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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집의 위기 / 눅 11: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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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1:23-28절
"빈집의 위기"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는 브라질의 리오 데자네이로 항구에는 엄청나게 큰 예수상이 높은 바위산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흑인 올훼' 라는 영화에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만은 아마 여러분들도 미디어를 통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양팔을 벌리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하얀 예수상은 우리나라 그 어느 절에 있는 대불보다도 큽니다. 이 예수상이 높은 곳에서 바다를 향하고 있으면서 마치 '내가 고통의 바다 같은 이 세상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듯 해 그것을 우러러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위로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예수님 상 앞의 바닷가 마을 쪽은 부촌이고, 예수님 상 뒤의 산쪽 마을 쪽은 빈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이 예수상을 보수할 때에 빈민촌 사람들이 시에다 진정을 했답니다. '예수님 상을 자기네 마을 쪽으로 돌려놓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닷가쪽 사람들은 그 동안 예수님이 내려주시는 복을 많이 받아 잘 살고 있으니 이제는 가난하게 사는 우리들도 그 복을 받도록 돌려놓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촌 마을 사람들의 반대로 시에서는 그 빈촌 마을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빈촌 마을 사람들이 다시 이런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럼 좋다. 그러면 예수님 상을 빙빙 돌아가게 하자. 그래서 당신들과 우리들이 골고루 그 복을 받도록 하자...' 그러나 이 기발한 제안도 결국엔 거부되어 그 예수상은 그냥 처음처럼 바닷가를 향해 서 있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 상 앞의 마을은 여전히 풍요롭게 살고, 예수님 상 뒤의 마을은 여전히 가난하게 산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상 앞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의 복을 받아서 잘 살고, 뒷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의 복을 받지 못해서 못사는 것일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그 생각은 어떻게 보면 참 무지한 생각입니다. 앞이라고 복을 많이 받고, 뒤라고 복을 적게 받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부자 마을 사람들의 생각 또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랐다면 예수님 상은 한번 반대로 세워놓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하다 못해 돌아가게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신앙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내려주시는 복 때문에 여지껏 풍요롭게 살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그토록 축복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제 더불어 사는 것이 주님의 은혜를 믿고 사는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그 예수님 상을 돌려서 가난한 자들에게도 자신들이 받은 그 복이 임하게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바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복을 계속해서 우리만 받겠다는 사람'과 '그 복을 우리가 그 동안에 풍성히 받았으니 이제는 그 복은 가난함 속에 사는 저들에게 돌리자는 사람', 과연 어느 쪽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얘기라는 것입니다.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내 모습은 이 두 모습 중 어디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십니까?... 자신이 사탄 안에 사는지 성령 안에 사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탄 안에 살면서도 성령 안에 사는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영적으로 나눈다면 '자기만 복받고 잘살겠다는 사람들'은 '사탄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나만 잘 살고, 나만 잘되고,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이기주의자들은 '사탄의 자식들'이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경우에 그 동안 하나님의 복을 넘치도록 받았으니 이제 이 복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야한다고 양보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말처럼 그렇게 쉽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문은 좁은 문인 겁니다.
그 브라질의 작년도 GNP가 4000 달러였습니다. 우리나라보다야 적지만 그래도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빈민층입니다. 상위 1%의 소득이 나머지 50%의 소득을 넘습니다. 빈부 격차 면에서 세계 1위 국가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나라 국민 중 카톨릭교인이 70%에 개신교인이 20%, 그래서 90%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부인 사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그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충만한 사람과 악령충만한 사람... 여러분은 과연 어디에 자신이 속해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한 이야기입니다. 14절부터 쭈욱 살펴보면 그 논쟁의 초점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주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과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율법의 부수적인 것들에 집착해서 주의 종들의 선포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이간시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독선과 교만에 대해서 주님은 논쟁하시고 마침내 42절 이하에서는 급기야 저들에게 '너희가 화를 입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저들은 주님이 언어장애를 가진 한 형제를 고쳐주시자 그걸 성령의 역사로 돌리지 않고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오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한 나라를 비유로 들면서 '어느 나라든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것이고 또 가정도 갈라져 서로 싸우면 무너지는 것인데 어떻게 내가 사탄을 쫓아냈는데 사탄들의 두목으로 사탄을 쫓아냈다고 하느냐'면서 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들려주신 비유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어떻게 똑같은 사건에 대해 이토록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주님이 언어장애를 가진 자를 고쳐주셨을 때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받아들이며 신기해하고 감탄해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들과는 반대로 몇몇 사람은 '저 축사행위는 악마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며 오히려 주님을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24절에 보면 이들은 '바리새인', 곧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딴에는 '좀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알세불이 어찌 자신의 부하들을 추방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사탄의 지배력이 약화될텐데... 주님은 그런 억지를 부리는 저들에게 '그럼 내가 사탄을 내쫓는 게 바알세불을 힘입는 것이면 너희들이 사탄을 내어쫓는 것도 바알세불을 힘입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악령을 추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당신께 협력하지 않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당신과 함께 모으지 아니하고 방관하는 자는 더 헤쳐놓아 모으지 못하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함께 하지 않고 반대하고 함께 모으지 않고 헤치는, 도움은커녕 훼방자하는 자들은 악령에 속한 자라고 단언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자입니까? 주님과 함께 모으는 자입니까?... 주님의 몸된 이 교회와 함께 하는 자입니까? 주님의 몸된 이 교회와 함께 모으고, 수고하고, 협력하는 자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등돌리는 반대자가 되어서 안되고,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헤쳐놓는 훼방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주님과 주님의 몸된 이 제단에는 함께 하는 자, 함께 모으는 자가 필요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우신 이 제단이 자신의 신앙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시면 떠나십시오. 괜히 분열시키고 이간붙이고 하지 말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곳엘 찾아가서 기꺼이 협력하며 함께 모으며 사역하십시오. 그게 옳은 겁니다. 왜 맞지도 않는 곳에서 피차 힘들게 삐그덕대며 비비며 사는 겁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이 제단에 세우신 종을 통해 시간마다 선포되는 그 말씀이 바로 나에게 그리고 우리 영락 신앙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이 제단에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제단의 신학과 비전과 분위기와 취향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시면 과감하게 이 제단에서 떠나십시오. 그게 자신에게나 하나님께 모두 솔직한 겁니다.

벌써 한 20년 전 얘기가 되었습니다만은 제가 서울 영락교회에 전도사로 있을 때에 요즈음 우리 교회처럼 지난 주 설교를 소책자로 만들어 그 다음 주일이면 로비에서 묵상용으로 전도용으로 판매를 하곤 했었습니다. 아마 50원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로 당회장인 박조준 목사의 설교가 실리고 한 달에 한번은 원로목사인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실렸습니다.
신학교를 막 졸업한 전도사 시절이었는데 그 두 분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설교를 한 두 해 해온 분들이 아닙니다. 수 십년을 해온 설교의 대가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한 주간 내내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설교를 준비합니다. 행여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기 입장이나 주장이 들어갈까 수없이 원고를 다듬고 또 다듬으면서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러면 주일 설교도 은혜가 되지만 그 다음 주일에 책자로 나오는 설교문도 참 인기가 있어 전국의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정기 구독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나간 교인도 있었습니다. 원고 설교는 성령으로 하는 설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으로 하는 설교는 원고 없이 그냥 강단에서 성경 하나 놓고 외치는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영락교회 목사님들은 성령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성령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은 몇 안된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이런 병든 신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게 정말 바알세불이 든 자입니다. 한 주간 내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기를 비우고 증거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자가 이 바리새인들처럼 사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원고는 다 시간 시간 기도하는 당신의 종에게 성령께서 주신 적절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 성령으로 설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로 기도원이라든가 이상한 곳을 쫓아다니면서 양식을 잘못 먹어 영혼이 오염된 자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이거 잘 분별해야 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 하지요. 원고 없이 그냥 성경 하나 놓고 외치는 게 성령으로 설교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패널티킥 못 찬 멍충이는 한강 물에 코박고 죽으라'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수 만명의 목사를 대표해서 부활절 설교를 한 그 분도 아마 한 주간 동안 기도하며 설교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고를 잘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 주간 기도가운데 성령께서 주신 원고에 있는대로만 말씀을 전했으면 되었을텐데 바로 다른 유혹에 빠져 거기서 벗어나 자기 혈기로 내뱉다보니 그런 실수를 한 겁니다. 그건 원고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게 성령으로 한 설교입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 제단의 말씀 선포자로 저를 세워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일마다 말씀을 전하며 행복에 잠깁니다. 한 주간 기도하며 준비한 말씀을 보통 주일 새벽 1시경에 마무리짓고서 잠자리에 들 때면 더없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한 세 시간 눈붙이고 다시 새벽부터 저녁까지 주일 사역을 마무리하고 밤에 '만남의 길'을 만들면서 또 한번 설교를 접하게 될 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말하면 때로는 어느 영화감독처럼 '주님, 정말 이 설교를 제가 한 것입니까?' 그렇게 외칠 때도 없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을 문서화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제단에 세움받은 저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하는 간증이기도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제게 주신 모든 은사와 달란트를 통해 오로지 이 제단에 속한 여러분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안맞으면 말씀이 맞는 곳으로 가야지요. 원고설교 한다고 성령으로 하는 설교가 아니라면 원고설교 않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직통 계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해야지요.

이런 귀신을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귀신의 특징이 무언지 아십니까?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에 보면 터미네이터가 이렇게 외칩니다. 'I will be back!'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되돌아옵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하던 사탄도 '잠시'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주님을 늘 괴롭혔습니다. 기적의 현장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그러한 주님의 생애를 알고 또 자신이 직접 사탄을 경험했던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고 했던 겁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특징이요 이게 바로 우리가 깨어있어야할 이유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귀환은 우리가 사는 평생에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사막을 두루 배회하며 거처를 찾았으나 결국 쉼터를 찾지 못하자 다시 옛집으로 되돌아옵니다. 와서 보니 뜻밖에 집은 비어 있고 게다가 청소도 잘 되고 정돈까지 잘 되어 있습니다. 주인만 없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은 '얼씨구나 이게 웬일이냐' 하며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진을 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뭘 말하는 것입니까? 문제는 그 집이 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돌아와 그 집이 비어있고 청소되고 잘 정돈 된 것을 보면...'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논리적 조건문으로 만약 그 집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사탄은 들어가지도, 또 들어갈 엄두도 내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이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다면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했어야 할 것인데 나태하고 안이하고 은혜를 망각하고 그릇된 사고에 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않는 인생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가 귀신들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에는 그 귀신을 쫓아내고 와야할텐데 일곱 귀신까지 곁들어 끼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의 촛점은 사탄이 쫓겨난 바로 그 자리를 그냥 텅 비워두면,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놓지 않으면, 더 악한 귀신들이 떼로 몰려와서 득실거릴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화단을 비워두면 잡초가 무성하지만 좋은 꽃나무들로 채우면 잡초가 무성하게 되지 않습니다. 귀신이 쫓겨났으면 그 자리에 얼른 새 주인을 모셔야 하는 것이거늘 교만에 사로잡혀 그걸 못하는 겁니다.

그럼 그 빈 집을 무엇으로 채울 것입니까? 주님은 그 속엔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 가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여인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할 때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지켜 행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가득 차야 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흠뻑 뿌려져서 거기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혀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얼씬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는커녕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말씀을 판단하고 있으니 그 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한 귀신에 일곱이 더한 여덟 귀신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속에 말씀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정말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하며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탄은 얼씬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동시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행10:4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충만한 길이 바로 성령 충만한 길이요 사탄이 얼씬도 못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전인 마음을 소제하고 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 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들은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성령으로 하는 말씀이니 아니니' 하고 앉아있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좋으니 나쁘니' 그 타령만 하고 있으면 뭐가 되겠습니까?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자가 어찌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을 여덟 귀신이 노리면서 들어가 그의 나중 형편을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말씀 충만과 함께 성령 충만한 삶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분부가 실천되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사탄이 더 이상 왕노릇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곱 귀신이 진입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그 대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로 자신을 그야말로 '성령의 전'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성경에 '일곱 귀신들린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이 말은 그녀도 언젠가는 한번 회개하고 새로워진 경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빈 영혼의 집을 방치함으로서 다시 악한 일곱 영에 사로잡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음란과 방탕과 거짓과 교만과 미움과 불화의 여인이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주님이 고쳐주시어 그녀는 이제 새로워져서 말씀으로, 성령으로, 주님으로 자신을 채워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탄에게 빈틈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러면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고 작고 사소한 것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겸손히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이것 봐, 네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질 수 있고 더 똑똑해질 수 있어...' 그렇게 충동질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탄의 암시에 취해 그 다음엔 아담과 하와처럼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전한다는 망언과 억지를 부리게 되는 겁니다.
이 제단에 부름받은 우리 모든 영락의 권속들의 심령 속에는 말씀과 성령만이 충만해서 참으로 복된 은총의 삶만을 누리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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