질병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육신의 병도, 마음의 병도, 영혼의 병도 다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치료하심에는 중단이 없습니다. 마감이 없습니다. 요즘 의사들처럼 파업을 한다든지 폐업을 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그 치료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쉼없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마라처럼 고통스럽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하고 원망하지 마십시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와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마라에서 엘림으로 옮겨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를 물위에 던졌습니다. 여러분, 아무 나무나 아무렇게 던진다고 해서 쓴 물이 단 물로 바뀌어지겠습니까? 레바논의 백향목을 던진들, 향기 나는 향나무를 던진들, 쓴 물이 단 물로 바뀌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돈 다발을 던져보세요. 금은보화를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쓴 물이 단 물로 바뀌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시고 지시하신 나무를 던졌을 때 쓴 물은 단 물로 바뀌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시골의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습니다. 동이에 물을 가득 담고서 그 위에 나뭇잎 몇 개를 둥둥 띄워놓습니다. 그리고는 머리에 이고서 물을 길어갑니다. 그런데 왜 동이 위에 물을 채우고 나서 나뭇잎을 띄웁니까? 그래야 물이 쉽게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의 마음이 세상의 이런저런 일로 흔들리려고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의 마음에 띄워라! 그리하면 그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마라와 같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하고 원망하지 맙시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부르짖으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나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마음 속에 든든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고통은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쓴 물은 바뀌어서 단 물이 될 것입니다. 화가 변해서 복이 될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엘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예비해 주신 오아시스였습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마라에서 물이 쓰다고 원망하지 말고 조금만 더 참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계속해서 행군했더라면, 그들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엘림의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라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결코 마라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라에서 주저앉지 마세요. 엘림을 바라보면서 행군하시기 바랍니다. 마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형제의 아버지는 심한 알콜중독자였습니다. 날마다 술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를 향해서 욕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과였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두 형제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큰 아들은 어느 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였던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며 금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술주정뱅이였던 자기 아버지의 뒤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도 역시 심한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폐인처럼 되어서 병원신세나 지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은 자기들의 현실을 앞에 놓고, 똑같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술주정뱅이인 내 아버지 때문에."
그러나 형은 마라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마라를 탈출했습니다. 엘림을 바라보고 그곳으로 힘차게 전진했습니다. 결국은 엘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마라에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마라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라의 고통으로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엘림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예비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라의 고통은 길지 않습니다. 엘림은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곧 마라의 고통이 사라지고, 엘림의 축복이 우리를 반겨줄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밤에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이 엄청 불었습니다. 저희 새가족부실 옆에 새가족 쉼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텐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밤새도록 얼마나 세게 불었는지 텐트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전교인 새벽기도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본당을 올라오시다가 텐트가 완전히 뒤집혀 있는 모습을 보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과연 우리 교회 능력이 대단하구나. 확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났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라의 고통이 다 지나가고 엘림의 축복이 나타나는 역사, 바뀌어지는 역사, 뒤집혀지는 역사가 오늘 이 아침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라의 쓴 물과 같이 불평하는 마음, 원망하는 입술이 이제는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단 물을 내는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입술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마라의 삶이 지나가고 엘림의 축복이 우리의 가정에 임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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